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이백 여든 여섯 번째 주제
당신이 늘 나를
기다렸다는 말에
심장이 고장나 버리는 줄
알았어.
미루고 미뤘던 감정들이
억울하기라도 했던걸까,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감정에 잠겨서
내가 당신을 보는 것인지
그대가 나를 보는 것인지도
알 필요가 없어져버렸어.
그리고
나는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을
욕심내기 시작했어.
나만의 웃음이길,
나에게만 닿는 눈빛이길,
나만을 채워주는 사람이길.
이런 감정이
끊기지 않고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욕심냈어.
부족하면 결핍이고
넘치면 과잉인
그런 것.
두렵지만
사라지면 안 될 것만 같은
그런 사람,
감정.
-Ram
1.
예전에 아이허브에서 비타민과 실리마린을 산 적이 있다.
나도 이제 이런 보충제를 먹으며 건강을 관리해보자, 라는 생각에.
그런데 웬걸. (사실 너무 건강해서 그런지 몰라도)
2~3개월을 꾸준히 먹어봤는데도 별 다른 효과를 느끼지 못하겠더라.
그래서 약따위 그냥 때려쳤다.
아침에 집에서 나설때의 상쾌한 아침공기, 그리고 귀에서 흘러나오는 (내 흥을 돋우는)신나는 음악,
애매한 공복에 마시는 커피, 생각지도 못하게 정말 황홀한 맛인 빈브라더스의 이달의 원두,
(킁킁거리며 책에 코를 박고 맡는) 새 책 냄새, 응원의 말과 애정어린 눈길들, 귀여운 관심과 약이되는 모르는척, 큰 숙제를 해결한 후 뒤에 허무함과 함께오는 여유로움, 섬유유연제 향기, 동이 트기 전 잠시 기상,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백예린의 square,
그리고 떠올려보면 비타민이 되어주는 순간들이 아직 내 곁에 있기에!
2.
내가 누군가의 비타민이라는 말은
사랑방캔디 통안에 있는 레몬맛 캔디를 먹은것과 같은
기분으로,
꽤나 상큼하다.
-Hee
감성이 가득한 소재는 더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기쁨도 아픔도 그리움도 미련도 점점 아스라이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인상깊었던 감상들도 우리가 멀어진 시간에 반비례하여 작아져만 갔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비가 온 탓일까 먼지없이 맑은 공기가 거실과 방을 환기시켰다. 창 밖으로는 저 멀리 롯데타워가 보였다. 커튼과 조명을 바꾸었다. 방안의 책상과 침대의 배치도 바꿔보았다. 바뀐 조명과 배치를 볼때마다 새로운 기분이 든다. 위로가 되었다.
얼마전에는 바이러스성 장염으로 고열이 났다. 응급실을 다녀왔다. 아니 실려갔다. 열이 39도가 넘었다고 한다. 열이 37도 정도 내려가니 귀가해도 좋다고 한다. 의사분은 음식을 꼭꼭 그리고 천천히 먹으라고 조언해주셨다. 면역력이 낮아진 것 같으니 영양소를 풍부히 섭취하라고 귀뜸해주셨다. 종합비타민제를 주문했다. 모든 과정이 참 간편했다. 이렇게 단순하지 못한 내 마음에 자조섞인 웃음이 났다.
얼마전 연봉도 올랐다. 첫째 안을 성사시키고 싶어 둘째 안은 억지스러운 연봉을 적어냈는데 둘째 안으로 협상이 되었다. 얼떨떨했지만 좋은 일이다. 회사에 쌓아왔던 불만들이 되려 민망해졌다. 연봉이 오르니 밥값을 해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더 건강히 치고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메가3와 밀크시슬(간에 좋다고 한다)을 추가로 주문했다.
여전히 감성이 가득한 소재는 떠오르지 않았다. 순수했던 마음도 애써 욕심냈던 바램들도 점점 아스라이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잊지못할것만 같던 순간들도 우리가 멀어진 시간에 비례하여 희미해졌다.
이번만큼은 흐려지는 기억들을 글로 토해내지 않았다. 때로는 아스라이 흐트러지는 기억들을 떠내려 보낼줄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재가 떠오르지 않았다. 내 마음만 빼고 모든 과정이 간편했다. 단순하지 못한 내 마음에 자조섞인 웃음이 났다.
-Cheol
모처럼 퇴근이 빨랐던 금요일 저녁 서울 가는 기차표를 끊어두었는데 마침 부산에 도착한다는 도경의 연락에 꽤 긴 시간 고민했습니다. 하긴 비가 와서 눅눅하기만 할 텐데 별다른 목적도, 마땅히 잘 곳도 없이 무작정 서울로 간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어 수수료를 내고 기차표를 취소했습니다. 도경은 일 년에 두세번은 만나는 친구이자 형입니다. 오랜만에 봐도 편하고 어린 때로 돌아간 듯 철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이지요. 그러고 보면 서울로 얼른 놀러 오라고 부추기는 친구들은 많지만 정작 도경처럼 부산까지 저를 보러 오는 친구는 없었군요.
그렇지만 반 년 간의 이야기로만 시간을 다 채운다는 것은 조금 무리한 일이기도 합니다. 전에도 물어봤던 애인, 결혼 이야기, 직장, 사는 이야기들이 모두 끝나고 나면 전에도 갔었던 코인 노래방, 당구장, 국밥집. 아무리 잘 아는 사이라지만, 아니 그런 사이인데도 반 년 만에 만나서 했던 일이란 게 고작 그런 일들이라니, 급작스럽게 만난 것이라곤 해도 뜨는 해를 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조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도경이 아니라도 비슷했을 겁니다. 사는 이야기는 다들 같잖아요. 비밀 이야기랍시고 조심스럽게 꺼내는 말들은 역시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어떤 나약함과 당면했던 한계에 관한 이야기더군요. 가만히 들어주는 위로가 필요한 일들. 사실 남의 나약함을 들어주기만 하는 것이 상대에겐 또 하나의 부담이 될까 봐 저도 최근에 겪은 나약한 면면을 늘어놓으며 공유했더랬죠. 우습지요. 다 자란 성인 남자가 만나 나약함을 공유한다는 일이. 하지만 이런 일도 위로라면 위로가 되더군요. 과하지 않게 적당히. 가끔씩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다음에는 제가 말도 없이 인제로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날 좋은 가을쯤이 적당하겠군요.
-Ho
2019년 6월 30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