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오백 열 일곱 번째 주제
그렇게 대단한 상태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무엇을 해도
즐겁지가 않았다.
사소한 뿌듯함도, 성취감도 없이
기계처럼 반복하는 일들에
드디어 넌덜머리가 난 것 같다.
본래 나는
진득하게 뭘 붙잡고 좋아할 줄
몰라서
흔한 덕질도, 팬심도,
취미도 없는 보통의 사람.
사람도, 일도 꾸준히 설레본 적이 없다.
일은 오죽했을까,
손에 잡히면 빠져나가는
기똥찬 일들이 얄밉기만 했던 때는
엊그제같다.
지금은 그저
잡기에도, 흘러보내기에도
아무런 욕심도 생각도 없다.
그저 나는 돌멩이같은 존재로
그렇게 낙인되어
까맣게 타들어가고만 싶다.
나는 사실 보잘 것 없는 속내를 감추려고
잔뜩 부풀린 포장지를 덮은 사람일 뿐인걸,
그걸 곧장 들킬 것만 같아서
위가 쓰려오곤한다.
온통 그런 날들 뿐이다.
-Ram
내 최약점 중 하나는 예민함이다. 평소에는 전혀 예민하지 않다가 단기간에 굉장한 정신력과 집중력을 끌어 쓰다 보면 신경이 곤두서버려 쉽게 예민해진다. 내가 하는 것들에 대해 내가 평가를 내리고,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에 대해 또 생각하고 생각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고슴도치가 되어있다. 나조차 내 날에 베어버릴 것 같아 몸서리친다. 날카로움에 혀를 내두른다. 나의 그런 부분을 싫어하는 내 자아가 꿈틀대며 극도의 피로감을 가져와준다. 마치 그만하라는 듯이. 그렇게 피로감을 느끼며 심신이 지쳐버리자 이젠 내가 내보였던 예민함을 정면으로 자각하게 된다. 때론 일말의 후회도 뒤따른다. 언제쯤 이런 프로세스가 무던해질까.
흥미로운 건 내가 예민함에 가득 차 있을 때 옆에 있는 사람의 반응. 어떤 사람은 나의 예민함의 정도와 맞설 수 있는 정도의 예민함으로 날 공격했고, 어떤 사람은 그러거나 말거나 외면했다. 또 어떤 사람은 스스로 화가 올라오는데 그걸 주체하려고 노력하지만 삐질삐질 화가 새어 나왔고, 또 어떤 사람은 대놓고 나를 어린아이처럼 생각하며 타일렀다. 물론 다 내 마음에 들진 않았다. 그런데 또 다른 유형이 나타났다. 날 공격하거나 외면하지도 않고, 내가 하는 말의 (뉘앙스가 아닌) 의도를 잘 파악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대해줬다. 잉? 보통은 이렇지 않은데? 화가 나거나 무시하거나 아무튼 내 기분을 더 건드릴 텐데? 그의 침착함과 평정심에 세상모르게 날카로웠던 내 예민함이 부끄러운 듯 바로 꼬리를 내렸다.
-Hee
1.
일보다 중요한 것이 없는 삶에는 반드시 무기력이 찾아온다.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서 며칠 손에서 일을 놓아버렸다. 오래도록 해온 일인데도 내가 할 일이 아닌 것만 같았다. 다시 이직을 준비해야 하나 싶어 취업 정보 사이트를 열심히 훑었다. 이왕이면 아무 이유 없이도 한 1년 정도는 안식년을 갖기 위해 휴직을 할 수도 있는 대기업이 좋겠다 싶었는데, 그런 삶이 내게는 참 요원한 것 같아 상실감이 더해지기 전에 멈췄다. 우습게도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내려둔 것들 때문인지, 아니면 잠시 현실에서 거리를 두었기 때문인지 , 기력을 아주 조금 되찾고 있다. 굉장히 불쾌한 느낌이다.
2.
그게 꼭 일이 아닐지라도 지나치게 몰두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무기력은 찾아온다. 거의 매 주말 캠핑, 하이킹을 하며 바깥(에서 잠을 자는) 생활을 했더니 몸도 마음도 꽤나 지쳤던 것 같다. 좋아하는 것들을 마냥 힘껏 좋아해버리는 것도 문제가 되는 일일까. 잘 이해는 안 되지만 체감하고 나니까 역시나 조금은 거리를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감의 조절이 어렵다. 사실 가고 싶을 때 가고, 가기 싫을 때는 안 가면 되는 간단한 일인데, 한 달도 더 전부터 캠핑장을 예약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일정을 협의해서 미리 정해둬야 한다는 점이 그 간단한 일을 어렵게 만든다. 심플하게 살고 싶은데 그게 참 말처럼 쉽지가 않다.
-Ho
신경을 많이 쓰는 날은 두통이 왔다.
나를 몰아세우고, 결과만을 위해 달리다보면 몸과 마음이 지치는건 당연했다.
실패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얼마나 힘을 주고 지냈는지, 긴장 후에는 번아웃이 왔다.
스위치를 끄고 완벽히 하는 휴식이 필요함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해야 충전되는지도 이제서야 터득했다.
다른 사람의 페이스에 맞출 필요도 없고, 나는 나대로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을 다 하면된다.
이제는 어떤 것도 실패가 없음을 안다.
어떤 길로 가도, 어떤 선택을 해도 그건 다 나를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저 나에게 주어진 것을 성실히 할수 있을 만큼만 해도 된다.
나를 소진시키는게 아니라 나를 채워주는 삶을 살고 싶다.
-인이
2023년 12월 3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