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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리앙 Dec 24. 2020

장정일 시인 - 눈 속의 구조대

그것은 양식이 아닌, 단지 '그 자신'이었다.

어느덧 마스크를 쓰고 다닌지 10개월차에 접어듭니다.


마스크를 쓰면 한 번의 들숨을 위해 필요한 힘이 미약하게나마 증가합니다. 공기라는 유체가 폐로 들어오는 길에 '마스크'라는 화학 섬유의 직조물이 기존에는 없던 추가적인 저항으로 작용하기 때문이죠. 


온 국민이 비염 환자의 호흡법을 경험하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한 번의 숨을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은 힘을 써야했고, 그런 나날들로 무려 10개월을 경험했으니 말이지요.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숨처럼 당연한 것을 얻는 데 남들보다 더욱 많은 힘을 들여, 꾸역꾸역 호흡을 이어나가야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제 경우에, 그것은 시인이죠.


자신의 감각을 긍정하기 위해 필요한 방법을 아직 확보하지 못한,

(자본이라는 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은,) 

그래서 매일 여러 방법을 시도해보는 일.

바로 시를 쓰는 일일 겁니다.


남들 다 가는 '호캉스'로도, 자신에게 주는 '명품 선물'로도, 남들 시선을 끄는 '자동차'로도 도달할 수 없는 일임을 알기에

시인은 구태여 마스크를 벗지 않습니다.

콧물로 꽉찬 비강으로 힘들게 쉬는 숨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때론 코에서 검은색 피가 흘러 나오기도 합니다.

자신이라서 흘릴 수 있는 피를 긍정합니다. 비록 누군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말이죠.


시인은 괴기스럽다는 이미지가 자신에게 덧씌일지언정 

그것을 노골적인 '피', '더러운 시장 바닥의 핏물' 이라는 시어로 표현하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예술에선 '전위(아방가르드)'라는 양식으로 한정되기도 하지만, 사실 그것은 '양식'이 아닙니다.


바로 '나'이기에 느낄 수 있었던 '스스럼 없는 말'일 뿐입니다. 한 세기를 지나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나'라는 존재이기에 또 다시 뱉어낼 수 밖에 없는 '말'입니다.


대중은 그가 쉬는 숨에서 그저 칙칙한 쇳소리가 난다며, 이해하기 힘들다며, '전위'라는 낱말로 일축하지만

그것은 그냥 시인 그 자체일 뿐입니다.


그는 피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장정일 시인이 남긴, 

『눈 속의 구조대』라는 파편에서 그가 흘린 피의 냄새를 맡아봅니다.






X



너의 혀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칫솔보다는 확실히 달콤했지만, 칫솔만큼 내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일까? 이것은?

혀는 입안을 숨 가쁘게 돌아다니며 잇몸을 훑고 입천장을 두드렸다.

그리고 아직 사랑니가 나지 않은 내 이빨을 하나씩 헤아렸다

처음 숫자를 배우는 아이처럼

아이에게 숫자를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네 혀는 길게 늘어나며 내 목구멍 깊숙이 들어왔다

깊숙이 쳐들어와 내 갈비뼈를 하나씩 씻어 주었다

마치 앞서 배운 숫자를 복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혹은 그 숫자들로 마작을 놀듯이

그러고 나서 혀는 내 오장육부를 간질이며

온몸 구석구석을 탐색했다

그렇게 한 사람을 달뜨게 한 혀는

이윽고 그 자신에게 되돌아가기 위해

나올 구멍을 찾았다


제일 먼저 혀는 오른쪽과 왼쪽 콧구멍으로 번갈아 나왔다가 출구가 아닌 것을 알고 다시 들어갔다

나는 처음으로 남의 살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혀는 다시 양편 귓구멍으로 나왔다

내 귀는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듣고 쫑긋거렸다

세상은 음악이었다

혀가 두 눈을 출구로 오해하고 비집고 나왔을 때는 아파서 눈물이 났다

젖은 눈앞에 온통 새로운 것이 펼쳐졌다


나오는 구멍을 찾지 못한 혀는 내 온몸을 들쑤신 끝에

항문을 삐죽이 뚫고 나와

그 주위를 오래도록 핥았다

나는 내 이름을 잊었다


오랫동안 항문을 빨고 나서

다시 내 속으로 들어온 너의 혀는 드디어 출구를 찾았다

네 혀는 힘차게 내 성기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길게 늘어지며 너의 벌거벗은 몸뚱이를 감쌌다

뾰족해진 너의 혀는 너의 가랑이를 더듬었고

너는 네 자신의 절정을 탐닉했다


사랑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

사랑은 자신을 더욱 잘 사랑하는 것


.

.

.


해피엔드는 없어요



그것을 이상이라고

그것을 승리라고

그것을 원형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해피엔드겠지요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입니다

전 세계의 연인들이 두 사람의 비극으로부터

사랑의 이상과 승리와 원형을 구한다면 말입니다


우리 물리칩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물론이고

로미오와 줄리엣을 반복하는

허다한 시와 소설과 영화를 물리칩시다, 비웃어 줍시다!

압박 자위를 따라하지 맙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산업입니다


사랑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승리가 없습니다

사랑에는 원형이 없습니다

그런 해피엔드는 없어요


사전(辭典)을 토해 내는 사랑

원본을 물려줄 수 없는 사랑

스위트 홈이 거부하는 사랑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사랑

우리는 껴안아야 해요

캄캄하고 불안하기만 한 현재와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대본을


사랑은 실험

해피엔드는 없어요




사랑에는 이상과 승리와 원형 따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자의 사랑도, 마트 캐셔의 사랑도, 화계중학교 3학년 11반 29번 학생의 사랑도 


'매번 실험'일 뿐입니다.


어쩌면 인생을 다 바친 사랑이 결국 상대가 나를 통해 끈덕지게 시도한 자위에 지나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랑은

백과'사전' 따위의 원본이랑은 아무 상관없는 사랑이 되어야 하며,

안락한 '스위트 홈'이 주는 행복과 사랑으로부터 기인한 행복감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당신의 사랑이 캄캄하다면

그럼에도 함께하고 싶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물론 지금 당장은.


.

.


아브라함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나를 믿는다면 담배 600대를 피워 봐라.

암에 걸릴까 봐 안 피우느냐?

좋다, 위스키 600잔은 어떠냐?

글렌리벳과 맥켈란 가운데 골라 보아라.

건강에 나빠서 끊었느나?

나도 몰래 감쪽같이 끊었느냐?

내가 누구관데 간을 치료하지 못하겠느냐?

어린아이의 것처럼 보들보들하게 만들어 주마.

좋다. 에스프레소 600잔은 어떠냐?

한 잔만 마셔도 심장이 무지근해지느냐?

밤새 잠을 설치느냐?

그러면 달걀노른자를 띄운 쌍화차 600잔을 마셔라.

콜레스테롤이 무서우냐?

나보다 무서우냐?

좋다, 그러면 내가 천지창조 때 만든 시냇물 600잔이면 되겠느냐?

에비앙이 아니라서 못 마신다는 거냐?

오염이 돼서 안 된다는거냐?

위가 늘어난다는 거냐?

방광이 터진다는 거냐?

나는 너의 하나님,

너를 영생케 할 주인이 아니냐?

말해 봐라

말해 봐라

아무 잔도 받지 않고

아무 대꾸도 않으려거든 벌칙을 받아라

내 오줌, 600잔을 마셔라

기생충 알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내 항문을 핥아라

치사하냐? 이러는 내가

왕변태 같으냐?

아브라함아

믿음의 자손아

새로운 아브라함아

너는 무엇을 믿느냐?

말해 다오

말해 다오

제발


"말해주시오"



'나'의 느낌 외에 무엇을 믿을 수 있을까요?


이 시로써 확실해집니다.

그는 니체와 김수영의 후손입니다.


기생충 알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신'의 항문이 그렇고,

그가 좋아하는 시어, '항문'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파격을 보고 달아나는 독자를 보고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잘하셨소. 부디 당신의 것을 믿으시오."


.

.


그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공중의 것'을 부정하는 대신,

단단한 달동네 삶의 따뜻함을 기원합니다.

물론 어설프지 않게.



눈 속의 구조대



눈이 푹푹 쌓이는 날

반쯤 읽은 책을 반납하기 위해

도서관으로 향했다

파혼한 애인을 평생 사랑하게 될 그는 모르리라

교회는 왜 자꾸 마을로 내려오고

도서관은 왜 자꾸 산마루로 올라가는지


도서관으로 올라가는 비탈길 입구는

눈의 나라가 아니었다

119 구급차가 비탈길을 가로막은 골목은

새로 생긴 동네의 정육점 진열대 같았다

갑작스러운 시험은 날씬한 이들만 웃게 한다


비탈길을 조금 올라가자

어지러운 발자국과 바퀴 자국이 보였고

정돈되지 않은 무전기 교신음이 들렸다

형광 옷을 입은 네 명의 구조대원은 산소통을 둘러매고

바퀴 달린 접이식 들것을 끌고 있다


이 월급쟁이들은 곧 누군가를 구하게 되리라

병마개를 삼킨 어린아이를

의붓아버지에게 성매매를 강요당했던 여중생을

비트코인에 등록금을 털어 넣고 연탄을 피운 대학생을

연예인에게 악플을 달고 고소를 당한 실직자를

고양이에게 물린 개, 개에게 물린 고양이를

슈퍼마켓 주인은 이 사건이 극적이기를 원한다


가져간 책을 반납했다

이제 누군가는 구조되었으리라

한 명의 약혼녀와 파혼했던 자의 책을 반납하고

세 명의 약혼녀와 연이어 파혼했던 자의 책을 빌렸다

이들만큼 애타게 구조를 바랐던 이들은 또 없으리라

이들에 비하면 우리는 참 잘도 쉽고 거뜬하게 구조된다

청와대보다 우수한 건양대학교 응급구조학과가 있으니!


건양대 응급구조사 국가시험 3년 연속 100% 합격

건양대는 응급구조사 국가시험에 응시한 응급구조학과 수험생 전원이 합격했다고 9일 밝혔다.


첫 졸업생부터 3년 연속 100% 합격 신화를 이어 오고있다.

이 학과는 각종 국책사업을 통한 교육역량 중점 학사일정을 운영하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학기 중 건양대병원 10개과에서 임상실습으로 현장역량 중심교육을 하고 있다.

또 평생패밀리제도를 통한 학생 및 진로 상담, 재학생 전원 취업반 운영을 통한 진료 준비, 방학 중 토익몰입교육 등 차별화된 교육과정을 펼치고 있다.

동문회도 지난 2016년과 2017년에 걸쳐 600만 원의 동문회 발전기금을 모으면서 학과 발전에 일조하고 있다.


도서관에서 내려오는 길에

눈 속에서 두런거리는 구조대를 다시 만났다

쫑긋 세운 귓등으로 구조대와 마을 사람의 대화가 들렸다

"어디를 찾습니까?"

"현대빌라요."

"현대빌라는 저긴데."

"거기는 신현대빌라라고 하더군요."

"그래요? 우리도 모르는 신현대빌라가 이 동네에 있어요?"


우리가 사는 현대

그 잘난 현대가 행방불명이다

죽었다는 신이 자꾸 새로 생겨나

구조대가 찾지 못하는 것은 현대다

소리 없는 경광등이 눈발을 뒤집어쓴다


.

.


파혼한 이들의 책이 있는 도서관은 점점 먼 산마루로 올라갑니다. 

반면, 교회는 인접한 지역으로 더 가까워만집니다.


「"어디를 찾습니까?"

"현대빌라요."

"현대빌라는 저긴데."

"거기는 신현대빌라라고 하더군요."

"그래요? 우리도 모르는 신현대빌라가 이 동네에 있어요?"」


'포스트모던'은 있지만, '모던'이 없는 아이러니.


모든 '포스트모던인'들의 꿈은

형상 뿐인 '포스트모던'을 길길이 파고들어 

돈을 벌고 떵떵거리며 사는 것 



시인은 미디어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방송은 있는데 컨텐츠가 없다.'

'컨텐츠는 있는데 사람이 없다.'

'흥미는 있는데 시선이 없다.'


.

.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2018년 3월 30일 

맥도날드 경희대학교점이 폐점했다

어찌 이 날을 울지 않고 지나가랴?

온통 맥도날드가 널려 있는 세상에

맥도날드가 없는 동네라니

우리는 노스트라다무스가 되었다


성소가 없는 동네에서는

손가락이나 귀가 하나씩 모자란 아이들이

성기가 없는 아이들이

항문이 없는 아이들이 태어날 거야

개와 고양이가 쥐를 낳게 될 거야


여기가 체르노빌이야

여기가 후쿠시마야

여기가 평양이야

여기가 락까야


한 컵에 두 개의 빨대를 꽂고

이마를 맞댄 채 얼음 재운 콜라를 마시던 곳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찾아온

우리의 보리수

거기서 우리는 새처럼 지절댔지


온통 맥도날드인 세상에서

우리는 장소를 잃어버렸다




이미 지구의 소비/발전 주체가 된 20-50대 중에는 

가히 '맥도날드'를 향토 삼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어린시절 용돈을 모아 '한 컵에 두 개의 빨대를 꽂고 이마를 맞댄 채 얼음 재운 콜라' 를 벌컥벌컥 마셨으니까요.



이제 우리를 희망고문하던 애인('맥도날드')은

우리의 영혼을 쥐고 자칫 사라질 듯 협박을 가합니다.


1905년에는 나라를 잃었지만

이제는 영혼을 잃을 위험에 처했습니다.


여기서 더 치명적인 건,

나라는 잃었다는 것은 대국민적인 공감으로 아주 쉽게 

'그리움의 모멘텀(되찾아야할 무엇이라는)'을 갖지만


영혼은 잃게 되어도, 영민하지 못한 이들은 그것을 알아챌 수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영혼 잃은 이들이 더욱 당당할 수도 있는 '맥도날드' 세상


그러니 시인은 '시일'을 '방성대곡'할 수 밖에 없습니다.



.

.

.

.

.


"시란, 다르게 또 같이 있을 수 있다는 희망"


도리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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