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백 여든 일곱 번째 주제
좋다고 말하는 표현은
하나의 선을 넘는 것과 같다.
상대방의 기준을
내가 있는 곳까지 끌어당겨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도록
안아버리는 것만 같다.
그래서 조심스럽고
그토록 어려운,
좋아한다는 표현이
멋대로 낭비되어버릴 때
마음이 뭉그러진다.
나를 좋아할 때에만
좋아한다고 표현해 주었으면,
그 선을 단번에 넘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마음이 두근거려서
돌아오지 못할까봐,
걱정하면서도 숨길 수 없는 것들.
네 선을 희미하게 만들면서
나를 비추는 표현들.
그래서
선을 넘는 것은
좋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Ram
오늘은 조금 다른 길로 출근을 해보았다. 항상 같은 길만 걷기엔 재미가 없었고, 빤히 여러 갈래의 길들이 끝에서 합쳐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다른 길로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평소와는 달랐던 그 길에는 오른 쪽에 쇠창살 담이 주욱 늘어져있었는데, 그 담 위로 장미넝쿨(같다)들과 이름모를 나무 줄기들이 서로 질세라 파랗게 잎사귀를 매달고 삐죽삐죽 튀어나와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잎사귀를 뽐내는 줄기들 덕분에 자연스레 그늘이 생겨 햇빛을 피해 그늘로 걸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조명등을 켰다. 집에 있는 조명등은 잘 때만 사용하는데, 보통은 자정을 가뿐하게 넘기고 1~2시쯤 잠자리에 들 때 켠다. 하지만 오늘은 밤 11시를 조금 넘겨 이불을 덮었다. 오늘 하루의 일들 중 몇 가지를 머릿속에 상기시켜보았다. 그리고선 괜한 쓸데없는 상상을 해본다. 내가 이때 저 행동을 했으면 어땠을까. 쟤가 저런 말을 했으면 어떘을까. 상상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자연스럽게 잠에 들게 하였다. 다음날에는 알람이 울리기 10분 전에 일어났다. 일어날 때도 기분이 좋았다. 다음날 마음 편히 늦잠을 자고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평소에 잘 안하던 귀걸이를 했다. 귀걸이는 사도사도 끝이 없고, 자꾸만 자꾸만 새로운 디자인이 나와서 아마 죽을때까지 쇼핑할 수 있을 것 같은 물건이다. 그 중에서도 내가 엄청 손이 자주 가는 귀걸이가 있고, 막상 샀지만 잘 안하게 되는 귀걸이가 있다. 손이 가는 귀걸이들은 첫 번째 서랍 속에 들어있으며, 자주 안하는 귀걸이들은 두 번째 서랍에 들어있다. 머리를 말리고, 옷을 다 입고, 귀걸이를 해야 할 차례인데, 오랜만에 두 번째 서랍을 열어서 귀걸이를 골랐다. 괜히 새 귀걸이를 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 번째 서랍에는 내가 잊고 있었던 귀걸이들이 많았다.
오늘은 조용히 집에서 책을 읽고 싶었다. 보통은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는데, 그것도 대낮에 집에서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성격상 낮에 집에 있는 날이 많이 없다.) 빨래를 널고, 창문을 열어서 환기를 시키고, 밝게 형광등을 켜고, 베개를 등받이삼아 벽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는데, 좋은 향기가 날아왔다. 빨래에서 살랑살랑 섬유유연제 향과, 창문 앞에 둔 디퓨저의 향이 섞여 코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이런 낮이 오래도록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결국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꼭 하고 싶었던 낯간지러운 말이 있었는데, 뭐도 해본 사람이 잘한다고, 쉽사리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을 하려고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시뮬레이션을 했다. 걸으면서, 커피를 마시면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면서. 괜히 혼자 두근두근하며 그 말을 할 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막상 그 순간이 오자 머릿속엔 그 말이 빼곡한데, 괜히 다른 말만 하다가 이야기를 마쳤다. 오늘도 못했어!
-Hee
버스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봐. 아무리 생각을 비워도 무의식중에 나는 또 네 생각을 해.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음악 속에서 나는 네 어깨를 곱게 쥐고 있어. 너는 살포시 나의 옷깃을 쥐고 있고, 우리는 함께 리듬을 타. 윤종신의 '뷰티 인사이드'가 들려. 그리고 이어지는 노래는 노르웨이 숲의 '품에' 였으면 좋겠어.
우리는 왠지 그 선을 절대 넘지 못할것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버스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봐. 아무리 생각을 비워도 무의식중에 나는 또 네 생각을 해. 생각을 비워도 무의식중에 난 또 네 생각을 해.
-Cheol
알고 싶다고 알아지는 마음은 없었지만 노력 없이도 알 게 되는 마음은 있었다. 여실히 드러내는 선영의 속이 꼭 그랬다. 알고 싶지 않아도 쉽게 알아지는 마음. 군데군데 비어있는 내 안에 들어서려 호소하는 선영의 목소리는 애정이었고 내게는 성긴 마음을 더욱 헤집어 놓는 상처였다. 왠지 자주 스치는 손등의 감각이 성급하게 결말부터 읽어버린 소설 같고 무의미한 이야기들로 끊어지지 않는 문자 보관함이 당차고 솔직한 선영에게 애정과 상처가 꼭 닮았다 말할 수 없던 나처럼 옹졸했다. 선영은 이기적인 여자고 나는 겁쟁이다. 술을 마신 탓이라고 웃어넘겼지만 나는 늘 두려웠다. 선을 넘은 관계란 언제든 단박에 끊어져 사라질 수 있으니까.
-Ho
2017년 8월 6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