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도란도란 프로젝트 - 이백 여든 여덟 번째 주제

by 도란도란프로젝트

어떤 마음이었을까

당신은.


내가 달려가 안겨버릴 때에,

당신과 밤새 휴대폰을 붙잡고

이야기할 때에,

말없이 묵묵히 기다릴 때에,


나는 수없이 많은 생각이 든다.


가장 좋지 않은 결과를 걱정하면서도

이미 당신이 자꾸만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서

내 감정이 끝없이 요동치고야 만다.


내가 들어갈 수는 없는 자리에

당신은 자꾸만 나를 부르면


나는 못이기는척,


아니 이기지도 못할

감정들을 끌어안고,


그렇게 또 같은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다는 걸


알까.

당신은.



-Ram


1.

사실 넌 모르겠지만,

네 자리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20대의 대부분을 너와 함께 했으니, 쉽게 지워질 수는 없겠지.

언젠가 너의 소식을 우연히 접했었고,

우린 그렇게 더이상 잘 될 수 없음을 알았을 때,

미련하게나마 그때 느꼈지.

그래, 우리는 원래 그랬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고.

너는 나보다 더 좋은, 착하다고 하면 착하고, 좋다고 하면 좋은,

그런 사람을 만났어야 했다고.

부디 지금 너의 곁에 있는 사람이 나보다 훨씬 나은 그런 사람이였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진심으로 빌었지.

내가 널 많이 힘들어 했고, 나 때문에 더 이상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뭐 지금은 나같은 사람은 너의 마음 어디에도 없을지 모르겠지만,

네가 원하는 사람이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다고 단지 철이 든 건 아냐.

철이 든 척 하는거지.

엄청나게 쿨한 것도 아니고, 괜찮은 것도 아냐.

그냥 단지 괜찮아야지.

그래야지.


2.

그 무리에서 나는 한 자리도 안됐다고 생각했다.

나와 성격이 맞지도 않을 뿐더러,

굳이 맞지 않은 무리에 부러 껴서 잘 지낼 생각도 없었다.

그냥, 적당히 지내다 어차피 헤어질 무리이므로.

성격상 두 자리는 아니더라도, 한 자리는 해야 하는 성격이라서,

그것도 안되면 그냥 아예 안하는 것이 더 괜찮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적당히 자리만 차지하다가 나왔다.

물론 나올 때의 기분은 더러웠다.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이도저도 아닌 것에 대해 매우 못 참겠어서, 그냥 아무것도 아닌 냥 취급했다.

어차피 난 거기 아니여도 갈 자리가 많다고 생각했기에.


3.

네 옆에 내 자리는 남겨둬.

내가 언제든지 갈 수 있게.
너무 욕심인건 알아.



-Hee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이직을 하고나서 점점 느끼게 되는 이야기였다. 언제나 제한적인 역할만 주어지고 꾸준히 견제받았던 이전 직장의 나. 그곳에 계속 머물렀다면 과연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을까? 이직 후, 현재 팀을 위한 역할을 수행해나가면서 나는 내가 바랬던 내 모습에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리를 옮기지 않고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을까? 핵심 프로젝트들을 연달아 맡게 되었으면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의문들은 깊게 고민해보지 않아도 그럴 수 없음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주인의식으로 가득찬 팀원들과의 마찰은 그 곳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니까. 그 곳은 그런 마찰을 제법 불편해하는 곳이었으니까.


참 운도 좋았고 시기도 적절했던 것 같다.


내가 애써 해야 할 일. 누군가의 이야기를 더욱 차근히 귀담아 들어주는 것. 각자의 견해에서 함께 존재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는 것. 혹은 각자의 견해가 공존할 수 없는 트레이드 오프를 찾아내고 선택을 제안하는 것. 무수히 많은 요구사항들을 분류하고 정리하고 원만히 처리되도록 유도하는 것.


여전히 모든 것에 부족한 점은 많다. 그럼에도 싹틔우고자 애써왔던 커리어의 줄기로부터 바야흐로 첫 꽃이 피어나는 때.


미래의 나는 어떤 꽃들을 더 피우게 될까? 미래의 나는 어떤 열매들을 맺게 될까? 검은 머리칼 휘날리며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아 잎을 틔우자. 부단히 애써 줄기를 뻗어보자.


5년 전, 어느 절에서 보았던 글귀가 자꾸만 생각난다.


"너의 과거를 알고 싶거든
지금 네가 받고 있는 것을 보고
너의 미래를 알고 싶거든
네가 지금하고 있는것을 보아라"
- 해동 용궁사



-Cheol


1.

오후 네 시, 엄마와 같이 점심을 먹기로 한 시간이 한참 지날 때까지 자고 일어났다. 아침엔 비가 내리더니 요 며칠과 마찬가지로 해가 뜬 맑은 하늘이 되어 있었다. 널브러진 옷가지를 조금 정리한 뒤 씻지도 않은 머리에 모자를 눌러 쓰고 허겁지겁 집을 나섰다. 다행히 오전의 볼 일이 늦어져 엄마와 아빠도 늦은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당에 숯불을 피운 뒤 상추와 치커리를 따서 씻고 상을 차려 잔뜩 밥을 먹었고 무화과를 먹으며 tv를 보고 나른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한참을 자고 일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졸려 다시 잠을 자고 일어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늦게 일어난 탓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치게 빠르게 흘러 있었고 마음은 어느 때보다 안정되어 있다는 게 느껴졌다. 아무도 아무것도 그립지 않은 주말. 겉치레도 너스레도 없는 단정한 여유.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을 보내고 나서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얼마나 달려왔든, 얼마나 자랐든 늘 나의 자리는 이곳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주 조금, 부산에 돌아온 것에 대한 후회와 불안감을 조금 덜어냈다.


2.

언제 어느 때라도 마음 편히 갈 수 있는 곳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두려고 했다. 지금 있는 곳을 잠시 떠나있고 싶을 때, 혹은 도망쳐 나올 때 고민 없이 찾아갈 수 있는 장소. 불안과 두려움이 침범할 수 없는 곳. 부모님이 계신 곳, 잠깐씩 살아왔던 도시에 몇 군데, 캠핑을 하며 찾은 장소가 또 몇 곳, 나를 위한 빈자리가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꽤 든든해진다.



-Ho


2019년 7월 14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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