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 2일 연수의 마침표는 명사 특강이었다.
강단에 선 남자는 자신의 고단했던 과거를 복기했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매일을 감사함으로 버텨냈다는, 익숙하지만 거부하기 힘든 매혹적인 서사. 그는 이제 수많은 청중 앞에서 자신의 성공 신화를 정교하게 전시하고 있다. 객석의 몇몇은 감동에 젖어 눈물을 글썽였고, 몇몇은 예의를 갖춰 소심한 박수를 보냈다.
타인의 불행을 안전한 거리에서 관람하는 시간. 그 인위적인 열기에 동화되지 못한 나는 맨 뒷자리로 밀려났다.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꺼내 주식창을 켠다. 화면을 가득 채운 시퍼런 숫자들이 오늘의 내 온도와 닮아 있었다.
연수가 끝난 다음 날, 술을 좋아하는 동료와 김치찌개를 앞에 두고 소주 한 병을 비워냈다. 하지만 찌개 김 속으로 흩어지는 온기만으로는 마음의 허기가 채워지지 않아, 우리는 홀린 듯 낮부터 불을 밝힌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삶의 얼룩진 페이지들로 넘어갔다. 시렸던 어릴 적 가난, 결혼 후 스스로에게 매긴 불효자라는 낙인, 안개 자욱한 앞날에 대한 막막함. 여기에 해외 출장 탓에 어머니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지 못했다는 지인의 고백이 건네 더해지자 술상은 금세 숙연해졌다. 에스트로겐이 차오를 나이가 된 탓일까, 굳은살 박인 두 아저씨의 눈가가 주홍빛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종종 꺼내 읽는 쇼펜하우어를 이야기를 꺼낸다. 태생부터 금수저였던 그 철학자에게도 우울은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일상이었다. 이어 머릿속으로 고흐의 생애를 다룬 영화의 한 장면을 복기한다. 그는 평생을 불행과 연애하듯 살았다.
문득 깨닫는다. 우리는 누군가와 연결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상처를 먼저 꺼내 보인다는 것을. 마치 영수증을 주고받듯, 서로의 불행을 경쟁하듯 교환하며 관계의 유효기간을 갱신한다.
"많이 힘들었구나."
그 짧은 한마디의 위로를 구매하기 위해, 우리는 그동안 마음속 깊은 곳에 은닉해 두었던 아픈 기억들을 안주 삼아 술잔에 띄운다. 우리는 서로의 불행을 적당히 소비하며 비로소 안도한다. 나만 아픈 게 아니라는 사실, 저 사람도 나처럼 무너진 자리를 간신히 딛고 서 있다는 동질감이 오늘의 나를 지탱하는 유일한 버팀목이 된다.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본다. 찬란하게 빛나는 저 밝은 곳들을 의식적으로 멀리한다. 타인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마치 내 결핍을 조롱하는 듯해 괜스레 화가 돋운다. 분명 내가 속해야 할 곳은 저 빛 속인데, 왜 나는 자꾸만 이 어둑한 그늘 아래서 서로의 상처를 헤집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성숙이란 불행을 완벽히 극복하거나 감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서로의 상처가 흉터로 남았음을 조용히 확인하며, 말없이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넉넉한 품을 갖게 되는 것. 비록 빛나는 저들 사이에 섞이지 못하더라도, 어둠 속에서 마주 앉은 이의 젖은 눈동자를 닦아줄 수 있는 용기를 얻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 고단한 생을 함께 버텨내는 유일하고도 처절한 방식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