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s from Argentina 프롤로그

2015년 Letters from Argentina를 쓰게 된 이야기

by Dori Lee

대학을 졸업하기 전, 난 혈기왕성한 20대 청춘을 핑계 삼아 다소 무모할 수도 있는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비록 마음속으로는 이미 학교 담벼락을 수십 번도 더 넘었지만…)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방학 보충수업이며 야자를 꼬박꼬박 했고, 미국에 와서까지도 한국 중고등학교의 빡쎈 규율에 익숙해진 나는 남들은 20대가 지나가기 전 한 번씩은 다해본다는 “일탈”을 해보지 못했다. 나 스스로가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모범생”의 길을 걷고 있다는 데에 불현듯 놀랐고, 나의 20대를 이렇게 멋없이 보낼 수가 없었다. 물론 겉으로는 “내가 아직 발굴하지 못한 잠재력을 발견하고, 나의 comfort zone을 깨뜨리고 싶은 갈망에 나는 교환학생을 가기로 결심을 했어”라며 그럴듯한 허세를 부렸지만 속으로는 나도 이렇다 할 만한 모험을 해보고 “나도 나름 알고 보면 재미있는 사람이야”를 과시하고 싶은 마음에 덜컥 어디론가, 그것도 남들이 잘 안 가는 곳을 가보고 싶었다.


이왕이면 가장 낯설고 내게 익숙하지 않은...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가장 먼 나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고른 게 탱고의 고장 아르헨티나였다. 특별히 탱고를 좋아하는 것도 그렇다고 축구를 즐겨보는 팬도 아니었지만 국제관계학을 전공하는 학과 동기들이 대부분 유럽 국가로 교환학생을 간다기에... 나는 그런 시시한 유럽은 나중에 학교에서 대주는 돈으로 마음껏 학회에 참석하면서 여행을 하리라는 정말 건방지고 오만한 생각으로 애초에 내 리스트에서 지워버리고 철저히 낯선 환경 곳으로 가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사실 남미 대륙 중 아르헨티나를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인권 관련 수업시간에 우연히 본 아르헨티나에 관한 다큐멘터리의 영향이 컸다. 1970년대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정권의 실상의 단면을 다룬 다큐였는데,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에서 벌어진 일련의 여러 사건들과 묘하게 겹쳐지는 이미지들이 많았다. 다큐에서 비치는 많은 아르헨티나의 젊은이들의 모습은 언어와 생김새만 달랐지 그들이 바라는 세상과 그들이 외치는 구호는 우리나라 군부정권 아래에서 민주화를 외치는 대학생들 모습과 차이가 없었다. 우리나라와 지구 정 반대편에 위치해서 아무 연고가 없을 것 같은 나라 아르헨티나에서 우리나라와 동시대에 비슷한 역사가 쓰였다는 사실이 나를 자극했고, 인권의 문제를 현장에서 확인하고픈 마음이 나를 아르헨티나로 향하게 했다.


그러나 과정은 쉽지만은 않았다. 학교 측에서는 남미 국가들이 다소 치안이 위험 국가로 분류되어서 지원하는 과정에서 참 많이 고생을 했고, 20대의 어린 딸을 미지의 나라로 보내는 부모님을 안심시키는 과정이 쉽지 않았고, 사실 나 자신도 두려움이 컸지만... 에라 모르겠다 이도리의 20대에 이렇다 할 모험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그렇게 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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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는 그야말로 ‘낯섬’ 그 자체였다. 나름 제2외국어로 스페인어를 4년간 배우면서 매 학기 수업을 들었지만, 남미권의 스페인어는 내가 배운 스페인어와는 또 많이 달랐다. 처음 일주일은 길거리에서 누가 나한테 말이라도 걸면, 얼굴이 새 빨개져서 ‘Si, si (네, 네)’만 반복했다. 이러다 보니 웃픈(웃기고도 슬픈) 해프닝이 많았다. 같이 수업을 듣게 된 아르헨티나 현지 학생들이 신기하게 생긴 작은 동양 여자애가 들어와 있으니, 호기심에 내게 다가와 이런저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난 겉으로는 쑥스러운 척 웃고는 있었지만, 속으로는 ‘제발 말 걸지 마… 제발…’하고 수백 번을 되내었다. 그러다 이 친구들 중에 한 명이 ‘Sos de Corea de Norte?(너 북한에서 왔니?)’라고 질문을 했는데, 그 당시에는 그 질문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냥 ‘Si’ 했다가 친구들이 반응을 보고,‘아… 내가 뭔진 몰라도 지금 아주 큰 실수를 했구나..’하고 깨달았다. 그렇게 나의 아르헨티나 적응기는 시작되었다.


그 미지의 땅을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단신으로 지난 2015년 2월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정착을 했는데, 과거 60년대에는 미국과 양대 산맥이었을 정도로 세계적인 선진국이었을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졌다. 과거의 영광을 엿볼 수 있는 유적지와 넓은 땅덩어리와 다양한 부존자원들이 참 부럽긴 했지만, 전체적인 아르헨티나의 첫인상은 과거의 영화로움이 빛을 바래 활력이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잦은 정치적 불안과, 포퓰리즘, 외국자본의 횡포, 공업화 실패 등으로 파업이 잦았고,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여과 없이 표출했다. 제 3자의 입장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국가란 국민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문제는 많이 생각하게 된 기회가 되었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낯선 곳에서 나를, 또 우리나라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처음 나를 아르헨티나로 이끌게 한 원동력인 ‘인권에 관한 호기심’에 탄력 받아 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일탈해보겠다고 간 곳에서 개인 프로젝트라니… 이도리는 어쩔 수 없는 듯하다…), 아르헨티나 곳곳의 인권유린과 관련된 지역을 방문하고 그 당시를 경험한 유가족들과 생존자들을 인터뷰하면서 과거 아르헨티나의 아픈 역사의 현장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유독 인상 깊었던 부분은 역사교육의 현장이었고, 그 모습이 우리나라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학교를 입학하게 된 아주 어린 나이부터 역사교육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교육방식이 남달랐다. 책을 통해서, 혹은 학교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교육이 아닌, 직접 그 장소에 방문을 하고, 함께 평화 시위에 참여하고, 관련자들과 깊이 있는 만남을 통해서 머리로 마음으로 아픈 역사를 온몸으로 학습한다.


군사독재 정권들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한세대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정의 구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처와 아픔이 세대를 거듭하게 되면서 30년도 더 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실종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자 38년 전부터 매주 목요일 Plaza de Mayo (오월의 광장: 대통령 궁 앞에 위치)에 Las Madres de Plaza de Mayo (오월의 광장 어머니들: 실종자들의 어머니들의 모임)이라고 하는 NGO 가 집회를 열고 있다. 어느 봄 나도 이 평화 행렬에 참여하고자 광장으로 나갔다. 그런데 공립학교 교복을 입은 어린 초등학생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겨우 내 허리춤에나 올 어린아이들이 있어서 내가 잘못 왔나 싶었는데, 곧 할머니들(실종자 어머니들)을 태운 하얀색 벤이 광장으로 들어왔고 동시에 아이들은 그 벤을 둘러싸고 행렬 주제가를 부르며 할머니들을 맞이하였다. 차에서 내린 할머니들은 아이들을 안아주며 반기셨고 아이들을 익숙하게 할머니들의 손을 잡고 이 행렬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굉장히 낯선 풍경이었고 그와 함께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가 겹쳐졌다.


종로에서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집회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두 집회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위안부 할머니가 한 분 한 분이 돌아기실 때마다 그 역사가 잊혀 질까 두려워하는 우리 할머니들의 어두운 표정과 다르게, 아르헨티나 할머니들의 표정은 전혀 무거 워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어린 나이 때부터 이런 역사적 행렬에 동참해 할머니들과 뜻을 같이 하는 새싹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훗날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도 정의를 위한 투쟁은 멈추지 않을 것을 아르헨티나 할머니들은 알고 있었다. 또 집회 시간이 되면 블라인드까지 빈틈없이 닫는 일본 대사관 앞과는 달리, 아르헨티나에서 물구나무 선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싸움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 대통령궁 앞 개방된 광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아르헨티나의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은 한 나라 내의 투쟁이고, 우리나라는 상대국 (일본)이 있는 대외적인 문제여서 그대로 비교하기 어렵지만 여러 면에서 역사를 대하는 자세가 우리와 너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아르헨티나 할머니들은 그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눈물을 닦아줄 다음 세대들을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기에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비록 한 학기 짧은 기간이었지만 언어와 문화가 낯선 나라, 그러나 민주화 과정에서 우리와 많이 닮은 역사의 흔적을 가진 아르헨티나에서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가졌다. 낯선 것을 거부하지 않는 용기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받은 것 같아 내 대학생활이 아쉽지 않다. 인생의 20대 초반에 낯설고 물선 아르헨티나에서 콕 찍은 한 점(경험)이 다른 시점 다른 곳에서 한 점 (경험)과 아름답게 연결되어 언젠가 영향력 있는 선과 면으로 확대될 것을 기대해본다.


아르헨티나에 가서까지도 매일 밤 보고서 작성에 커피로 수혈을 받았고, 인터뷰와 자료 정리로 아르헨티나까지 가서 그 유명하다는 파타고니아는 고사하고 이과수 폭포 조차 보지 못하고 왔다... 그러나 눈으로 담은 것보다 내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뜨거운 배움을 가지고 와서 후회는 없다.


Adios Argentina!

Nos vemos muy pron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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