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도란도란 프로젝트 - 백 예순 두 번째 주제

by 도란도란프로젝트

미움이 깊어지면

그 자리에 깊은 골을 만든다.


닿지 못해 갖고 싶을 때나

발밑이 아득하도록

내가 초라해 진다거나.


밉거나 두려운 것들을

가두지 못하고 피하려 덮는다.


그래도

너를, 혹은 나를 애증의 저 끝으로

밀어버리지는 말았으면.


너에게 만큼은 내가

부정적인 모든 것을 껴안는

단 하나의 빛이었으면.


네가 몸부림치는 늪에서

나를 딛고 일어섰으면.


너만큼은,

그런 무서운 단어들로

나를 외면하지 않았으면.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우리는.



-Ram


1. 울렁거렸던 하루

엄마가 소개시켜 준 보험설계사 아줌마를 만나는 날이 되었다. 보험에 무지한 나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보험에 대해서 열심히 캐물었다. 도대체 보험은 왜 드는 것이며, 내가 들고자 하는 연금보험은 어떤 것이며, 무슨 혜택이 있는 건지, 언제부터 나는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손해를 본다면 그 손해는 무엇인지. 이렇게 캐 묻다보니, 문득, 도대체 왜 이렇게 수 백 가지, 수 천 가지가 되는 보험 종류가 생겨난 것이며, 사람들은 왜 보험사에 매달 열심히 돈을 내고 있는 것이며, 보험사는 왜 망하지 않는 것이며, (또는 왜 망하는 것이며), 보험사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며,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이 보험을 20년 만기로 들면, 나는 80세까지 살게 되면, 내가 만약 암에 걸리게 되면, 내가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등등의 갖가지 가정들이 기분나쁘게 다가왔다. 백세시대라고 외치는 세상에서 지금 나는 80세 이상 살게 되면? 매달 십 만원씩 십여년 보험료를 지급했다가 80세 넘어서 보험료를 못 받게 되면? 못 고치는 암에 걸렸는데 치료할 돈이 없다면? 자식들이 있는데 내가 죽는다면? 보험들은 내게 별별 질문들을 던졌다. 딱히 상큼한 질문들은 아닌, 퀘퀘묵은 질문들. 하지만 퀘퀘묵었다고만 치부하기엔 너무나 일반적인 불안감들이 똘똘 뭉쳐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질문들. 난, 당장 내일 걱정, 당장 한 달 뒤 걱정, 당장 일 년 뒤 걱정, 당장 지금의 걱정도 하기 벅찬데. 내가 지금 20년 뒤, 30년 뒤, 60년 뒤를 걱정하고 있는 꼴이 우스꽝스러웠다. 이런 상황들이 엄청 이질적으로 다가왔고, 내 자신이 한 층 더 초라해졌다. 뗄레야 뗄 수 없는 불안감들이 날 비웃고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2. -

접촉이 되었다, 말았다 하는 마치 고장난 충전기처럼,

왜 그 영화에서 보면, 좀비에게 물리고 난 직 후에 좀비가 되려다 말았다가 하는 것처럼,

나 자신을 찾았다가, 잃었다가.


3. 그 날의 공포

'왜 여태껏 손톱이 이렇게 자라는 걸 못 느끼고 있었나. 자르자.'

(될 수 있으면 손톱과 발톱은 샤워 후에 자르는 습관이 있다. 하지만 이땐 다급하여 집에 들어오자마자 손톱깎기를 찾아들었다.)


4. 바닥

넌 조금이라도 너의 가치관과 다른 것들이 보일 때마다 어김없이 인상을 썼고, 때론 그것들에 대해 쓴소리를 했어. 나는 그런 너를 보면서 마음이 평온하지 않았지. 난 누군가가 그렇게 진지하게 인상을 쓰는 모습을 그렇게 많이 본 적이 없었어. 나는 그런 너의 모습이 위태롭게 느껴졌고, 내 마음은 심란해져만 갔어. 너는 내게 함께 있으면 편안한 사람이 아니였어. 나는 괜히 불안할 때가 많았어. 그리고 나는 느꼈어. 나는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오히려 심란해진 내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필요한거야. 사실 난 너를 달랠 방법을 몰랐어. 더 솔직히 말하면 내 존재만으로 널 달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그것만으론 부족했어. 어쩌면 나는 너의 바닥을 너무 빨리 보았는지도 몰라. 허하게도.



-Hee


더 많은 교감이 필요했다. 더 많은 이야기와 더 많은 추억들이 필요했다. 그건 단지 우리 사이의 확인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를 더욱 풍성해지게 하는 것들을 찾아내고 함께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뿐만 아니라 세상을 함께 느끼는 것, 그렇게 우리만의 새로운 공간들을 채우고 싶었다.


그러한 것들이 결국 우리에게 자유로움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알았다.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건강한 마음이어서 감사했다.


집에서 편하게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 것은 나태이다.

내 일욕심 덕분에 언제나 시간이 부족한 한계가 있다. 내가 버는 재화가 항상 조금씩 부족한 문제도 있다. 스스로 충전할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도 부족하다.

그래도 더 많은 순간을 함께하자. 주어지는만큼만 감사히 함께하자. 작은 행복이라도 소중히 하자. 그렇게 마음먹었다.


우리 문제에 대해서는 애살맞은 사람이 되자.

이 세상에 혐오할 것은 단 한 점도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 사이를 생각하고자 하였다.



-Cheol


어제는 앞과 뒤가 어설피 다른 사람을 아프게 욕하고도 시시각각 마음을 쉽게도 뒤집는 나를 마냥 욕할 수 없던 것에는 아무런 변명도 않기로 했다. 절박하지 않은 애정이란 게 얼마나 깊어질 수 있을까 의구심을 금세 털어냈다. 어느새 피어나는 따뜻함을 조금 더 오래 붙잡으려 시리게 날 선 등을 못내 껴안는 일. 조금 더 복잡하고 뜨거운 관계가 탐나 파랗게 멍들어가는 스스로를 팽개치는 일. 차라도 한 잔 마시자는 구차한 말을 추파처럼 던지는 나는 차 한 잔보다도 초라한 사람이 되곤 했다. 그럼에도 애처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고약하게도 따뜻한 사람을 자꾸만 연기하고 싶은 내게는 고작 차 한 잔 같이 마시는 일도 기꺼운 일일 테다. 그것도 자주 없는 행복에 가까운 일.



-Ho


2017년 2월 12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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