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백 일흔 네 번째 주제
당신이 언젠가 내게 그랬었죠.
그늘이 많은 당신이
혹여 나를 물들이진 않을까,
늘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만 보아도 좋았더라고.
당신이 그늘을 드리울때
부지런히 그 향기를 맡으려
당신에게 달려가는 내가
부담스러워 두려웠다고.
그런 당신의 벽을 깨는
내가 좋았어요.
내가 당신의 그늘을 이겨내는
단 하나의 사람인 것이 좋았어요.
그리움을 닫은 당신을
나만이 아는 당신의 빛을
내가 한껏 품을 수 있는 것이
나는 그저 좋았어요.
끝없는 날들이 이어지듯
우리의 선선한 관계가
당신의 걱정을 덮고 이어지길.
그렇게 이어지길.
-Ram
1. 순간의 고충
5월, 집에 꺼두었던 보일러를 한 달 만에 다시 켰다.
우리집은 알고보니 (2월에 이사를 왔는데, 그 당시엔 추워서 햇볕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2층에다가 일단 창문은 벽 한 면의 3/5는 차지할 정도로 크게 있기에 환기는 할 수 있겠거니 하며 그냥 계약했다) 볕이 직접적으로 들지 않는 집이였다.
3월, 4월을 지나 5월이 되었는데, 빨래가 뽀송뽀송하게 마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겨울에는 보일러를 항상 켜 두어서 빨래가 어떻게 마르든 빳빳하게 마르긴 했었고, 4월이 되자 보일러를 껐지만 따땃한 날씨에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켜 그럭저럭 빨래가 말랐다. 하지만 5월이 되고 미세먼지가 거세져서 창문을 꼭꼭 닫고 있으니, 방 안에 습기가 높아지고, 빨래는 뽀송뽀송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2일 정도 지나면 원래 빨래를 개고도 남았는데, 개려고 옷들을 만져보니 차갑고 바짝 마른 것 같지 않았다. 잠시 서서 채 마르지 않은 것 같은 옷들을 만지며 고민을 했다. 하루이틀 정도는 조금 더 두면 마르지 않을까? 아니면 오늘 저녁엔 바짝 말라있진 않을까? 수건들은 다 마른 것 같은데, 왜 면으로 된 옷들은 눅눅한 느낌이 드는 걸까? 왜이리 옷들은 차가운 걸까. 이것이 정말 다 마른 것이긴 한걸까? 차가워서 내가 눅눅하게 느끼는 건 아닐까? 창문을 닫아놔서 환기가 안되서 마르지 않은 걸까? 아니야, 예전 집은 창문 닫아두어도 잘만 말랐는데. 근데 나는 왜 지금 이 빨래들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는걸까? 얘네들은 날 고민시키지 않아도 되는 애들아닌가? 안그래도 생각할 거리들이 산더미같은데, 이 면으로 된 옷 몇 개 때문에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고민해야 하나?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선 모든 것들을 내 기호대로, 내 취향대로 할 수 있었는데, 이 빨래만큼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괜히 심술이 났다. 괜히 한번 심술이 나면 다른 것도 손에 잡을 수 없는 성격이라 고민 끝에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보일러를 엄청 세게 틀었고, 제습기를 검색해서 장바구니에 넣었다. 조만간 조그만 제습기 하나가 우리집에서 제 역할을 열심히 하고 있겠지. 오랜만에 보일러를 틀어놓으니 방바닥이 따뜻해서 차가웠던 내 발이 스르륵 녹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여름엔 그래도 볕이 직접적으로 들어오지 않아 덥진 않겠다며 긍정적으로 위로를 했다. 안그래도 에어컨바람을 싫어하는데 많이 틀 일은 없겠거니 싶었다. 바람에 밀려 미세먼지가 하루빨리 사라졌으면 좋겠다. 부디.
2.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살아온 방식은 존중하겠지만, 자신의 어두운 면 등을 상대방 앞에 무기처럼 들이밀면서 의사를 관철시키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막무가내라는 말이 딱 알맞은 것이 아닐까. 그냥 웃으면서 넘기기엔 씁쓸함이 앙금처럼 남아있는 경우가 은근히 많다.
3. 어떤 이별
나는 너의 그늘을 알아버렸지만, 애써 모른척했었다. 그것이 너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고, 우리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너의 그늘은 너무 어두워서 나의 조그만 손전등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렇다고 나는 고작 손전등 하나에 의지하여 너의 그늘로 들어갈 용기도 없었다. 너의 그늘이 나를 잠식할 것만 같았다. 너의 그늘을 외면할 때마다 나는 더 외로워졌다. 우리가 서로 소통이 잘 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너에게 완전한 나의 언어로 다가와달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나의 이기심을 뾰족하게 드러내는 것만 같아서 나는 너를 빙빙 돌아갔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한 채로 등을 돌렸다.
-Hee
1.
이따금 그늘이 드리운 내 모습에 서글퍼지기도 해. 그늘은 다른이의 빛으로부터 드리워지기도 하고, 내 앞에 나타난 장애물로 드리워지기도 하고, 내 빛이 사그라들어 찾아오기도 해. 나의 어두운 면을 대면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고 혹독해. 자존감은 낮아지고 자책을 하기도 해. 그래도 우리에게 그늘이 드리워졌을 때 너무 깊이 자책하지는 말자. 살다보면 우리는 이따금 그늘이 지는 것을 피할 수 없어.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발버둥 쳐 보아도 스스로의 힘으로 피할 수 없는 그늘은 기여코 우리를 뒤덮고야 말아. 어둠이 시작되고 그 어둠은 때로는 긴 밤이 되기도 해. 모든 것이 먹먹하고 깜깜하고 막막해져버리지. 그럴 때에는 오히려 마음편하게 받아들이자. '피할 수 없는 긴 밤이 찾아왔구나' 하고 말야.
일단 그 것을 받아들이면 문제는 새로운 것으로 뒤바뀌어. 그늘이 거두어졌을 때 새롭게 드러날 내 모습은 무엇일까. 그 것이 정말로 정말로 중요한 문제야. 그늘에 잠겨 가려진 초라한 내 모습은 중요치 않아. 어차피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아. 어쩌면 모두에게 잊혀질 정도로 긴 밤이 될지도 몰라. 그런데 그늘은 결국 지나가. 새로운 빛은 꼭 찾아들어.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온다잖아. 그늘이 거두어졌을 때 나는 어떠한 모습일까. 그 것을 생각하자.
그래서 나는 달리기를 시작했어.
어두운 밤의 푸른 달빛을 바라보며 달려.
가끔은 아무 생각도 없이 달려.
밝아진 날의 나를 상상하며 달려.
'다시 밝아진 날의 나는 아마 조금 다를거야' 하고는 달려.
그렇게 우리를 포기하지 말자. 한 살이라도 더 늙기전에 달려보자. 남이 아닌 우리의 내일을 향해.
2.
너무나도 더웠어.
정말로 진짜 너무 더웠어.
그날은 그냥 모든게 너무 짜증났어.
그런데 너를 처음 본 순간,
기분좋은 그늘이 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어.
갑자기 라일락 향기가 났어.
난 순간 멍했어.
그냥 그랬어.
그래서 널 좋아하나봐.
그래서 네 곁에 아직도 머물고 있나봐.
그래서 널 아직도 머금고 있나봐.
-Cheol
마음의 온도를 낮춰 그늘을 만드는 일을 잘 하고 싶다
그늘은 꼭 다정과 닮았고
볕들지 않는 방처럼 값싸고 편안했다
다정아 나는 파일럿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아
그보다는 의자를 만드는 일이 더 좋아
마음의 밀도를 더 높이고 싶은 걸
다정의 마음은 그늘과 같은 색깔이다
또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아도 됐던 날들의 온도를 닮았고
여름 속에선 꼭 그렇지도 않았지만
나는 좀생이 같은 면이 없잖아서
그런 일들일랑 잘 잊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더 쌓이면 동거를 할까봐
옅어지는 것들 안에서도
매일 같은 마음일 수 있다면
다정의 그늘은 커다랗지만
경계가 늘 희미했던 구원이었고
나는 가끔씩 누군가의 조용한 다정이고 싶다
-Ho
2017년 5월 7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