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이라는 이름의 거리

by 심온

어느 날 새벽, 잠에서 깬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빗소리가 가득한 어둠 속, 지난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그제야 보인다—나를 향했던 그 따뜻해 보였던 시선들의 정체가.


호의라고 믿었던 것들은 사실 연민이었다. 불쌍함. 안쓰러움. 그 미묘한 차이를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호의라고 믿는 편이 더 편했으니까.


"착하네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웃었다. 순수하다는 뜻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하지만 착하다는 말은 '바보 같다'를 좋게 포장한 것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이용당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 경계 없이 다가가는 사람.


누군가 "선배, 바보 같아"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것조차 친근한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웃으며 넘겼다. 그런데 그 말은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그때 그 눈빛, 그때 그 표정을 이제야 다시 떠올린다. 안타까움이 섞인 그 시선.


"우리 친구지? 친한 친구지?"


이렇게 물었을 때 돌아온 어색한 "그래"라는 대답. 그 주저함의 의미를 이제야 안다. 친구가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대상. 거절하기 미안한 존재. 선을 긋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는 애매한 관계. 진짜 친구였다면 주저 없이 대답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확인을 구했다. 그것 자체가 이미 답이었는데도.


늦은 새벽,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나를 찾아온 땅콩이를 어루만진다.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강아지. 그 눈빛이 낯익다.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던 것과 닮았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땅콩이의 눈빛에는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


땅콩이는 말을 할 수 없다. 감정을 표현할 방법이 제한적이다. 그저 눈빛과 몸짓으로 호소할 뿐. 나도 그랬던 걸까. 말은 했지만 진짜 내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눈빛으로만 호소하던 사람.


차이가 있다면 이것뿐이다. 나는 땅콩이를 어루만지지만, 나를 어루만지는 이는 없다. 아니, 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왜 이제야 보이는 걸까. 왜 이렇게 늦게 깨달은 걸까. 이것이 나의 실패 이유였는데. 연민을 호의로, 동정을 우정으로 착각하며 살아온 시간들. 그 착각 속에서 나는 편안했다.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이제 안다. 그 앎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은 자유로워진 기분도 든다. 더 이상 착각 속에 살지 않아도 되니까. 이제는 진짜 관계와 가짜 관계를 구분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모든 것이 해결된 건 아니다. 여전히 외롭다. 여전히 혼자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안다. 그리고 아는 것에서 변화는 시작된다.

매거진의 이전글가면 없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