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3대 여류 시인: 허난설헌 part 2.
지난 편에서 허난설헌의 유년기에 대해서 살펴봤다. 이번 편에서는 허난설헌이 15세 어린 나이에 김성립에게 시집을 가고 난 그 이후부터의 삶을 그녀의 시 규원가와 곡자를 통해 살펴보겠다.
허난설헌과 남편 김성립의 집안은 같은 동인 집안이어서 혼담이 자연스럽게 오고 갔다.
과거에는 이렇게 집안 어른들이 서로의 배필을 정해주고 성사시키는 정략결혼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유년기 당차고 자신만만했던 허난설헌의 성격으로 미뤄보건대 그녀는 이런 정략결혼이 싫었을 것 같다. 제대로 만나 보지도 못하고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감정이 제대로 생기기도 이른 나이에 자신보다 한 살 많았을 16세 사내에게 자신의 인생을 맡겨야 하는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결혼 풍습이 똑똑한 허난설헌에겐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당시 조선 중기에는 여성이 시집을 가는 친영제가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고, 반대로 남자가 여자 집에 장가를 오는 남귀여가혼이 더 일반적이기였기에, 대세를 따르면, 아버지 허엽은 귀하디 귀한 딸 허초희를 결혼시킨 이후에도 곁에 둘 수 있었다. 그러나 꼿꼿했던 아버지 허엽은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며 금지옥엽 딸을 보편화된 풍습과는 다르게 시집을 보냈다.
고생 한번 안 하고 사랑만 담뿍 받고 살아온 허난설헌은 안동 김씨네 집안으로 시집을 가게 되면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다음은 규원가의 도입 부분 중 일부다.
도입부에는 자신의 유년 시절을 그리워하고, 남편 김성립을 원망하는 내용이 있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 생각해도 부질없다.
늙어서야 서러운 말을 하자니 목이 멘다.
부모님이 나를 낳아 고생하며 기르실 때
벼슬아치 배우자는 못 바라도 품행이 단정한 사람을 원했는데,
전생의 원망스런 운명이자 중매장이 주선으로
한양 거리에서 풍류에 빠진 경박한 남자를 꿈같이 만나서,
그 당시에 마음 졸이기 살어름 디디는 듯,
(중략)
재능이 남달랐던 부인을 남편 김성립은 매우 부담스러워했다. 자신보다 똑똑하고 지혜로웠던 허난설헌 앞에서 기를 펼 수 없었던 김성립은 밖을 나돌았다. 그런 남편을 허난설헌은 “한양 거리에서 풍류에 빠진 경박한 남자”라고 표현을 했다.
허난설헌 또한 젊은 시절 미인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예쁘기도 예뻐서 항상 어딜 가나 사랑만 받고 귀여움을 독차지했을 듯하다. 이렇게 항상 주목받던 허난설헌에게 남편의 외도는 정말 치욕스러웠을 것이다. 기방을 드나든다는 사실도 화가 나지만, 항상 존중받고 사랑받던 자신이 하나뿐인 지아비로부터 외면받는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괴로워 이러한 마음을 시로 표현했다. 그래서 규원가의 또 다른 이름은 원부가, 즉 지아비를 원망하는 노래라고도 불린다.
능력 있는 며느리가 들어왔는데, 아들이 허랑방탕하게 생활하며 기생을 끼고 놀고 앉아 있다면, 요즘 엄마들 같으면 며느리한테 너무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아들 새끼의 등짝을 가격하며 후드려 패도 모자랄 텐데, 허난설헌의 시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허난설헌이 시를 쓰는 것을 매우 못마땅해했고, 아들 김성립이 자꾸 과거 시험에서 떨어지는 게 허난설헌이 제대로 내조를 못해서라고 되려 기생집 전전하는 아들보다 허난설헌을 타박했다.
도교 사상에 의해 항상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다는 집 안 분위기에서 자신도 어릴 적부터 오빠와 동생 허균과 함께 공부를 하면서 공평하게 능력을 인정받았던 친정과는 완전히 다른 남존여비 사상에 찌든 시댁의 비난과 힐책이 허난설헌에겐 너무도 부당하게 느껴졌을 것 같다. 허난설헌은 시집을 오고 나서 이렇게 기록했다고 한다.
저에겐 세 가지 한이 있답니다.
첫째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
둘째는 여자로 태어났으나 아이를 갖지 못한 것,
셋째는 수많은 남자 중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입니다.
허난설헌과 김성립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은 허난설헌의 규원가에서도 알 수 있고, 허균의 기록에도 등장한다. 누이와 김성립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누이가 힘들어했고, 죽고 나서도 부부의 금슬이 좋지 않아 누이를 기억해줄 자식들 조차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이러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오늘날 김성립에 대한 부정적인 프레임이 만들어져서 나 또한 김성립을 떠올리면 양아치 같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또 한편 생각을 해보면 오늘날 김성립에 대한 이미지는 모두 허난설헌과 허균 오누이의 기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봤을 때 어쩌면 김성립도 좀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난설헌이 죽고 나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성립은 의병장으로 참여해 전쟁터에서 전사를 한다. 임금도 나라를 버리고 도망가는 와중에 이렇게 의병장으로 나서서 목숨을 다해 싸운 사람이 과연 자신의 아내를 그렇게 책임감 없이 버리고 나돌았을까? 싶기도 한다.
또 다음 구절을 보면 허난설헌이 김성립에게 갖고 있던 감정이 모두 원망뿐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삼삼오오 드나드는 기생집에 예쁜 기생이 생겼을까.
꽃 피고 날 저물 때가지 정처 없이 집을 나가서
화려한 차림으로 어디에서 머물까.
있는 곳을 모르는데 소식은 어찌 알 수 있을까.
(부부의) 인연을 끊으려 한들 생각조차 없을까.
얼굴을 못 보면 그립기나 말 것이지.
(중략)
규원가 도입부는 남편에 대한 원망의 감정으로 시작을 했지만, 이후에 원망의 마음이 그리움으로 변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시 처음 부분에는 양아치한테 시집을 간 자신의 처지가 너무 한탄스럽고, 남편을 뭣도 아닌 경박스러운 새끼라고 표현을 하면서 깔아뭉개지만, 이후에는 에효… 그립지나 말지… 하면서 남편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보인다. 또 기생집에 뉴페이스가 등장했다던데… 하면서 남편이 새로운 기생에게 빠질까 질투 어린 염려를 하는 허난설헌의 모습을 봐서는 물론 원망스러운 마음이 더 컸겠지만, 애정이 아예 없었던 것 같지는 않다.
하늘의 견우 직녀는 은하수가 막혔어도,
칠월 칠석 일 년 한 번 때 맞춰 만나는데,
우리 임 가신 후에는 무슨 약수가 가렸기에,
온다거니 간다거니 소식조차 끊어졌는가.
난간에 기대어서 임이 가신 데 바라보니,
풀잎에 이슬은 맺혀 있고, 저녁 구름이 흘러갈 때
푸른 대숲에서 우는 새 소리 더욱 슬프다.
세상에 서러운 사람 수없이 많지만,
박복한 젊은 시절을 나같이 보낸 사람이 또 있을까.
아마도 이 임의 탓으로 살 듯 말 듯 하구나.
규원가의 말미에서는 원망의 기색보다는 그리움의 기색이 훨씬 더 짙어지며 독자로 하여금 읽는 내내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서 모든 게 낯설고 힘든데…
그리고 아직 부모님이 그리운데…
곁에서 살뜰히 챙기지는 못할 망정 바깥에서 다른 여자들과 놀아나고 있으니… 이 나쁜 새끼! 하면서 쓰기 시작했을 규원가는 첫 부분은 다소 세다. 시를 쓰기 시작한 정확한 계기나 배경은 모르겠으나 추측해보건대
여느 날처럼 독수공방 하며 어두운 밤에 혼자 누워있으면서 속으로 ‘와… 김성립 또 안 들어와… 도대체 어디에 있냐… 새로 기방에 뉴페이스 왔다던데 걔 보러 갔나…? 이쁜가…? 와.. 진짜 겁나 안 오네…이 새끼… 내가 이러려고 시집왔나!!’ 하면서 생각하다가 하도 열이 뻗쳐 붓을 들었을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화를 억누르며 붓을 잡고 쓰기 시작하지만, 말미에서는 가상의 인물 견우와 직녀까지 부러워하면서 '쟤네들은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은 꼭 만나는데… 내 남편은 무슨 일이 있기에 이렇게 연락 조차 없어 나를 기다리게 해…'하며 구슬피 울며 남편을 그리워하는 가냘픈 여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허난설헌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허난설헌의 세 가지 한에도 나와있지만, 허난설헌에겐 자식이 없다. 그러나 허난설헌이 처음부터 아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세 번의 임신을 했다. 모진 시집살이를 견디며, 그래도 아이들만 바라보며 살려고 했지만, 하늘은 이 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두 아이는 어린 나이에 죽었고, 다른 한 아이마저 유산을 했다. 이러한 극도의 슬픔을 시로 표현한 것이 곡자다.
지난해 귀여운 딸아이 여의고
올해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 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마주하고 있구나.
사시나무엔 쓸쓸한 바람 불고
숲속 도깨비불 희미하게 빛나네.
종이돈 살라 너희 넋을 부르며,
무덤에 술잔 따르며 제를 올리네.
너희 넋이야 오누인 줄 알고
밤마다 서로 어울려 놀겠지.
비록 아기를 다시 가졌다고 한들
어찌 잘 자라길 바랄 수 있으리오.
부질없는 황대사를 읊조리다
애끓는 피눈물에 목이 메는구나.
곡자에서는 어머니로서의 허난설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아이들을 먼저 여이고 피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는 시다. 남편도 집에 들어오지 않고, 아이들마저 떠나보내고 나서 허난설헌은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규원가에서는 유년기 시절 썼던 시와는 사뭇 다른 슬픔과 그리움의 정서가 지배적이었다면, 곡자에서는 시를 읽는 나를 걱정스럽게 할 정도의 헤아릴 수 없는 애통함이 전해진다. 아이들을 연달아 잃고 허난설헌은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 또한 잃어버린 것 같다.
조선 시대 때 여자의 모습으로 태어나서 갖은 굴레에 갇혀 재능을 키우지 못했고, 원하지 않는 남자와 혼인을 하여 결혼 생활이 불행했고, 사랑과 행복의 감정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아이마저 연달아 잃으니 자신의 삶에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많은 불행이 찾아온다고 느꼈던 것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허난설헌은 27세의 이른 나이로 죽은 아이들의 곁으로 간다.
허난설헌에 관한 글을 쓰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이 떠올랐다. 여성에게 일방적인 희생과 순종을 요구하는 시대상에 맞서며 여성의 인권을 존중해달라고 온 삶으로 표현한 20세기 초 신여성이다. 부유한 가정 덕분에 어려서부터 재능을 마음껏 키울 수 있었던 나혜석은 서양화를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까지 가면서 당대 여성들과는 다른 행보를 걷는다.
그러나 나혜석 또한 결혼을 하면서 임신, 출산, 육아에 치여 자신의 예술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자 나혜석은 여성의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하는 조선시대의 가부장적인 모습들을 지적하는 글을 발표했다. 그러자 세상의 곱지 못한 시선들이 화살처럼 나혜석에게 꽂혔다. 나혜석의 진보적인 생각을 따라오지 못한 조선 사회와 가부장적인 결혼생활에 진저리를 느끼며 결국 나혜석은 이혼고백장을 발표했다. 한 남자의 아내와 자식들의 어머니로서의 삶이 아닌 예술가 나혜석의 삶을 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이러한 여성의 독립적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상이 팽배했기에 나혜석의 이런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선언은 사회의 따가운 시선과 낙인과 함께 그녀의 인생 말년을 너무 불행하게 만들었다. 나혜석은 너무도 고독하게 어느 한 병원에서 신원 불명의 여자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왠지 허난설헌과 나혜석이 하늘나라에서 만났다면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둘이 함께 만난 상상을 해보았다. 이승에서의 삶이 너무 슬프고 쓸쓸해서 서로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나혜석의 호방하고 진취적인 성격과 섬세한 예술혼이 허초희 눈에 띄었을 것이고, 나혜석 또한 자신의 삶의 애환을 시와 그림으로 승화하려 했던 조선 중기의 신여성 허초희에게 이끌려 “초희 언니 초희 언니”하며 잘 따랐을 것 같다. 이 둘의 재능과 능력을 품기에는 조선이라는 무대가 너무 비좁았다.
역사에 이런 여성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나와 같은 후대 사람들 입장에선 너무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그녀들 개인의 일생이 너무도 슬프고 외로워 허난설헌의 글과 나혜석의 그림을 즐기는 것 마저 미안한 생각이 든다. 자유롭고 공평하지 못한 시대가 이들의 능력과 재능을 폄하하고 인정하지 않았다.
허난설헌은 자신이 죽기 전 동생 허균에게 자신의 시를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불태우라고 했다. 자신의 흔적을 기막히게 원통했던 세상에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나혜석 또한 본인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그림들을 보관하던 창고가 다 불타버리는 바람에 많은 그림들을 잃었다. 자신의 분신과도 다름이 없었던 작품들이 이 세상에서 없어지면서 자신들도 삶을 마치기를 원했다. 자신과 예술을 동일시했던 이 아프도록 순수한 예술가들이 부디 하늘에서는 아무 굴레 없이 마음껏 본인들의 예술혼을 펼칠 수 있기를, 또 너무도 쓸쓸하고 험난했던 이승에서의 삶을 깨끗하게 잊고 서로 위로하며 지낼 수 있기를 바란다.
다음 편은 조선 3대 여류 시인: 황진이로 돌아오겠습니다.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간판 사진 thanks to 나의 벗 신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