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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ri Lee Apr 13. 2020

허 씨 집안에 신동이 났다!

조선 3대 여류 시인, 허난설헌 편 part 1. 

역사 공부를 하다가 남다른 여성 인물에 대한 기록을 보면, 골동품 가게에서 마음에 쏙 드는 빈티지 물건을 찾았을 때와 같은 기분이 든다.  


대학 시절부터 사귄 절친한 친구 성경이와 함께 여행을 가면 꼭 동네 골동품 가게를 구경하러 간다. 

골동품 가게 특유의 나프탈렌 냄새가 처음엔 조금 힘들지만, 가게 구석구석에 있는 세상 신기한 물건들을 보다 보면 코가 금세 나프탈렌 냄새에 적응을 한다. 


내가 제일 마지막에 가는 곳은 쥬얼리 섹션이다. 

요즘의 세련되고 매끈한 쥬얼리와는 다른 그만의 독특한 색과 모양의 쥬얼리들을 보는 것이 무척이나 재밌다. 그중에서 가끔 정말 마음에 드는 것을 보면 진짜 두근두근 설렌다. 

오랜 시간 동안 나에게 발견되기 위해 기다려준 것 같아 반갑고 고마운 마음마저 든다.  


역사 공부를 할 때 만나는 여성 이야기가 나에겐 그런 느낌이다. 

역사 속 수많은 이야기들이 다 신기하고 의미 있지만, 차지하는 부분이 작디작아 찾기에는 쉽지 않았지만, 막상 찾고 나면 내 마음에 콕 박혀 결국 집에 들고 오는 빈티지 쥬얼리처럼, 오랜 시간 물고 늘어져 공부를 하게 되는 역사가 여성이 등장하는 부분이다. 

특히 조선시대와 같이 여성의 사회 참여가 어려운 시기를 공부하다 보면 더더욱이 그렇다. 

마치 나의 발견을 기다려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이번 편부터는 조선 시대 3대 여류 시인에 대해서 다루려고 한다. 

그중 첫 번째가 허난설헌이다.       


허난설헌의 시는 정말 익숙하다.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규원가와 곡자를 배운 적이 있다. 

고등학교 때는 당장 시험을 봐야 했기 때문에 글을 제대로 음미하기도 전에 다 헤집어 놓고 시작을 해서 은유법, 비유법, 설의법, 또 어떤 단어가 무엇을 상징하고, 어떤 효과를 주는지를 달달 외우고 있을 뿐 글들을 통해 허난설헌의 인생을 제대로 살펴볼 기회는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허균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고, 허난설헌의 시를 다시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규원가와 곡자를 포함해서 난설헌이 여덟 살 때 지었다고 하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도 살펴보았다. 규원가와 곡자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어, 다른 사람이 쓴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번 편부터는 허난설헌의 짧은 27년의 인생을 그녀의 3가지 대표적인 시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 <규원가>, <곡자>를 통해 허 씨 가문 막내딸로서의 난설헌, 부인으로서의 난설헌, 어머니로서의 난설헌의 모습들을 나눠 살펴보려고 한다.       


오늘은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을 통해 허 씨 가문 막내딸로서의 난설헌의 모습을 만나 볼 것이다. 




허난설헌은 조선 중기에 아버지 허엽과 그의 둘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허초희이고 난설헌은 그녀의 호다.  


아버지 허엽은 당시 유명한 유학자였다. 

허엽은 (내가 황진이로 더 잘 아는) 화담 서경덕의 제자였다.

(황진이는 허난설헌 다음 편에 다룰 예정)


허엽은 일찍이 첫 번째 부인과 사별했다.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는 두 딸과 난설헌의 이복오빠 허성이 있고, 곧 새 장가를 들어 난설헌의 오빠 허봉, 난설헌, 그리고 막내 허균을 낳았다. 

아버지 허엽의 호가 초당이어서 이 집안을 초당 허 씨 집안이라고들 불렀다. 

(강릉 허난설헌 생가를 가면 초당 순두부 집이 즐비하다).  


초당 허 씨 집안은 당대 허 씨 5 문장이라고 불릴 만큼 집안에 문장가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했다. 

아버지 허엽을 비롯해 이복 오빠 허성, 친오빠 허봉, 허초희 (난설헌), 그리고 허균 까지 당대 글 잘 쓰고 정계에 진출한 똑똑이들을 대거 배출한 집안이라 당시 강릉 초당 허 씨 집안은 조선 중기의 스카이캐슬 정도 되었으리라.  


허 씨 집안의 이런 문장가들이 대거 탄생하게 된 데에는 단연 아버지 허엽의 역할이 컸다. 

당시 조선 시대 때는 여성이 이름조차 제대로 갖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요즘 이름들과 비교해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오히려 아주 세련되고 예쁜 초희라는 이름을 난설헌에게 주고, 사랑을 듬뿍 주며 허초희를 교육시켰다. 


아버지 허엽의 열린 사고는 스승 서경덕의 영향이 컸을 듯싶다. 서경덕은 인간과 자연, 남자와 여자를 평등하게 보고 대하는 도가 사상에 심취한 시대보다 앞서 나가는 깨인 지식인이었다. 그런 서경덕 밑에서 자연히 도가 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허엽 또한 비록 딸이지만 초희에게도 아들과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주며 초희의 재능을 키워주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초희의 오빠 허봉도 동생 초희를 아주 예뻐라 하고 여동생의 재능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오빠 허봉 또한 남다른 인재여서 (유전자의 힘이란…) 어린 나이에 대과에 급제를 하고, 자신의 동생 허초희와 허균을 손곡 이달에게 맡기며 문학 수업을 받게 했다. 


손곡 이달은 당대 손꼽히는 시인이었고, 나중에 허균이 홍길동 전을 쓸 때 많은 영감과 영향을 준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이렇게 이달은 능력이 뛰어났지만, 어머니가 양반이 아니라 관직 진출이 막힌 서자였다. 그래서 그는 재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였다. 당시 서자에 대한 멸시와 차별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허봉은 이달의 능력만을 보고 자신의 동생들의 선생으로 이달을 택했다.  


어린 시절부터 이달 밑에서 수학한 초희와 균은 이달의 문장 실력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신분제로 인해 그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스승을 보며 조선시대 부조리한 현실들을 절실하게 느꼈을 듯싶다.  


어릴 적부터 남다른 허초희의 문장 실력을 보여주는 산문이 있으니, 그게 바로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이다. 

허난설헌이 여덟 살의 나이에 이 글을 짓고 나서 허 씨 집안에 신동이 났다! 는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  


어영차 동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새벽에 봉황 타고 요궁에 들어가 날이 밝자 해가 부상 밑에서 솟아올라 일만 가닥 붉은 노을 바다에 비쳐 붉도다. 
어영차, 남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옥룡이 하염없이 구슬못 물 마신다. 은평상에서 잠자다가 꽃그늘 짙은 한 낮에 일어나, 웃으며 요희를 불러 푸른 적삼 벗기네. 
어영차, 서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푸른 꽃 시들어 떨어지고 오색 난새 우짖는데, 비단 천에 아름다운 글씨로 서왕모 맞으니, 날 저문 뒤에 학 타고 돌아가길 재촉한다. 
어영차, 북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북해 아득하고 아득해 북극성에 젖어 드는데, 봉새 날개 하늘 치니 그 바람 힘으로 물이 높이 치솟아 구만리 하늘에 구름 드리워 비의 기운이 어둑하다. 
어영차. 위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세부적인 뜻은 다 모르고 형태만 보더라도 여덟 살 아이가 지었다고 하기엔 오늘날로 하면 라임도 딱딱 맞고, 표현력이며 어휘력이며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가 않다.  


난설헌이 이 산문을 만들게 된 배경을 알면 더 재미있다.

일단 상량문이라고 하는 것은 집을 새로 짓거나 수리하게 되면 그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적어두는 이다. 

새로 짓게 된 이유나 어떻게 지었는지 등을 날짜와 시간에 맞춰 상세히 써서 집을 다 짓거나 고치고 나면 마루에서 올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걸어 뒀다고 한다. 양반집들은 자신의 집에 걸릴 상량문을 당대 명문장가에게 써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또 상량문을 올리는 날에는 성대한 상량 고사를 지냈으며 이를 상량식이라고 하였다. 즉, 상량문은 그냥 아무개가 아무 때나 와서 “아무개 집 이렇게 고쳤음”써서 아무렇게나 올려두는 것이 아닌, 누가 우리 집의 상량문을 써주느냐 또 어떻게 쓰였느냐가 그 가문의 자존심이 걸린 아주아주 중요한 글이다.  


자, 상량문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쯤 해두고, 여기서 나오는 광한전은 하늘나라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문학 시간 사미인곡을 배울 때 ‘광한전,’ 동그라미 ‘하늘나라’ 이렇게 배운 주입식 교육이 그래도 도움이 될 때도 있구나)


자 그래서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이라 하면, 하늘나라에 새로 지은 궁전백옥루를 위해 지은 상량문 정도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즉, 이것은 상상 속의 건물이다. 하늘나라에 새로 생긴 백옥루라고 하는 아름다운 궁전을 기념하고 상량 고사를 지내기 위해 많은 신선들이 다 같이 모인 그림을 머릿속으로 상상을 해보면 좋겠다. 


허난설헌이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을 짓게된 배경은 하늘나라 신선들이 궁궐을 멋지게 지었지만, 상량문을 지을 문장가가 없자, 허난설헌을 초대해서 상량문을 짓도록 한 스토리라고 생각하면 쉬울 듯하다. 


즉, 인간 세계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늘나라 파티에 신선들 조차도 쉽게 지을 수 없는 백옥루의 상량문을 여덟 살 꼬마 허난설헌에게 부탁을 했다고 스스로 상상을 하고 지은 글이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인 것이다. 


이런 축하 파티가 하늘나라에서 열린다고 상상을 한 것도 대단하고, 신선세계에서 조차 감히 지을 수 없는 글을 여덟 살 자신이 할 수 있어 초대받았다는 저 자신감과 패기는 유년시절 아주 당차고 똘똘했을 허초희를 상상하게 한다.  


내용 또한 상량문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고 지었고 포랑의 동서남북과 상하의 여섯 대들보가 묘사된다는 점 그리고 신선들의 생활이 디테일하게 묘사된다는 점이 보통 여덟 살의 관찰력과 상상력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쉽게 뛰어넘지 못하는 남녀 구별과 당시 조선시대의 갖은 굴레들을 훌훌 떨치고 스스로를 신선세계에 초대해서 자신의 글이 하늘나라 궁궐의 상량문으로 쓰이는 상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허엽과 오빠 허봉의 격려와 사랑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듯싶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대담함, 상상력, 창의력, 자신감, 뛰어난 문장실력을 두루 갖춘 허초희가 오늘날이었으면 일찍이 영재 발굴단 같은 곳에 출연해 지금쯤 최연소 작가로 이미 등단을 하고도 남았겠지만, 이런 당돌한 초희도 조선시대의 결혼이라고 하는 사회적 굴레 속에서 천부적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접어야 했다. 그리고 27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그만 이승을 떠난다. 아마 마음의 병이 들어 더 이상 삶을 연장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15세에 결혼을 하면서 자신의 꿈을 접어야 했던 초희는 아마 자신이 쓴 상량문이 걸린 광한전 백옥루에 하루빨리 가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다음 편에는 허난설헌 2부: 규원가로 찾아오겠습니다. 


오늘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간판 사진 출처: 허난설헌 생가의 사진을 제공해준 나의 벗 신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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