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이백 여든 일곱 번째 주제
01.
없어도 잘만 살 줄 알았어.
당장 사라져도
별반 다를 일 없는 삶.
그게 당신인 줄 알았지.
정말 잘 지내는 것 같더라.
02.
내가 내어준 곁은
그렇게 자그마한 자리였을 것이다.
있어도 그리웠고
없으면 허전했다.
그렇다고 해서
달려나가 안길만큼
부족하진 않았던
작은 자리 정도.
03.
우리는 또 조잘거릴 핑곗거리를 만들어내고
채워지지 않을
그리움들을
애써 그 밤에 욱여넣으며
곱씹고 또 곱씹었다.
우리는
그러면 안 되었었다.
-Ram
내 빈자리가 허전하다고 하는 말이 은근 좋다.
내 흔적이 남아있고, 그 흔적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좋다.
나 때문에 허전함을 느끼는 것도 좋고,
내 허전함이 외롭게 하는 것도 좋다.
이게 내 욕심 중 하나다.
-Hee
참 애매한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가득 채우고자 아둥바둥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허전함, 그 자체로
미(美)가 존재한다는걸 왜 몰랐을까 싶었다.
한구석만큼은 항상 비워두고자 애썼다.
꽤 오래 비워져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먼지가 앉지 않게
드문드문 가꾸는것도 나쁘지 않았다.
언제든 네가 와서 쉬어갈 수 있도록,
그뿐이었다.
-Cheol
궁금한 게 있는데 누나, 다 자란 성인이 되어 만난 사람과도 친남매처럼 지내는 일이 가능한 일일까? 있잖아 나는 당연히 가능하다고 생각했었어. 아무 이유도 없이 나를 챙기고 보살피는 누나가 내게는 꼭 친누나 같았으니까. 그래서 언젠가부터 거짓말처럼 연락을 안 하기 시작했을 땐 좀 분한 느낌이 들더라. 연인이 생긴다면 다른 이성과는 연락하지 않는 게 맞다는 말을 들었을 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이성에 나까지도 포함된다는 게 그땐 좀 억울하고, 그랬었어. 누나로부터 떨어져 나와 다시 또 어디로든 표류하게 될 내 모습이 무서웠고 말이야.
작년에 누나가 인천으로 이사 간다며 오랜만에 연락해 밥을 사줬을 때, 나는 왠지 기쁘고도 슬펐어. 왠지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었거든. 아니나 다를까 그 사이에 누나는 애인과 결혼도 했고 우리는 서로 더 먼 곳으로 이사를 가버렸네. 왠지 나는 누나에게 마지막까지 받기만 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아 어제는 생일을 빌미로 케이크를 보냈어. 그러고 나서도 조금은 미안하더라. 그간 받은 게 대체 얼마인데 해줄 수 있는 게 고작 그깟 케이크 하나뿐이라니. 정말로 친남매였다면, 결국 남남인 사이가 아니었다면 받은 만큼은 더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래도 잠깐이나마 대화하며 좀 안심이 됐다고 해야 할까. 누나는 곧 무너질 것 같았던 사람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만큼이나 행복해 보이잖아. 나는 이제 누나 말에 완벽히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아. 간간이 안부를 물어보는 거리가 되었지만 서로가 더 행복할 수 있다면 그 외의 일 같은 것은 어떻든 괜찮지 않나 싶어져서. 아쉽지만 아쉽지 않고 허전하지만 정말로 기쁘잖아. 행복하고 좋잖아.
-Ho
2019년 7월 7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