부모님과 서유럽 3개국을 여행했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여행이었다.
염려하던 일이 마침내 일어났다. 독일에 온 이후 계속해서 늦춰왔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부모님이 독일에 오신 것이다.
부모님이 독일에 오신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부모님과 함께 일상을 지내는 일이 어려운 건 아니다. 문제는 부모님과 함께 열흘 동안 여행을 다니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파리의 에펠탑과 루브르 박물관, 스위스의 융프라요우,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와 괴테 생가를 보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이미 가본 곳들이지만, 다시 가는 것도 괜찮았다. 파리를 시작으로 제네바와 인터라켄을 거쳐 하이델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하는 계획을 세웠다.
사실 아버지는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 로마의 콜로세움, 베네치아도 보고 싶다고 하셨지만 열흘 만에 소화할 수 있는 일정은 도저히 아니었다.
아버지와 둘이서 여행을 다니는 건 괜찮았다. 나는 아버지 혼자서 오시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머니는 손자, 손녀를 보고 싶어 하셨고, 이번 기회가 아니면 다시는 유럽 여행의 기회가 없으리라 생각하셨다.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여행을 다니는 건 생각만 해도 끔직했다. 부모님의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도 웬만하면 두 분 모두와 같은 공간에 있는 건 피했다.
파리로 떠나기 전부터 부모님 사이의 갈등이 불거졌다. 아버지가 쾰른 대성당을 보고 싶다고 하셔서 쾰른으로 갔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였다. 아버지는 쾰른 대성당의 검은 외벽을 보시자마자 “너무 끔찍하고 흉물스럽다.”고 하셨다. 쾰른 대성당의 내부를 휙 둘러보신 후 5분도 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말도 안 된다면서, 힘들게 왔는데 벌써 가는 게 가능하냐, 당신은 맨날 이런 식으로 돈 값 못하는 행동만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셨다. 부모님이 싸우시는 흔한 패턴이었다.
다음 날 부모님과 나, 둘째는 플릭스(FLIX) 버스를 타고 파리로 향했다. 아내는 학교에 가야 하는 첫째를 돌보기 위해 집에 남아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부모님은 버스 안에서 큰 소리로 싸우셨다. 다른 승객들이 알아듣지 못할 말로 제지하기 전까지 계속 싸우셨다. 싸운 이유는 별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독일 버스기사가 한국 고속버스 운전사들처럼 요리조리 운전하지 못한다는 불만을 토로했는데, 아버지는 버스기사를 편드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잘 난 것 하나 없고, 외국 나오니 너나 나나 똑같다며 궁시렁대셨다. 아버지는 그 소리를 참지 못하고 버럭 화를 내셨다. 이것 역시 두 분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는 흔한 이유였다.
애초에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결정한 내 잘못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 두 분을 모시고 수천 킬로미터를 운전할 자신이 없었다. 어떠한 이유로든 차 안에서 계속 싸우실 것인 분명한 터라 운전에 집중할 수 없을 게 확실했다.
파리에서는 에펠탑 근처에 민박을 얻었다. 나와 둘째는 에펠탑에 두 번 가야만 했다. 한번은 아버지와 에펠탑 꼭대기에 올랐고, 다른 한 번은 어머니와 에펠탑 아래 공원에서 저녁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이왕 파리에 왔으니 꼭대기에 올라가보자 하셨고, 어머니는 아래에서만 봐도 충분하다고 하셨다.
에펠탑에 올라가는 표를 사기 위해 1시간을 넘게 기다렸지만, 아버지는 정상에 도착한 후 5분 만에 내려가자고 하셨다. 나를 그런 아버지를 만류하면서 30분을 버텨야 했다.
두 분은 세느강 유람선에서, 베르사유 궁전에서, 개선문에서,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싸우셨다. 함께 식사하는 끼니마다 매일 잠자리에 들 때마다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계속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때때로 나는 둘째를 데리고 피난을 가야만 했다.
제네바에서 잠잠해지던 싸움은 인터라켄에서 마침내 폭발했다.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표시로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마침 옆에 있는 휴게실이 비어 있어서 그곳에 몸을 숨겼는데, 부모님의 싸움은 한 동안 이어졌다. 몸싸움까지 하시는 듯했다. 얼마 후 어머니가 방문을 나선 다음에야 싸움이 그쳤다.
부모님이 집에 계실 때도 이렇게 자주 싸우시는 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살 때의 경험에 의하면 한 달에 한두 번 싸우셨다. 집에서는 각자의 할 일이 있었고, 싸움을 피할 공간도 있었다. 하지만 여행은 달랐다. 같이 행동해야 하셨고, 혼자서 갈 만한 곳도 없었다.
인터라켄에서 아버지는 혼자 융프라우(Jungfrau)에 올라가셨다. 나는 비와 구름으로 인해 산 정상에서의 전망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가지 않는다고 했다. 부모님의 다툼에 항의하려는 나름의 소심한 복수였다.
나는 어머니와 숙소에 남아 하루 종일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들어야 했다. 언제나처럼 결론은 ‘이혼’이었다. 하지만 이혼의 가장 큰 걸림돌은 예나 지금이나 경제적 문제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신이 손해 보는 이혼을 원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결국 프랑크푸르트와 하이델베르크를 가지 않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기차표와 숙소를 취소했다. 일부는 환불이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차라리 일찍 돌아가는 게 이익이라고 판단했다. 여행을 중간에서 포기할 정도로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인터라켄을 떠나는 날 오전에는 며칠 만에 해가 떴다. 우리는 인터라켄에서 제일 높은 곳이 하더 쿨름(Harder kulm)에 올라 융프라우를 보았다. 여행에서 유일하게 평화로웠던 순간이었다. 비록 모든 계획이 뒤집어진 후이긴 했지만.
인터라켄에서 뒤셀도르프까지는 기차를 2번 갈아타고 7시간이 걸렸다. 돌아오는 길에 나의 직감이 옳았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두 분은 서로에게 실컷 상처를 준 다음에야 비로소 싸움을 멈췄다.
여행은 일상에 감춰져 있던 진실을 드러낸다. 이미 존재하는 진실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부모님이 서로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은 진실이고, 내가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진실이다. 어머니 혹은 아버지와 함께 할 수는 있어도 두 분 모두는 불가능하다.
또 다른 진실은 부모님과 함께 하는 여행은 즐겁지 않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둘 중 한분만 함께 하는 경우도 즐겁지는 않다.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여행을 통해 좋은 구경을 시켜드리고 좋은 음식을 드시게 하는 것은 효도이다. 자식 된 도리로서 나에게 부여된 의무이다. 하지만 그런 의무를 수행하는 것과 별개로 어머니 혹은 아버지와의 여행에서 나는 지속적인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부모님에게 효도해야 하는 것은 공동체가 나에게 부과한 윤리이지만, 부모님과의 여행이 즐겁지 않다는 것은 나의 개인적 진실이다.
부모님과의 여행이 즐겁지 않은 이유는 많다. 취향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함께 여행하기 쉽지 않다. 그런 진실은 여행에서 더 잘 드러내지만, 일상에서도 그것이 진실임은 변함이 없다.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는 관념을 제외하면, 일상에서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나에게 기쁨을 주지는 않는다. 그것이 진실이다.
더 나아가 가족이기 때문에, 자식이기 때문에, 아내이기 때문에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다거나, 즐거워야 한다는 관념을 거부한다. 가족이어도, 자식이어도, 아내여도 그 사람으로부터 기쁨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그것은 잘못된 것도 아니고, 이상한 것도 아니다.
누군가 나에게 공동체의 윤리가 개인의 진실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면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적어도 나는 가족이기 때문에 함께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함께 있음으로서 기쁨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해야 한다.
나는 부모님이 아무리 단단히 결심했어도 당장에는 이혼하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실제로 그때부터 4개월이 지났음에도 아직 이혼 도장을 찍지 않으셨다. 현실의 문제들이 그만큼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런 현실의 문제들로 인해 진실은 외면된다. 일상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일상은 지속적이므로 진실은 계속 방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