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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ri Lee Apr 20. 2020

녹수도 청산 못 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조선 3대 여류 시인: 황진이 part 2.

서경덕은 조선 중기 학덕과 인품을 모두 겸비한 학자로 유명하지만, 서경덕을 더 유명하게 한 인물은 황진이가 아닌가 싶다. 마음만 먹으면 30년 불공을 쌓은 스님도 파계시키고 왕족도 말에서 떨어뜨리게 할 정도로 조선 팔도 남자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한 황진이에게 유일하게 넘어가지 않은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화담 서경덕이다. 

(근데, 또 서경덕이 이후 황진이를 생각하면서 썼다는 시조를 보면 완전히 안 넘어갔다고 말하기는 조금 애매한 것 같기도 하지만 뭐…) 

도도한 황진이가 서경덕의 성품을 의심했던 마음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도리어 서경덕을 존경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화담이 가히 다른 남자들과는 달라도 엄청 달랐음을 증명한다. 


서경덕은 워낙 학식이 뛰어난 인재였지만, 정계에 진출하기를 꺼리고 그저 학문을 닦으며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그래서 늘 서경덕의 집에는 그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는 제자들이 몰려들었고, 그중에는 우리가 이미 허난설헌 편에서 다뤘던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도 있었다. 무튼 서경덕의 명성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서경덕은 신분을 막론하고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자로 받아들였다. 


서경덕의 인품에 대한 소문도 당시 자자했다. 출신이 천하다고 해서 얕잡아보는 법이 없었다. 

(이 또한 허난설헌 편에서 알 수 있듯 ) 도교에 심취해 있던 서경덕은 도교에서 강조하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여자와 남자는 모두 동등하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남존여비가 팽배하던 시대에도 여성을 함부로 대하는 일이 없었다. 이러한 서경덕의 유별남이 황진이의 귀에도 들어갔다. 황진이는 이 유명한 작자를 직접 만나보고 싶기도 하고 정말 이 고고한 학자가 그냥 겉으로 그러는 척하는 건지 아닌지 테스트를 해보기 위해 서경덕을 다음 타깃으로 고르고 접근한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야사가 섞여있을 수 있다는 점 또다시 주의해 주세요^^)


황진이는 일부러 비 오는 날 어둑할 때에 서경덕을 찾아간다. 흠뻑 젖은 채로 서경덕의 집을 찾은 황진이는 오들오들 떨면서 비 좀 피하고 옷을 말리고 가도 되겠냐고 묻는다. 젊은 처자가 아닌 밤중에 흠뻑 젖어 오들오들 떨고 있으니 측은지심이 발동한 탓일까 서경덕은 어서 들어오라고 한다. 


황진이는 ‘오케이, 됐어. 집에 들어오라고 한 거면 된 거야’라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황진이는 서경덕 방에서 옷을 말리며 갖은 교태를 부리며 관심을 끌지만 서경덕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책을 읽어 나간다. 


옷이 다 말라가고 이대로는 아무 소득도 없이 그냥 돌아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급해진 황진이는 급기야 아픈 척을 한다. 당황한 서경덕은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이불을 펴주고 황진이를 눕힌다. 이불도 하나밖에 없고, 자기 같은 어여쁜 여자가 흠뻑 젖은 채로 누우니 서경덕이라고 별 수 있겠어? 하고 누워서 서경덕이 언제 넘어오나… 속으로 기다리지만, 역시나 서경덕은 꿈쩍도 않고 계속 책을 읽는다. 


기다리다 지친 황진이는 진짜 잠이 들어버렸다. 다음날 새소리에 일어난 황진이는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옷은 잘 말라 있고, 이불도 잘 덮여 있고, 지난밤까지 서경덕은 계속 책을 읽은 모양이고…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깨닫고 놀란다. 그렇게 황진이가 상황 파악을 하고 있을 때 서경덕이 황진이를 위해 아침밥을 차려 들고 오면서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일어난 것이오? 몸은 좀 괜찮소?” 하는 게 아닌가!


황진이는 자신같이 천한 기생을 위해 서경덕같이 대단한 사람이 하나뿐인 이불도 내어주고 살뜰히 보살피고 아침밥까지 손수 차려오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그전에 서경덕의 진심을 의심하고 테스트해보려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서경덕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자신을 제자로 받아달라고 한다. 


그렇게 서경덕과 황진이는 스승과 제자 사이로 발전되었고,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인성의 본질, 인간의 참된 삶과 사랑을 배웠다. 황진이는 자신을 동등한 인간으로 예우해주는 서경덕에게 사랑을 넘은 존경심이 생겨났다.


그렇게 황진이는 서경덕 집에 드나들며 공부를 하다가 생활이 바빠졌는지, 점점 가는 날이 뜸해졌다. 매일 같이 보던 정든 진이가 오지 않자 서경덕은 자신도 모르게 황진이를 기다리며 자꾸만 문 밖으로 나가 ‘진이가 언제 오나~’ 기다렸다. 바깥에 낙엽 굴러가는 소리만 나도 진이의 발자국 소리인가 하고 얼른 문을 열었다가 실망한 채로 닫기를 반복하다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귄가 하노라


(현대어 풀이)
마음이 어리석은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석다
구름이 겹겹이 쌓인 산에 어느 임이 오겠냐마는
떨어지는 잎 불어오는 바람에 행여 그 사람인가 하노라


황진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절절히 담긴 시다. 초장에서 마음이 어리석은 후이니에 담긴 의미는 진이를 곁에 두고 싶어 했지만, 진이가 떠난다고 했을 때 자신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하고 어리석게 그냥 가게 내버려 두어 이토록 그리워하게 되었다며 자신을 자책하는 모습이다. 그렇게 진이가 휙 떠나고 나자 일이 손에 안 잡힌다… 라는 한탄도 섞여있다. 


중장에 구름이 겹겹이 쌓인 산이 뜻하는 것은 그만큼 장애물도 많아서 진이가 자신에게 오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게 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떨어지는 잎 불어오는 바람 소리에 '혹시 진이인가?' 하는 괜한 희망과 헛된 바람이 자꾸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와 같이 스승과 제자의 사이였지만, 철저히 “나는 선생이고, 너는 학생이야!”와 같은 관계가 아닌 약간의 썸 비스무리한 상태로 서로를 동경하고 흠모하는 관계가 지속되었던 것 같다. 


황진이는 자신이 흠모했던 서경덕이 죽고 나자 슬퍼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임의 정이요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변할 손가
녹수도 청산 못 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현대어 풀이)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네.
녹수가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하겠는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면서 흘러가는고.


풀이를 해보자면, 나의 마음은 청산과 같고, 임의 마음은 푸른 물과 같아서, 임의 마음이 물처럼 흘러가 나를 떠나간다고 할지라도, 나의 마음은 부동의 산과 같아서 변치 않는다. 

즉, 임은 혹 나를 잊어도, 나는 절대 임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의 시이다. 


서경덕이 죽고 난 뒤 황진이의 슬픔과 애틋한 마음을 담아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시에 인물들을 대입해보면, 서경덕은 이승을 떠나 하늘나라에 가서 자신을 잊어도, 황진이는 서경덕을 향한 사랑이 변치 않을 것이라는 것을 청산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시의 종장이 나에겐 킬링 파트다.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면서 흘러가는고에서 황진이의 완전 인간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내가 진이 언니에게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

임의 사랑이 물처럼 흘러가버리더라도 꼭 임도 나처럼 자신과의 헤어짐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기 바란다는, 상대방도 나처럼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렸으면 하는 황진이의 복잡하고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의 여주인공처럼 님이 떠나는 와중에도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부디 잘 가시옵소서”하며 손수 꽃길까지 만들어주고, 내 마음도 함께 즈려밟고 가라는 그런 순종적이다 못해 철저히 나 자신을 죽이고 님의 행복만을 바라는 가련한 (그리고 답답한) 유교적 여성상이 아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당신이 이승을 떠나도 변하지 않을 것이나, 그래도 당신도 떠나면서 나와의 헤어짐이 슬퍼 울길 바란다와 같은 솔직하고 인간적인 표현이 감정 절제를 강조하는 조선시대에서 황진이의 시를 훨씬 더 빛나고 돋보이게 하는 것 같다. 


청산은 내 뜻이요를 읽고 풀이를 하면서 떠오른 노래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 노래를 진이 언니께 바치며 조선 여류 3대 시인, 황진이 편을 마치려고 한다. 

안예은, 달그림자 큐.


 당신의 첫 눈길이 내게 닿았을 때
 천둥이 치는 듯이 가슴이 떨렸고
 당신의 첫 손길에 내가 닿았을 때
 번개가 치는 듯이 온 몸이 저렸어
 
 당신의 그 온기가 내게 닿았을 때
 꽃잎이 내린 듯이 세상이 밝았고
 당신의 빈 자리에 내가 닿았을 때
 나의 세상은 더는 내게 없어
 
 그리운 나의 사람 나의 해와 달아
 다시 볼 수 없음에
 잡을 듯 잡을 수 없는 꿈결같은 사람
 오늘도 울다 지쳐 잠이 든다

https://www.youtube.com/watch?v=stwyvOhWaY0

    



다음 편은 조선 3대 여류 시인: 매창 이계랑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오늘도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간판 사진 thanks to 나의 벗 망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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