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심을 앗아가는 판도라 상자의 정체, '이성'
안녕하세요. 글쓰는 도리앙입니다.
'그냥' 책을 읽는다.
'그냥' 음악을 듣는다.
'그냥' 글을 쓴다.
'그냥' 커피를 마신다.
요즘은 '그냥' 무얼 한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위로로 다가옵니다. 행동의 동기는 언제나 명확했습니다. 행동의 이유가 곧고 선명할수록 그것은 아마도 성적이나 돈, 경제생활과 관련 것이었어요.
그간 좋아하는 일에선 '이유'를 찾지 않았으니까요. 때문에 이유 없는 일들이 더욱 더 소중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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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무시무시한 생각도 해봅니다.
지금 내가 한적한 밤 따뜻한 방 안에서 '그냥' 무언가를 할 시간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의 저시급 노동과 나의 상대적 고시급 노동을 맞바꾼 틈새 이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정해진 시간에 최소 생활비를 일찌감치 벌고 쉬는 반면, 어떤 이는 최소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루 14시간은 꼬박 일을 해야 할 텐데.
어쩌면 타인과의 괴리감에 빠져 이 추운 겨울을 지나는 어떤 이에겐 나의 이 여가가 그의 평생을 지나 맞바꾸고 싶은 소망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고지식한 생각에 빠져든 이유는요.
바로 이 책에 있습니다.
오늘은 장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입니다.
루소의 논의는 인류의 원형인 미개인(원시인) 사회에 바탕을 둡니다.
모두가 동의하듯이 인간은 서로 평등하게 태어났다. 몇몇 종에서 알아차리듯이, 다양한 물리적 원인에 변종이 생겨나기 전 각종 동물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요즘 아이들의 출발선은 제각각이지만, 인류의 출발점은 모두 같았을 것이라는 게 그의 전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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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그는 인간이 과거의 본원적 구조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을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인간은 세월과 사태의 연속이 그의 본원적 구조에 야기했음에 틀림없는 온갖 변화를 거치면서 자연이 만들어 놓은 상태 그대로의 자신을 알지 못하게 되어, 자신의 본질에 속한 것과 상황이나 진보가 그들의 원시 상태에 가하거나 변화시킨 것을 분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존재입니다. 단적인 예로 '결혼'을 들 수 있지 않을까요.
결혼의 출발점은 사회 규모가 성장하면서 구성원 간 일종의 동맹/혈연관계를 직조하여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제도'에 불과합니다. 집안 살림을 덜기 위해 쌀 가마니 하나 못 드는 딸 아이를 얼른 시집 보내는 '조혼'이 유행했던 점, 양반은 천민과 결혼할 수 없었던 풍습을 통해 알 수 있지요.
(김용덕. 한국의 풍속사Ⅰ. 서울: 밀알, 1994.)
하지만 현대의 결혼은 사랑의 낭만적인 종착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누구나 실패를 예상하면서도 대부분 도전하고, 결국 대부분이 실패하는)
사실 사랑한다면 '그냥' 같이 한 50년 살면 될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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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이렇게 본원적인 마음을 잃은 채, 과도기적인 제도와 풍습에 여전히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루소에 따르면 인류는 점점 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리죠.'
훨씬 더 끔찍한 것은 인류의 모든 진보가 그 영혼을 끊임없이 그것의 원시 상태로부터 멀어지게 함으로써 우리가 새로운 지식을 축적하면 할수록 모든 지식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을 얻는 수단을 우리에게서 더 빼앗아 간다는 사실인데,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을 너무 연구한 나머지 오히려 인간을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루소는 인간이 인간을 이해할 수 있었던, 아니, 이해할 필요도 없었던 '이성' 발달 이전의 인간 마음을 상상합니다.
'미개인(원시인)이라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 본연의 마음을 '자연법'이라 일컫습니다. 그는 자연법의 두 가지 원리를 발견합니다.
1. 인간은 우리 자신의 안위와 자기 보존에 열렬히 관심을 갖게 한다.
2. 인간은 모든 감성적 존재, 특히 우리 인간이 죽거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기 싫어하게 하는 자연적인 혐오감을 느낀다.
자연법의 첫번째 마음은 그 유명한 인간의 '매슬로우 욕구 이론'의 하위 욕구에 해당합니다. 즉, 생리적인 욕구와 안전에 대한 욕구입니다.
두번째 마음은 첫번째와는 다르게 하나의 현대적인 용어로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다음과 같은 경우 때문이죠.
폭동이나 거리의 싸움을 보고 (미개인)은 주위로 몰려들지만 신중한 사람은 멀리 달아나 버린다. 싸움꾼들을 떼어 말리고 정직한 사람들이 서로 목을 조르지 못하게 막는 것은 바로 그 하층민들이거나 시장의 아낙네들이다.
..우리 눈앞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우러 깊은 생각 없이 달려가게 하는 것이 바로 그 동정심이다. 자연 상태에서, ..법과 미풍양속과 미덕을 대신하는 것도 바로 그 동정심이다.
반면,
이기심을 낳는 것은 이성이며, 그 이기심을 강화하는 것은 반성이다 .바로 그 반성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자신을 방해하고 괴롭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떼어놓는다. 그를 고립시키는 것은 철학이며,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당신이 원하면 죽어라. 나는 안전하다."라고 몰래 중얼거리는 것도 철학 덕분이다. ..그는 손으로 귀를 막고 어떤 핑계를 대며 자기 내부에서 분노하는 자연으로 하여금 살해당하는 사람과 자기를 일체화시키지 못하게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루소가 정의한 자연법의 두번째 마음을 '이타심' 이라는 단어로 정의했다면 크나 큰 오산이었을 것입니다.
'이타심', '배려', '인류의 행복'과 같은 언어를 떠올리는 것은 사실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닙니다. (시인들이 언어를 재료로 언어를 능가하고자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타심'이라고 말하는 순간에 '이타심'은 없는 것입니다. 이타심은 묵묵한 행동이니까요.
'배려'라니요. 그 개념을 떠올리는 시간에 얼른 시장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뜯어 말려야지요.
오히려 현대인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이타심', '인류애', '인류 보존' 등의 단어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당신이 원하면 죽어라. 나는 안전하다."라고 몰래 중얼거리는 철학 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언어로 정의함으로써 그 상황과 거리를 두는 것이지요.
이 부분에서 루소의 통찰은 날카롭게 빛납니다.
루소가 정의한 자연법의 두번째 마음에 대한 날조로부터 인류의 불평등이 비롯됩니다.
흥미롭게도 성경의 '선악과',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의 상자'와 대응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난 수치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야.'라는 마음은 '나의 이성으로 너를 도와줄게.'라는 위선적 오만으로 발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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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논문의 다음 꼭지에서 '부동산과 사유재산의 기원'을 추론합니다.
한 땅에 울타리를 치고 "이것은 내 것이야."라고 말할 생각을 해내고, 다른 사람들이 그 말을 믿을 만큼 순진하다고 생각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사회의 실제 창시자다.
그 오만한 '최초의 인간'에게
"여러분, 저 사기꾼의 말을 듣지 마시오. 만일 과일은 우리 모두의 것이고, 땅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님을 망각하면 당신들은 파멸이오." 라고 말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즈음 인간은 인간들끼리 먹을 것을 두고 다투거나 더 강한 자에게 양보해야 하는 법 을 배웠기 때문이죠. 즉, 본원적으로 비겁할 수밖에 없는 '이성'이 발달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이성적인 사람에게서 '비겁의 냄새'가 풍겨오는 이유도 이로써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선악과를 과다복용하고, 인류 발달사를 지나치게 잘 이해한 사람이기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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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로크(John Locke)의 말을 인용합니다.
"소유가 없는 곳에는 부정이 있을 수 없다."
즉, 부정이 있는 곳에 소유가 있다는 말로도 이해됩니다. 소유는 부정(不正, 올바르지 않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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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를 나타내는 표시들이 발명되기 전에는 그 부를 이루는 것으로는 땅과 가축밖에 없었으며, 그것들이야말로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실제 재산이었다.
그런데 소유지가 대지 전체에까지 미쳐 모든 소유지가 서로 인접할 정도로 수나 넓이 면에서 증가했을 때 소유지는 오로지 타인의 소유지를 희생시킴으로써만 불어날 수 있었다.
재산의 선점과 개인적인 재능의 발달은 '계급 사회'로 발전합니다. 그 최상위 계급인 중 누군가가 대외적으로는 '대의'를 표방하며, 자신의 적들이 오히려 자신의 방어하게 만들 수 있는 일련의 제도와 민족 단위를 창조합니다.
'법'과 '국가'의 탄생입니다.
법은 부자에게 새로운 힘(공증된 힘)을 부여하여 일반 서민들의 자연적 자유를 아주 파괴해 버리고 소유와 불평등의 법칙을 영구히 고착화 합니다.
수 백년이 흘러, 힘이 없거나 이성을 발달시키지 않은 미개인은 이비참한 예속 상태를 평화라고 부르기 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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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의 말미에서 루소는 한 가지 희망적인 명제를 제시합니다.
지배하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을 복종시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능란한 정치인일지라도 자유롭기만을 원하는 사람들을 예속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자유로운 자는 지배되지 않는다." 이 얼마나 희망찬 이야기인가요.
하지만 앞 문장의 찜찜한 기분은 이내 뒷목을 서늘하게 합니다. 지배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복종시키기는 쉽다 는 의미로도 읽히기 때문이죠.
이를 테면, 부장은 승진하려는(=권력을 쥐려는) 과장을 지배하기 쉽죠. 승진하려는 과장은 당연히 대리와 사원들을 지배하는 것에서 '(뒤틀린) 자유'를 느낄 것입니다. 만일 과장이 '나는 자유를 찾아 훨훨 날 거야.'와 같은 말을 내뱉는다면 그것은 부장, 상무, 부사장, 사장이 되겠다는 의미입니다. 정(正)과 부정(不正) 잣대에서 완전히 벗어난 미개의 자유인이 되겠다는 의미는 아닐 겁니다.
조금 더 일상적인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쇼핑'이나 '물건의 소유'에서 일종의 '(뒤틀린) 자유'를 맛봅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 대부분을 크고 작은 소유에서 찾게 됩니다. 그런 우리가 '자유롭겠다.'라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더 많은 물건을 고민없이 사는 사람이 되겠다는 의미에 가까울 것입니다.
우리 또는 우리의 노동력은 누군가(자본)에게 소유되었고, 우리 또한 소자본으로 무언가를 소유하려 합니다.
그러니 우리 인류는, 특히 대도시를 경험한 자본주의 인간은 불평등에 철저히 예속되어 있는 동시에, 불평등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앞서 '최초의 인간'에게 "
여러분, 저 사기꾼의 말을 듣지 마시오. 만일 과일은 우리 모두의 것이고, 땅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님을 망각하면 당신들은 파멸이오."라고 말해주지 못한 이성적인 인간처럼 말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평등과 불평등의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입니다.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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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무려 260여년 전에 쓰여진 책입니다. 1789년 프랑스의 시민혁명보다 앞서, 산업혁명이 태동하기 전의 당대 불평등 사회를 요약/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더불어 가슴을 찢는 것은 260년이 지난 2021년 지금 이 책이 여전히 가치를 더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 책의 주요 포인트를 두 가지로 요약하고자 합니다.
1.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자연스런 인간의 마음을 회피하려 여타 철학적, 이성적 도식으로 '정신 승리'하지 말 것
2. 부동산의 소유는 유아적이며 하릴없는 인간의 비겁한 이성이 작용한 '단순 땅따먹기'에서 비롯된 개념이라는 점(부동산 소유에 대한 감수성)
슬픈 일이지만 루소의 이론을 빌려 저의 도식을 완성한 이 글 역시 또 하나의 '선악과'에 불과할 것입니다.. 저 또한 자본주의 인간이니까요.
이상, 도리앙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