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오백 마흔 여덟 번째 주제
작년 3월,
마음이 온통 밍숭맹숭할 때
훌쩍 제주도로 도망쳤었다.
그냥 갑작스럽게,
그리고 잊고 싶은게 생겨서.
내가 쥐고 있던 일말의 희망 같은 걸
빨리 놓고 싶어서.
그렇게 제주를 밟노라
친구에게 이야기 했다.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오라며
나를 띄워준 친구에게
여행의 마지막 날
엽서를 보냈다.
제주의 어느 작은 우체국에 들러서
그날 산 제주엽서에
빼곡히 연필로 적어낸 글.
혹여 잉크가 번질까
새카만 연필로 눌러쓴 맘을 알까.
그 얇은 종이에
나의 얄팍한 다짐을 적어놓은 것을 너는 알까.
그 작은 한 칸짜리 종이에
너에게 고마운 마음과,
아른거리던 그리움을 묻혀 보낸 것을 알까.
네게 말하고 싶어
온 손가락이 옴싹거렸던 것을
너는 알까.
내 엽서가 오길 기다리던 너와
무사히 네게 가길 바라던 내가
온통 즐거운 주말을 보내게 되리라
그땐 몰랐지.
나는 그때 우체국에서 나던
냄새,
그때의 빛,
그 곳의 느낌,
그런 것들이 선명하다.
나의 인생이 조금
방향을 틀어가던 그 순간이
소중해서.
-Ram
1.
엄마와 아빠는 성격이 서로 많이 다르다고 느끼는데, 그래도 서로 사랑하나 봐. 엄마는 맨날 해외여행을 가면 집에 혼자 있는 아빠를 생각해서 그 나라에서 흔히 파는 관광 엽서를 산 후 편지를 써서 굳이 우체국을 찾아 간 다음 아빠한테 부치고, 아빠는 맨날 투털대면서 엄마를 아침에 직장에 데려다주러 주말에도 새벽 6시에 꾸역꾸역 몸을 일으킨다. 근데 있잖아. 서로 사랑하면 더 다정하게 대해줄 순 없는 거야? 굳이 틱틱거리고, 서로의 안좋은 점을 콕 집어 말해야만 하는 거야? 배려는 어디 간 걸까. 근데 또 생각해 보면, 30년을 넘게 같이 산 엄마아빠도 저러는데 친구나 연인 사이에 일어나는 것들은 당연한 건가? 아니, 근데 서로에 대한 배려가 있다면 조금은 덜 하지 않을까 싶은데. 배려는 남과 남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진다. 사실 그건 배려가 아니라 가식에 더 가까운 것 같은데.
2.
꼭 좋지 않은 꿈은 들어맞아. 빌어먹을 꿈. 앞으론 꿈에서라면 더더욱 꿈틀댈 꺼야. 빌어먹을 꿈.
-Hee
부상으로 달리지 못할 때는 달리기 용품을 사며 뛰쳐나가 달리고 싶은 마음을 달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몰라서 우스운 소리라고 치부했는데 요즘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여실히 깨닫고 있다. 장경인대염과 후경골건염이 동시에 찾아왔다. 목표했던 대회에서 몸을 혹사시킨 직후도 아니고 보름 정도나 더 지난 뒤에야 갑작스레 찾아온 부상. 평소에 등한시하던 보강운동이나 스트레칭 습관을 익힐 럭키비키한 상황이라 생각하려고 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초조해지기만 했다.
괜히 뛰었다가 부상 기간이 더 길어질까 봐 애써 참았지만 마음은 꾸준히 울적해졌다. 그 사이에 신발, 의류, 장비 따위를 잔뜩 사버렸다. 한 달에 2-300km는 뛰니까 신발을 못해도 두세 달에 한 번은 바꿔줘야 한다거나, 어떤 신발이 저렴한 금액에 나왔으니 무조건 구매부터 하고 봐야 한다거나, 포디움에 많이 올라가는 나이키나 아식스의 대단한 신발은 요즘 제값 주고는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거나 하는 이유들이 매번 있었지만 사실 좀 과하다 싶을 만큼 질러대긴 했다.
당장은 신고 나가지도 못할 것들인데도 방 한구석에 잔뜩 쌓이니 마음이 어째선지 든든해진다. 돈이야 많이 썼지만 이 신발들도 결국 다 닳아서 못 쓰게 될 때까지 신게 될 테니 무의미한 소비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요즘 내 유일한 낙은 우체국에 들러 주문한 물건을 찾아오는 일이다. 우리 동네 우체부 아저씨의 배송 순서에 우리 집이 하루의 마지막쯤에 놓여있어서 그걸 못 기다리고 퇴근길에 직접 들려 찾아오는 것이다. 새 신발을 신고 달릴 생각을 하면 울적한 마음이 놀랍게도 쉽게 다그쳐진다.
-Ho
우편관련 시리즈 물로 “유나바머: 그가 입을 열다" 를 추천 합니다.
-인이
2024년 7월 7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