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도란도란 프로젝트 - 마흔여섯 번째 주제

by 도란도란프로젝트

(1)


만약이라는 두 글자가
오늘 내 맘을 무너뜨렸어
어쩜 우린 웃으며 다시 만날 수 있어
그렇지 않니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우습지만 예전엔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도 많이 하게 되


넌 날 앞게 하는 사람이 아냐
수없이 많은 나날들 속을
반짝이고 있어 항상 고마웠어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얘기겠지만
그렇지만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때가 있어


너 같은 사람은 너 너밖에 없었어
마음 둘 곳이라곤 없는 이세상 속에


-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을 때가 있어, 가을방학



(2)


만약이라는 단어만큼 설레임과 공허함을 동시에 주는 단어도 없다
봄날의 꿈처럼 달콤한 상상을 전제로 할 때도 있고
가끔 받아들이기 무서운 결과를 전제로 할 때도 있다.


내가 만약 당신의 곁에 계속 있었더라면
내가 만약 머리칼을 일렁이는 가을 바람을
당신 품에서 두뺨을 부비며 맞이 해 볼 수 있었더라면


만약에 내가.
만약에 네가.


-Ram


내가 그였다면,
추운 겨울 밤, 함께 택시를 타고 가자고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 할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가까이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굳이 챙기지 않아도 되었던 날을
챙길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누가 들어도 시덥지 않은 소리를 하고있는 상대방을
집중할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차이를 맞닥뜨렸을 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상대방이 떡볶이를 먹다가 실수로 입 안에서 떡볶이의 잔재가 수직으로 식탁 위에 떨어졌을때
정색하지 않고, 또는 모른 척 하지 않고, 그냥 낄낄대며 웃을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정말 그냥 자신만을 생각해서 뒤돌아보지 않고 가고 싶었을 때
가지 않고 한번 더, 다시 한번 더 볼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다른일로 짜증내는 상대방의 푸념 아닌 푸념을
들어주고, 다독여주고, 기분을 맞춰주려 노력할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추운 겨울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을
모두 쥐어잡아 줄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흔하디 흔한 상황 속에 휘둘리지 않고
오로지 상대방을 믿어줄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그냥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고, 좋은 것만 먹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낯설어 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며
상대방을 높일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아무리 좋아하는 사이라고 해도 상대방이 그렇게 큰 믿음을 아직 주지 못한 상태에서
마음 속에 있던 말들을 할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충분히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지 않고
배려할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굳이 챙기지 않아도 될,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주변 사람을 위해
커피 한 잔 사주자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냉장고에서 갓 꺼내 먹는 물을 좋아하지 않는 상대방을 위해
물 한 통 더 사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주말을 포함해 일주일이 지나도록 야근+야근을 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자정 24시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컴컴한 밤에 운전을 할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굳이 포장을 안해도 되는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만원을 주며 선물포장을
아낌없이 할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쇼핑할 때 굉장히 깐깐하고 까탈스러운 상대방과 함께
몇 시간 동안 백화점을 뱅뱅 돌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3일 내내 과음을 하고 집에서 편하게 발뻗고 자지 못해 굉장히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빙 돌아서 가는 지하철에 올라탈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괜한 투정아닌 투정부리는 상대방의 투정을
웃으며 받아줄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전반적인 생활에서 필요한 무언가를 구매할 때
항상 상대방을 고려할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한 시간은 더 자도 되는 이른 새벽에
함께 나올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상대방 옆에서
언제나 우직하고 듬직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까.


내가 그였다면,
상대방을 정말 아껴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지난 시간들을 저벅저벅 밟아올 수 있었을까.


-Hee


너는 언제나 그랬듯이 뾰루퉁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너에게 안절부절 못했고 좋은 말들만, 좋은 행동들만 조심스레 건넸다. 그렇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너는 나에게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고 나의 이야기들을 모두 들어주었다.


“미안해. 더 이상 변명 같은 건 안할게. 다만 나는 아직도 너를 소중히 생각해. 그리고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진심이야”


그리고 나는 몇마디를 조심스레 더 건네어본다. 몇마디를 더 건네는 사이 나의 마음속에 있는 사람들은 차차 퇴장했고 나의 방에는 이제 그 사람과 나만이 남게 되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나는 조심스레 고개숙인 당신에게 손을 내밀어 보았다.


“괜.. 찮아?”


갑자기 그녀가 흐느낀다. 갑작스런 울음에 나도 놀라며 이걸 어떻게 달래야 하나 안절부절 못한다. 그녀의 점퍼 색이 보인다. 파란색 점퍼를 입고 있다. 그녀가 내 어깨에 기대고 한동안을 흐느낀다. 그녀가 흐느끼는 동안 나는 사과를(이미 수도 없이 많이 해서 의미가 없어진) 건넨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괜찮아, 울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곁에 있을게”


곧이어 잠이 깬다. 그 사람 곁에 더 머물고 싶어 발버둥 쳐 보지만, 이미 꿈이란 걸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현실로 빨려 들어온다. 잠은 깼지만 방향감각이 돌아오는 내내 그대로 누운 채 생각해 본다.


내가 그 사람과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떠할까?


하지만 이내 이 생각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의미 없는 생각이란 것을 깨닫고는 한쪽으로 치워둔다. 그리고 곧이어 날아가버릴 그 꿈을 잊지 않기 위해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쓴다.


또다시 그 사람을 꿈에서 만나버리고 말았다.


내가 그 사람과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지금쯤 어떠할까?


하지만 이내 곧 다시 그 생각을 치워둔다. 꿈속에서라면 몰라도 현실에서의 나는 더 이상 그러지 않기로 다짐했으니까. 그 사람을 다시금 만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사람을 다시 만나는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내가 한걸음이라도 나아가는 이 길에 언젠가 그 사람을 만나든지 혹은 다른 인연을 만나든지 누굴 위해서든 나는 나를 꾹꾹 채워나가야 할 뿐이다.


미래의 내 사람에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진중하고 단단한 나를 세울 뿐이다.


그저 오늘은 이번 주의 주제를 ‘만약’으로 정해볼 뿐이다.


-Cheol


코펜하겐으로 떠난 여자

코펜하겐의 어느 늦은 겨울밤. 추위와 고독으로 가득찬 거리에는 오직 가로등만이 길거리를 밝힐 뿐, 정적마저 삼킬 것 같은 고요가 흐른다. 유럽의 어느 길 모퉁이를 돌아서면 있을 것 같은 아주 평범하고 조용하고 작은 어느 바에서 한 여자가 앉아있다. 그녀는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다. 밖은 춥고 그녀의 몸은 낯선 곳에 대한 긴장감으로 살짝 떨고 있었다. 그녀는 밖을 주시하다가 시계를 보면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를 확인한다. 내일이면 돌아가야 한다. 내일 비행기를 타고 그녀는 서울로 갈 것이다. 아이가 있지는 않지만 그녀는 동거하는 남자친구와 행복했고 열심히 모은 돈도 조금 있다. 북유럽을 여행하게 된 이유는 그냥 이곳이라면 뭔가를 새로 시작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꿈꾸던 여행이었다.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그런 것. 일탈. 꿈같은 것.


남자와의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는 근면했고 정직하고 믿음직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남자를 사랑했지만 그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느꼈던 것이다. 직장생활이 3년차로 접어들 때 쯤 그녀는 모든 것에 지쳐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열심히 일해 왔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열심히 일했다. 열심히 일을 하면 뭔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의 삶이 아니 자기 자신이 나아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며 지난 3년간 그녀는 무리하게 자신을 채찍질했다. 하지만 그녀가 된 것은 Burnout 이라는 단어 그 자체였다.


코펜하겐에 처음 왔을 때, 그녀는 30대 이후로는 처음으로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여기까지 와서 한 일이라고는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카페에서는 창가자리를 앉았고 2시간 동안 가만히 턱을 괴고 창밖을 우두커니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라든지 여행책자에서 소개하는 맛집이나 주요 관광 스팟을 정처 없이 거니는 것들이라든지, 금요일 밤에 한국에서는 나이를 이유로 들어가지 않았던 클럽에 들어가 남자들의 시선을 온전히 느끼며 미친 듯이 춤을 추기도 했고, 진탕 취해 호텔방에 들어와 속옷을 그대로 벗어던진 채 알몸으로 침대에 들어가 잠에 들기도 했다. 가장 이상했던 경험 중에 하나는 주말 아침에 일어나 노릇하게 구운 크로와상에 필라델피아를 발라 먹었을 때의 느낌이었다. 눈이 자연스럽게 떠지는 것도 신기했지만 주말 아침에 맡는 빵 냄새와 혀에서 느껴지는 달달하고 부드러운 질감은 행복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잊었던 것 중 하나, 주말 아침은 달구나. 라는 것.


단 1분이라도 늦으면 게으름이라는 죄목으로 온갖 욕을 먹어야했던 지난 일들이 스쳐갔고 여자는 급하게 머리를 뒤 흔들며 그 기억을 털어버렸다. 기억이란 질기고 피곤한 것이다. 더욱이 나쁜 기억들은 목숨이 길다.

매일매일 죽고 싶었던 그녀가 일상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남자의 사랑 때문이었다. 남자는 그녀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삶의 안식처였다. 그를 신뢰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관계가 길어질수록 그녀는 남자에게 자신을 의지하는 스스로의 모습에게 부담감을 느꼈다. 남자는 묵묵히 그것을 다 받아줬지만 더 이상 그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낯선 도시를 거닐며 낯선 것들을 사진기에 담았고, 낯선 것들을 먹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녀는 그녀자신이 낯선 곳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것을 꽤나 잘하고 또한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던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고, 동시에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무척이나 그녀를 가볍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 사람들은 결코 날 기억하지 않아.” 그녀는 나즈막히 말했다.


그녀는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시선들에게서 해방되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그녀 자신이 그런 시선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것 말이다. 결혼 못한 노처녀, 능력자라 수입이 많은 것도 아니고, 집안에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좋은 스폰서나 든든한 빽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자친구와 함께 사는 동거녀, 얼마 전 회사를 나온 백조…… 하지만 이곳은 아니다. 나는 철저한 이방인이자 무엇이든 해도 좋은 사람이었다. 새 출발을 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라는 느낌. 이곳에서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무능함이 아니라 곧 자유로움이다.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몇 일간의 휴식을 취하고 난 뒤에 그녀는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마땅히 방법 같은 것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일단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바 안에 많은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카운터에 자리를 잡은 그녀 옆에 한 남자가 앉았다. 그리고 그 남자는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여자는 직감적으로 이 남자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2편은 다음주에)



-Bor


2014년 11월 23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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