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을 이기는 정신승리

by 김도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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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되어 놀면서 살고 싶다” 유튜브 알고리즘에 자극적인 썸네일이 떴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영상이었다. 영상 속 질문자는 힘든 직장생활에 분노하는 사회초년생이었다. 자신이 가난하여 노동해야 하는 것이 괴롭고, 부자나 예술가처럼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살고 싶단다. 편협한 질문자의 말투는 격했지만 내용은 공감이 갔다. 법륜스님의 대답이 기대됐다. 스님,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하게 경험하는 열등감을 어떻게 해결해 줄 거예요?


놀러나 다니는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2-4 screenshot.png 떨리는 목소리로 울컥하던 질문자


법륜스님은 질문자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넓고 긴 시공간을 펼쳐 다양한 삶을 보여주며 질문자의 삶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려줬다. 인류문명이 무지의 시대에서 지금에 이른 과정을 간략히 설명했고, 지구 반대편에서 내전, 기아, 재해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법륜스님의 설법을 들은 질문자는 후련해진 듯했다. 자신의 삶 속에서 즐거움을 찾겠다며 드리는 질문자의 감사인사가 개운하게 들렸다. 그는 더 이상 열등감에 괴롭지 않을 것이다.




나도 똑같은 경험을 했다. 지난겨울, 지인과 백화점에 딸린 작은 갤러리에 갔을 때였다. 갤러리의 관장은 우리가 그림을 살 것 같았나 보다. 갑자기 다가와 한 작품을 추천하며 작가에 대해 설명했다. 뛰어난 학력으로 최고의 해외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젊은 작가였다. 관장은 묻지 않는 정보를 상세히 늘어놓으며 이 작가의 지속적인 활동 보장과, 작품의 가격 전망을 강조했다. 지인은 상세한 설명에 감사를 표하며 그림을 사지 않았다.

문제는 나였다. 순식간에 열등감으로 몸이 굳은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알레르기 반응 같은 감정이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부유한 예술가에 대한 열등감이라니! 나는 이 감정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며칠을 우울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로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역사, 철학, 명리, 동서양 고전... 대충 퉁쳐 인문학이라 묶이는 지식에 재미가 붙었다. 낯선 이야기가 이해가 되든 말든 팟캐스트를 보고, 책을 읽었다. 온통 모를 소리 투성인 것조차 좋았다. 나의 무지를 인지할수록 넓은 지평선을 만난 듯 벅찼다. 내면이 확장되자 열등감은 상대적으로 작아지다가 끝내 모래알처럼 사라졌다. 이제는 열등감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다.




km_029_127_01.jpg 첫 해외여행에서 큰 충격을 받았던 연암 박지원


약 200년 전에도 나처럼 열등감을 느낀 사람이 있었다. 청나라 건륭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에 합류한 연암 박지원이었다. 연암은 친구들에게 청나라에 대해서 이야기만 한참 듣다가 사절단 덕분에 처음으로 청에 당도했다.


등마루는 훤칠하고 대문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거리는 평평하고 곧아서 양쪽 길가로 먹줄을 친 듯 곧고 반듯하다. 담은 모두 벽돌로 쌓았다. 사람용 수레와 화물용 수레들이 섞여 길을 지난다. 벌여 놓은 그릇들은 모두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다. 그 모양새는 어디를 봐도 시골티라곤 나지 않는다. 나의 벗 홍대용에게 중국 문물의 거대한 규모와 세밀한 수법에 대해 이미 듣고 왔다. 그럼에도 중국의 동쪽 끝 촌구석도 이 정돈데 도회지는 대체 어느 정도일까 생각하니 기가 팍 죽는다.

- <낭송 열하일기>, 박지원 -


중국 국경을 건너 도착한 시골마을에서 연암은 충격을 받는다. 아무리 친구인 홍대용에게 청나라가 잘 산다는 얘기를 들었어도 실제로 보는 건 달랐나 보다. 그래도 연암은 배운 사람이라 그런지 나처럼 열등감에 몇 날며칠을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는 금세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객관화하고, 그 원인까지 간파했다.


‘이것도 남을 시기하는 마음이지. 난 본래 천성이 담박해서 남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는데……. 이제 다른 나라에 한 발을 들여놓았을 뿐, 아직 이 나라의 만 분의 일도 못 보았는데 벌써 이런 그릇된 마음이 일다니, 대체 왜? 아마도 내 견문이 좁은 탓일 게다. 만일 부처님의 밝은 눈으로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두루 살핀다면 무엇이든 다 평등해 보일 테지. 모든 게 평등하면 시기와 부러움이란 절로 없어질 테고.’

- <낭송 열하일기>, 박지원 -


연암은 남을 시기하는 마음의 원인이 견문이 좁은 탓이라고 했다. 만일 다양한 세계를 안다면 무엇이든 평등해 보여 부러움은 절로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 조선에서 살았던 이 남자에게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정말 맞는 말이다. 열등감에서 해방된 법륜스님의 질문자와 내가 그 증거다.




열등감은 나의 현실과 상관없이 왔다가 사라졌다. 이 싸움은 오직 정신의 영역에서 일어났다. 그야말로 '정신승리'다.

나는 오랫동안 '정신승리'를 현실에서 실패한 자들의 자기합리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감정과 관련된 많은 문제는 현실이 아니라 정신의 영역에서 발생된다. 아무리 현실을 붙잡고 끙끙거려도 이런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는다. 오직 '정신승리'만이 해답이다.


그렇다면 내게 있는 다른 문제들은 어떨까? 나는 인간관계와 미래에 대한 불안, 걱정, 강박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은 이 문제들이 내가 경제적으로 안정됐을 때 해결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틀렸다. 이 문제들은 대부분 정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정신은 현실과 달리 자유롭다. 즉 지금 당장이라도 접근하고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목구멍에서 용기의 온도가 느껴졌다. 열등감을 이겨냈듯, 나는 다른 감정들에게도 '정신승리'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