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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ri Lee Apr 11. 2020

왜 우례는 죽어야만 했는가

Legend of Chuncheon 3. 효자동 & 죽림동

나는 첫 만남 때 종종 “근데 이름이 무슨 뜻이에요?”라는 질문을 한다.  

부모님이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제일 먼저 선물하는 게 이름이다. 

짧은 몇 글자 안에 장차 자녀가 어떻게 자랐으면 좋겠다 하는 부모님의 바람을 응축해서 만들었기에 이름의 뜻을 알게 되면 그 집안의 가치관이나 부모님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대강 알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내 본명이 무척 마음에 든다. 엄빠 잘했어~~) 


사람 이름이 그러하듯, 지역명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흔히 주소를 쓸 때 말고는 딱히 쓸 일이 없는 지역명이지만, 그 지역의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선조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유교 국가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일컫는 “충”은 오늘날 일상생활에서 강조되지 않지만,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를 일컫는 “효”는 오늘날에도 우리 생활에 깊숙하게 자리 잡아 중요시되고 있는 유교적 가치관이다. 

그래서 전국에 효자동이 그렇게 많은 것 같다.  


춘천에서 자란 나는 춘천에만 효자동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역명에 대해서 생각해보다 보니, 당시 라는 가치관이 지역 경계를 뛰어넘어 중요시되었다는 생각에 분명 다른 지역에도 효자동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효자동”을 검색해보니, 역시나 춘천뿐만이 아니라 전주, 포항, 서울 아주 곳곳에 있었다. 장담하건대,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북한에도 “효자동”이 몇몇 군데 있을 거다.  


나는 오늘 춘천시 거두리에 있는 효자동에 관한 전설을 풀어보려고 한다.    



  

오늘날 효자동에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 사는 총각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병환으로 누우시게 되었다. 총각은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 드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는데, 어머니의 병세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간호에 밤낮이 없었던 총각은 어느 날 너무 지친 나머지 어머니 옆에서 그만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총각의 꿈에서 기묘하게도 구름이 몰려왔다가 흩어지며 그 자리에 흰머리를 휘날리는 어떤 신령 같은 모습의 할아버지가 등장해 말하기를 대룡산 한번 가봐. 거기 골짜기에 시체 세 구가 있을 텐데, 시체 중에 가운데 시체의 목을 잘라다가 푹 고아서 어머니한테 드려봐” 하고 사라졌다. 

꿈이 너무 섬뜩해서 총각은 놀라 잠에서 깼다.  


꿈이 하도 선명해서 총각은 그날 저녁 날이 어둑어둑 해졌을 때 꿈속 할아버지가 말한 대룡산 골짜기를 갔다. 

갔더니 정말 꿈에서 들었던 대로 시체 세 구가 놓여있었다. (납량특집이야 뭐야)  

총각은 무서운 줄도 모르고, 꿈이 맞았다는 설렘과 어머니를 빨리 낫게 해드리고 싶다는 마음에 가운데 시체의 목을 잘랐다. 그리고 그것을 싸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가마솥에 넣고 푹 삶았다. 


시체 머리를 삶은 물을 떠다가 어머니께 드렸더니 어머니의 얼굴빛이 갑자기 좋아지면서 병세가 호전되는 것이 보였다. 총각은 정말 신기해서 다음날 가마솥을 다시 열어보니 시체 머리 대신에 산삼 뿌리가 그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춘천시 동내면 거두리가 그때 그 총각이 시체의 머리를 들고 온 곳이다. 그래서 거두리가 들 에 머리 , 즉, (총각이) (시체의) 머리를 들고 온 이라는 의미의 지명이 되었다…. 

(다음에 거두리 갈 일 생기면 등골이 오싹해질 것 같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기운을 차린 어머니는 이제 막 뭐가 드시고 싶으셨나 보다. 그래서 아들에게 딸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총각은 다시 대룡산을 찾았다. 그러나 그 당시 비닐하우스가 있던 것도 아니고, 한겨울에 딸기를 찾을 리 만무했다. 산골짜기에는 그저 눈보라만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총각이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을 때, 저 멀리 다홍빛 뭉텅이가 환상처럼 아른거리는 것이 아닌가! 총각이 눈을 다시 크게 뜨고 그곳으로 다가가 보니 그것은 바로 딸기였다. 총각은 딸기를 따고 빨리 어머니께 가져다 드리려고 신나게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워낙 날도 깜깜하고 눈보라가 거세게 치는 바람에 총각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길을 헤매고 있을 때 호랑이를 맞닥뜨렸다. 총각은 순간 너무 무서워 몸이 굳어버렸다. 

그러나, 그 호랑이는 사납게 총각에게 덤비는 대신, 온순한 몸짓으로 총각 앞에 와 납작 엎드려 자기 등에 올라타라는 시늉을 하였다. 총각은 너무 무서웠지만, 별 다른 방도가 없어서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그러자 호랑이가 길을 찾아 총각을 집까지 데려다주고는 다시 사라졌다.  


이러한 일이 알려지자 나라에서는 이 총각의 효심에 천지만물이 감복하여 도왔다고 생각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총각이 사는 마을에 효자 정문을 세워 표창을 했다. 그 후 사람들은 그 마을을 효자문 거리라고 불렀고, 이것이 나중에 효자동이 된 것이다.      




이 전설을 알고 해피엔딩으로 끝나 기쁜 마음도 있었지만, 효도는 뭐 아들만 하나?라는 마음이 들었다. 

효도는 아들딸 할거 없이 다했을 테고, 분명 딸에 관련된 전설도 있을 것 같아 찾아보니, 

역시나~~ 효녀에 관련된 전설도 있었다. 

춘천시 죽림동의 지역명은 효녀 우례와 관련되었다.  


이야기는 신라 시대로 거슬러 간다. 

오늘날 춘천 땅에 우례 모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산에 나물을 캐러 갔는데 갑자기 천둥이 치고 번개가 일어나면서 비가 마구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지나도 비는 더욱 거세질 뿐 어머니가 돌아오시지 않자 우례는 어머니가 너무 걱정이 되었다.  


한편 산속으로 나물을 캐러 간 어머니는 비를 피하기 위해 한참을 헤매었다. 나물바구니를 옆에 끼고 미끄럽고 험난한 산비탈을 헤매다가 그만 칡넝쿨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때 하필 바위가 굴러내려 쓰러진 어머니를 쳤고, 우례 어머니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소식도 모르는 채 넋 놓고 기다릴 수 없었던 우례는 직접 어머니를 찾아 나서기로 마음을 먹고, 폭우를 뚫고 골짜기 곳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날이 새도록 우례는 어머니를 찾을 수 없었다.  


새벽녘 새소리에 정신이 퍼뜩 든 우례 어머니는 사방을 둘러보다가 자기 옆에 우례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흔들어 깨우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우례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두 모녀가 극적으로 상봉하여 감동에 겨워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우례는 상처로 온 몸이 피범벅이 된 어머니를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례는 그날부터 바느질과 품팔이를 하면서 어머니 병간호를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하셨다. 우례는 어머니를 밤낮으로 간호하다 (효자동 효자처럼…)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꿈속에 어떤 백발의 신령이 나타나 말하기를 남쪽 서라벌(오늘날 경주)에 가면 인삼이라는 좋은 약이 있으니, 일 첩만 다려 드리면 어머니가 쾌유하실 것이다.” 


이튿날 우례는 서둘러 서라벌로 떠났다. 

서라벌의 약방이란 약방은 다 뒤졌지만, 인삼 값이 너무 비싸서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그러자 어떤 한 약방 주인이 서라벌의 어느 귀인이 죽어가는데 그 영혼을 시중들 처녀를 찾나 봐. 그 집에 가서 순장(생매장)을 승낙하면 인삼을 줄 거야”라고 했다.  


우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방법만이 어머니를 낫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우례는 약방 주인이 가르쳐준 집에 찾아가 순장을 승낙하고 인삼 열 첩분을 얻어 (이게 목숨 값인가…) 어머니께 보냈다. 

그리고 우례는 순장되었다.  


인삼을 받아 다려 먹은 우례 어머니는 몸이 곧바로 좋아졌다.  

우례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모르는 어머니는 우례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기다리다 지친 어머니는 결국 실성하고 말았다. 우례 없이는 자신도 이 세상에 살 이유가 없다고 느껴져 어머니는 그만 집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서 타 죽고 말았다.  


그 후 불 탄 자리에 죽순 하나가 솟아났다. 그리고 그곳에 점점 대나무가 퍼지면서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동네 사람들은 이 대나무가 우례의 애절한 효성이 환생한 거라고 믿었다. 

이곳이 바로 오늘날의 죽림동이다.        




죽림동 우례와 효자동 총각 전설의 “기승전” 은 일치한다.  

어머니가 아프시고, 밤샘 간호를 하다가, 잠이 들어 신령을 만났고, 그래서 어머니의 약을 구하러 떠난 부분까지는 똑같다. 그런데 효자동 전설은 총각이 약을 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효자동 전설은 총각의 효심에 감동한 호랑이까지 등장시켜 이 효자를 추켜세운다. 학교 문학 시간에 이와 같은 호랑이를 조력자라고 하며 주인공의 행복과 위기 극복을 위해 등장하는 것으로 배웠다. 나라에서는 효자 정문까지 세워주고, 그 후 효자는 어머니와 행복하게 살았겠지.  


그러나 죽림동 우례는 단순히 골짜기를 가서 산삼을 구해오는 게 아니라 서라벌까지 가서 자신의 목숨 값과 맞바꿔 어머니의 약을 구해야 했다. 죽림동 전설 어디에도 우례의 행복을 바라는 조력자는 등장하지 않았다.

왜. 왜. 우례는 죽어야만 했는가.  


왜 여성의 효성은 죽음으로만 표현해야 했는가. 

우례의 죽음이 진정한 였는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의문이다. 

우례 어머니가 원했던 거는 딸의 목숨 값으로 얻은 약이 아니었다. 

잠깐 기운을 차렸지만 딸이 돌아오지 않자 결국 실성해 죽고 만다.  


우례 전설을 공부하면서, 심청이가 떠올랐다. 

아버지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인당수에 뛰어들지만, 심청이 아버지는 딸이 죽고 눈을 뜨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주저앉아서 엉엉 운다. 딸의 목숨 값으로 살게 된 우례 어머니와 심청이 아버지는 딸의 죽음을 진정한 의미에서 효로 받아들였을까?  


내가 너무 비약하는 거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지역명에 얽힌 와 관련된 전설들을 비교하면서  못지않게 당대 사회에 팽배했던 남존여비의 사회상을 느끼게 되었다. 


조선시대 때 여성이 자신의 행적을 인정받고 국가 표창을 받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여성의 국가적 표창의 대표적인 예가 열녀비다. 조선시대 때 세워진 열녀비들은 해당 여성이 이미 세상을 뜨고 난 이후에 세워졌다. 지아비가 세상을 먼저 떠나고 나서 다시 재가를 하지 않고 한 평생 지아비를 그리워했던 여성 혹은 먼저 간 지아비 외로울까 스스로 자결하여 따라간 그런 여성을 국가에서 보고 배우라고 열녀비를 세웠다. 지조와 절개를 여성에게만 강요했다. 남성이 지조와 절개를 지켰다고 국가에서 표창한 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다. 


또한 부모에게 효성을 보여주기 위해 남성은 목숨을 내놓지 않아도 국가에서 알아서 효자 정문을 세워줬지만, 우례의 죽음 뒤에는 비극만 남았다. 국가는 우례를 위해 효녀 정문을 세워주지 않았다. 지역명 또한 “효녀동” 혹은 “우례동”이 아닌 죽림동으로 남았다. 이름만 봐서는 효녀 우례의 행적을 전혀 알 수 없는 지명으로...  


구전되어오는 전설이나 이야기들 중에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다소 불편한 감정이 들게 하는 부분들이 있다.  


청평사에 관한 전설(Legend of Chuncheon 1화 참고)을 봐도 이건 분명 데이트 폭력인데, 이 모든 이야기를 아름답게 뱀의 입장에서 미화한 것이 난 아무래도 불편했다. 또 이번 편의 이야기처럼 효자는 어머니를 공경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을 했고 그 대가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효녀는 어머니를 공경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선 죽음을 택해야 했고. 그에 대한 대가는 없었다.  


‘옛날이야기니까~ 전설일 뿐이니까~' 하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물론. 

그러나 한 번쯤 생각해볼 문제이기도 하다. 

“예전엔 다 그렇게 살았어~” 하고 덮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예전에 다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괜찮아’와 예전에 그렇게 살았지만, 이건 시대착오적 생각이야’는 정말 다른 결과를 낳는다. 전자는 반성과 회고가 없기 때문에 이전부터 행해오던 잘못된 가치관과 사고방식들이 후대에도 그대로 답습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후자와 같이 분명한 고찰과 반성이 있다면 비판적 의식이 형성되어 잘못된 관습이나 생각을 끊어내고 바른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내가 뭐 이제 와서 지명을 바뀝시다! 죽림동이 아닌 우례동으로 바꿔요 바꿔! 심청이 살려내!라는 무리한 주장을 펴는 게 아니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비판적 생각 없이 전통이라는 혹은 미덕이라는 프레임으로 21세기의 우례들을 만들어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하고 있는 게 아닌가 겁도 나고 우려스러워 이런 이야기를 풀어봤다. 


효자와 효녀는 계속되어도 우례가 계속될 필요는 없다.



간판 사진 thanks to 나의 벗 신혜인


다음 주에는 조선 3대 여류시인, 허난설헌 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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