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금과 명상
테라스에 갇혔습니다.
두어 달 전쯤, 옆동에 사는 시어머니께서 "테라스에 갇혔었다"라고 했을 때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일주일 전 남편이 "테라스에 갇혔었다"라고 했을 때에도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밖에서는 테라스 섀시를 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 경각심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도 테라스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오후 4시 무렵, 강아지 멍쿠를 목욕시키고 털을 말리려고 테라스로 나갔습니다.
낮 기온 30도. 최근 에어컨을 27도로 가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냉기가 나갈 새라 테라스문을 꼭 닫았을 뿐이었고... 핸드폰은 방안에... '아 이건 아닌데'라는 짧은 생각이 스치는 찰나에 무심한 손끝은 섀시 문을 그대로 밀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헛웃음이 나더군요.
월요일인 오늘은 선준이가 하교 후 킥복싱과 피아노, 축구를 차례로 하고 돌아오는 날입니다.
남편이 픽업을 하는 날이라 저는 내일자 '스님의 하루' 뉴스레터 발행 봉사를 마치고, 점심을 먹고, 조금 쉬었다가, 기사 하나를 쓰고, 멍쿠를 목욕시켰습니다. 참 한가롭게요.
그리고 그렇게 테라스에 갇혔습니다.
선준이의 축구 수업이 7시 반이 좀 넘어서 끝나니, 남편이 약속한 햄버거를 사들고 집에 오려면 8시는 되어야 했습니다.
4시간의 감금이라...
사실 요즘 저는 '무엇을 하지 않느냐'가 앞으로 내가 향할 지표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골몰해 있었습니다.
내가 하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은 지금의 나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게 바쁘게 살았을까요.
'포트폴리오 워커'라는 정체성을 앞세워 이 일 저 일 참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딥 다이브를 배우고 3학년으로 편입한 상담심리학 수업도 나름 열심히 들었습니다.
육아도 하고 개도 키우니 가정의 역할도 충실히 했고요.
강릉에 이사와 놓고 한 달의 반의 반은 서울에서 보냈습니다.
그렇게 달력에 칸을 채우고 채웠는데도 뿌듯함이랄 게 없어서 의아했습니다.
무엇을 놓쳤을까.
테라스에 갇히고 나니 선명해졌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저에게는 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빈틈이 생기면 두려우니까요.
일단 본의 아니게 테라스에 함께 갇혀 버린 멍쿠에게 심심한 사과를 건넸습니다.
성격 좋은 멍쿠는 땡볕에 몸을 맡겼습니다.
저도 잠시 저 멀리 한 점에 집중했습니다.
명상을 하려고 테라스에 갇힌 것 마냥 잠시 호흡을 바라봤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는 별로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흘러봐야 벌써 4시간이 지났을 리가 없으니까요.
하릴없이 있는데 서서히 머릿속에 지난해 구상하던 그림책 몇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얼개는 짜놓고 디테일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중심 장면이 선명하게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장, 그 다음장도 차례로 그려졌습니다.
테라스에 갇혀 아무 것도 못하게 되자, 기회를 놓칠세라 미뤄뒀던 일들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기분이 썩 괜찮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모든 게 이루어지고 있어.
"갇힌 거야?"
뜻밖의 감금에 꽤나 만족하고 있는 시점에 남편이 들어왔습니다.
한참 저를 비웃으면서요.
남편은 선준이를 피아노 학원에 데려다 놓고 잠시 집에 들른 참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감금은 1시간 만에 종료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것은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미뤄둔 이야기가 떠오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일을 좀 줄여야 할까요.
몇 주 후면 경복궁 서촌에 리모델링하고 있는 한옥스테이가 문을 엽니다.
내일부터는 코칭의 세계로 입문하는 세션이 시작되고요.
조만간 정리를 좀 다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을 하지 않느냐가 제 삶을 결정할 것 같으니까요.
(참고로 이 글은 써놓은지 딱 두 달이 되었네요. 가볍게 글을 올리는 것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