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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준영 Nov 13. 2020

르네상스 미술과 콘도띠에리3

가타멜라타와 콜레오니의 청동 기마상

  르네상스 시대에는 한동안(특히 초기일수록) 미술에서도 조각이 회화보다 높이 평가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조각에서도 제작 기술의 난이도와 재료의 가치에 따라 일종의 서열이라 할 통념 같은 것이 있었는데, 이에 따르면 최상급의 작품으로 인식되던 것이 청동 조각(부조 아닌 환조)이고 그 다음이 대리석 조각이었다. 따라서 르네상스 시대에 만들어진 청동 조각은 대개 널리 실력을 인정받는 대가들이 의뢰받아 제작한 작품일 수 밖에 없었고 그만큼 귀했다.

  앞선 글들에서 고대와 중세에 황제 같은 지체높은 인물들의 초상에만 허락되던 기마 인물상이라는 형식이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 그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초상 제작에도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왜 초기에 나타난 이런 '범부'들의 기마 인물 초상에는 청동상이 없을까? 바로 당시 사람들의 미술품에 대한 이런 서열 관념 때문이다. '필부'들에게도 황제 같은 포즈(말을 탄 자세)로 묘사되는 건 허용됐지만 황제와 똑같은 최상의 재료와 기법(청동상)으로 기념되는 것은 그만큼 쉽사리 허용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번 글에서 다룰 내용은 바로 서양 미술사상 고대 이후 최초인(그리고 여전히 가장 대표적인) 이런 '필부'를 모델로 한 청동 기마상 두 점인데, 도나텔로(Donatello)의 <가타멜라타 기마상>과 베로끼오가 제작한 <콜레오니 기마상>이다. 회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작품 모두 모델이 된 인물은 용병대장들이었고, 30여 년의 시차가 있지만 공교롭게도 둘 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의뢰로 만들어졌다. 다시 말해, 가타멜라타와 콜레오니 두 사람은 베네치아에 고용됐었고 공화국이 그들의 서비스에 크게 만족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청동 기마상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어떻게 까다롭기로 유명한 베네치아를 만족시켰는지 우선 이 두 콘도띠에리의 경력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가타멜라타 초상화(판화, 좌)와 도나텔로가 제작한 그의 기마상 중 얼굴 부분(우)

  도나텔로 기마상의 모델인 가타멜라타(Gattamelata)의 본명은 에라스모 다 나르니(Erasmo da Narni 1370-1443)로 움브리아 출신 제빵사의 아들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크게 성공한 용병대장들 가운데 귀족이나(최소한 한미한 기사 또는 몰락한 귀족)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있는 집안 출신이 아닌 경우는 의외로 드문데 가타멜라타는 그 몇 안되는 성공한 진짜 흙수저 중 한 사람이었다. 가타멜라타(Gatta+melata. 영어로는 honeyed cat 꿀바른 고양이)라는 기이한 별명의 기원을 두고 여러가지 설들이 있으나 가장 그럴사한 것은 그의 성격과 어머니의 결혼 전 성이 합쳐져 만들어졌다는 설명이다. 이에 따르면 에라스모는 군인답지 않게 평소 말투와 태도가 나긋하고 부드럽지만 전장에 나가면 교활한 두뇌회전과 치밀한 전개로 가차없이 적을 공략하는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의 모친 이름 가텔리(Gattelli)에서 연상되는 애교넘치는 맹수 고양이(Gatta/Gatto) 같다는 뜻으로 그런 별명이 생겼다고 한다. 에라스모 본인도 이 별명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한 때 자신의 문장(coat of arms)에 노란(꿀색) 바탕색과 고양이를 추가해 사용하기도 했다.

  아무튼 젊은 시절 체끼노 브롤리아(Cecchino Broglia di Chieri, ?-1400) 밑에서 군인 생활을 시작한 에라스모는 능력을 인정받아 희대의 풍운아 브라치오 다 몬토네(Braccio da Montone, 1368-1424) 부대의 중견 지휘관으로 옮겨간다(1416). 이 때부터 수 년간 몬토네를 따라 여러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하며 전공과 명성을 쌓아가지만, 1424년 몬토네가 아퀼라 전투에서 패하고 전사하자 잔여 병력 일부를 수습해 용병대장으로 독립한다. 이후 피렌체와 계약하고 밀라노에 대항한 전쟁에 참전했다.

  가타멜라타가 용병대장으로 높은 명성을 누리기 시작한 것은 교황청에 고용된 뒤부터다. 처음에는 몬토네의 점령으로 교황령에서 이탈한 움브리아 도시들을 재정복하라는 임무를 맡았던(1427-28) 그는 교황청에 반기를 든 로마냐 도시들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며 교황군 사령관으로 임명된다(1431). 그 후로도 움브리아와 로마냐에서 여러 차례 반 교회 봉기들을 잠재우는 한편, 이 지역으로 영토 확장을 노리는 밀라노 공작의 계속된 도발을 잘 막아냈다.

  가타멜라타의 마지막 고용주는 베네치아였다. 1434년, 보수 지급 지연과 미지급 된 경비 문제로 교황청에 불만이 쌓였던 그는 베네치아의 중재로 밀린 금액을 일부 지불받는 조건에 합의, 교황과 계약을 끝내고 베네치아군과 일하기로 한다. 당시 베네치아는 교황청, 피렌체와 동맹을 맺고 밀라노-제노바-시에나에 대항해 전쟁 중이었는데 이 전쟁에서 가타멜라타는 베네치아의 장군들을 통틀어 가장 분전한 인물이었다. 사령관이던 만토바 후작 잔프란체스코 곤자가(Gianfrancesco Gonzaga, 1395-1444)는 중도에 배신하고 밀라노와 손잡았으며, 프란체스코 스포르차(Francesco Sforza, 1401-1466)는 몇 차례의 결정적인 전공으로 베네치아군을 구하기는 하지만 전쟁 중간에도 여러 번 계약 종료-재계약을 반복하면서 전장 이탈과 재참전을 반복했다. 반면 노령의 가타멜라타는 꾸준히 자리를 지키며 베네치아를 위해 싸웠다. 니콜로 피치니노(Niccolò Piccinino, 1386-1444)가 이끄는 밀라노군에 맞서 볼로냐(1435)와 브레시아(1438)을 방어하고 한 때 베로나를 빼앗기지만 곧 되찾는다(1439). 베네치아는 이런 그의 노고를 높이 사 가타멜라타에게 파도바의 포데스타라는 직위를 주었을 뿐 아니라(1437) 이듬해에는 공화국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일흔이 다 된 그는 최고 사령관의 영광을 오래 누리지 못했다. 1440년 가르다 호수를 통해 수로로 밀라노의 배후를 공격하려는 전략에 따라 현장에서 함대 구성을 지휘하던 가타멜라타는 뇌출혈로 쓰러졌고 이후 내내 병상에 누워있다가 1443년 사망한다.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초상화(좌)와 그의 묘가 있는 베르가모의 콜레오니 예배당(우)

  베로끼오 작품의 주인공인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Bartolomeo Colleoni 1400-75)는 귀족 가문 출신이다. 그의 집안은 롬바르디아 동부 도시 베르가모의 권력을 다투며 밀라노 공작에 반대하는 세력을 대표하는 가문이었는데, 바르톨로메오의 부친은 그가 아직 어린 아이였을 때 정쟁으로 인해 사촌에게 살해당했다. 암살의 배후에 밀라노 공작이 있었다고 믿는 사람도 많지만 확실하게 밝혀진 증거는 없다.

  17-8살 무렵 콜레오니는 필리포 아르첼리(Filippo Arcelli, 1375/80?-1421)의 군대에 들어갔으나 아르첼리가 얼마 뒤 밀라노 공작에게 패해 전사하자 브라치오 다 몬토네의 부하가 됐다(1419). 이후 몬토네를 따라 남부 이탈리아에서 나폴리 왕위를 둘러 싼 내전에 종군했다가 무찌오 아텐돌로(Muzio Attendolo Sforza, 1369-1424)의 군대로 옮겨갔는데, 공교롭게도 몬토네는 곧 아퀼라에서 아텐돌로의 아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이끄는 아텐돌로의 군대에게 패한다(1424).

  콜레오니는 상당히 이른 나이에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아퀼라 전투 후 카르마뇰라 백작(Carmagnola, 1380-1432)에게 발탁돼 베네치아의 대 밀라노 전쟁에 종군하게 된 그는 1432년 백작이 처형되고 후임 사령관에 오른 잔프란체스코 곤자가의 참모 역할을 맡았다. 탁월한 지휘관이 아닌 곤자가 덕분에 그를 보좌하며 실질적으로 후작의 군대를 지휘한 콜레오니의 능력이 크게 눈에 띌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후작이 밀라노 편으로 돌아선 뒤에도 베네치아군에 남았기 때문에 공화국의 신임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전쟁에서 그는 베네치아군의 양대 축인 두 장군 가타멜라타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신임과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여러 작전에서 활약한다.

  베네치아와 밀라노가 종전에 합의한 뒤 콜레오니는 스포르차를 따라 밀라노 군대로 가지만(1443), 얼마 못가 공작에게 반역 혐의로 의심받고 투옥됐다. 공작이 죽고 나서야 4년 만에 풀려난 그는 이듬해 다시 벌어진 전쟁에서 주저 없이 밀라노를 떠나 베네치아와 계약하고(1448), 이 전쟁에서도 많은 전공을 세우며 활약했다.

  그러나 1451년 베네치아가 자신보다 한참 명성과 공이 낮은 인물을 새 사령관에 선임하자 계약 갱신을 거부하고 떠났다. 한 때 북서 이탈리아의 몬페라토 후작에게 고용돼 일하다가 밀라노 공작이 된 스포르차를 위해 고향인 베르가모를 공격하는 작전을 맡았는데(1452), 이 계약이 끝나자 다시 베네치아군으로 간다. 그를 떠나 보내고 내내 후회하던 베네치아는 높은 보수, 막대한 영지와 함께 콜레오니에게 이례적인 종신 총사령관 자리를 제안한 것이다. 결국 그는 1455년부터 죽을 때까지 '전시에는 베네치아군 전체를 지휘하고 평시에는 마음대로 자신의 용병부대를 사용하는' 조건[1]으로 베네치아의 총사령관을 맡았다.

  베네치아가 콜레오니를 특별히 높이 평가한 이유는 단지 그가 뛰어난 지휘관이었고 한 번도 자신들과의 계약을 위반한 적이 없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콜레오니는 군기를 엄하게 유지하기로 유명해서 자신의 병사들이 작전과 관계없이 민간인을 약탈하거나 갈취, 강간하는 일을 엄금했는데, 적아를 가리지 않고 전쟁 중 용병들이 저지르는 폭력이 일상적이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그를 오래 고용했던 베네치아 입장에서 이런 철칙은 정말 크게 칭송할 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콜레오니는 유언을 통해 평소 열심히 관리하고 개발해 온 자신의 모든 영지가 영구히 베네치아 소속이라고 확정함으로써 그의 자손들이 독립 군주국 확립을 시도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하던 공화국 정부의 우려를 없애 주었다.

도나텔로의 <가타멜라타 청동 기마상>

  1443년 가타멜라타가 사망하자 베네치아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기마상을 파도바에 세우기로 의결하고 피렌체의 조각가 도나텔로에게 작업을 맡겼다. 이미 <성 조르조>, <다비드> 등의 걸작으로 청동상 제작의 최고 대가라는 명성을 지니고 있던 도나텔로는 (고대 이후로) 그 때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실물크기의 청동 기마상을 만들기로 한다. 이를 위해 그는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기마상>, 파비아의 <레지솔레>[2], 베네치아 산 마르코 성당의 청동마상 등 남아있던 고대의 청동상들은 물론이고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목조, 석조 마상/기마상들도 두루 연구했다. 약 10년간의 연구와 작업 끝에 완성된 3.4mx3.9m 크기의 <가타멜라타 청동 기마상>(1453)이 파도바의 산토 광장에 세워지는데, 이 작품은 완성 직후부터 많은 찬사를 받았을 뿐 아니라 르네상스를 넘어 바로크,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청동 기마상의 교과서와도 같은 존재로 예술사에 이름을 남긴다.

  이 청동 기마상이 걸작으로 평가받는 가장 큰 이유는 뛰어난 사실성과 균형미를 과장없이 매우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하면서도 가타멜라타라는 인물의 굳은 의지와 리더십, 신뢰감와 권위를 훌륭하게 담아냈기 때문이다. 말의 신체 표현도 해부학적으로 흠잡을 데 없으며 타고 있는 인물과 말의 크기 비율도 정확하다. <아우렐리우스 황제 기마상>이나 <레지솔레>처럼 기수를 말에 비해 크게 만들어서 밑에서 올려다 보는 이들에게 기수가 더욱 돋보이도록 하는 방식도 사용하지 않았다. 절대 미남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평범하지만 단호한 표정의 인물 얼굴도 역설적으로 장군 가타멜라타의 군인다운 기개와 의지, 통솔력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선택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기마상>(좌)과 파괴되기 전 파비아의 <레지솔레>를 스케치한 그림(우)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도나텔로가 이 청동상에 사실과 다른 상징을 전혀 가미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인물이 입고 있는 상의가 고대 로마 장군들의 갑옷이라는 점인데, 이는 군사적 영웅임을 드러내기 위해 르네상스 시대 예술작품에서 흔히 쓰이던 일종의 상징적, 상투적 방식이니 굳이 과장이나 미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눈치채긴 어렵지만 작가의 과장이 가미됐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은 칼이다. 가타멜라타가 차고 있는 칼은 크기가 양손 검(Two-handed sword)이라고 할 정도로 지나치게 긴데, 실제로 그가 이런 칼을 차고 다녔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유난히 큰 칼은 장군의 남다른 군사적 능력, 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 한 장치인 듯하다.

  이 작품이 기술적으로 찬사받은 이유는 또 하나 있다. 대개 서 있는 자세의 말 뿐이던 당시의 목조, 석조 마상/기마상들과 달리 도나텔로는 움직이는 말, 걷고 있는 말의 포즈를 (역시 고대 이후 최초로) 성공적으로 구현했다는 사실이다. 석상이나 목상은 작품과 받침대를 일체로 조각하면 한 다리를 든 말도 쓰러지지 않게 만들 수 있겠지만, 이렇게 큰 청동상은 당시 기술상 작품과 받침대를 일체로 제작하기 불가능했다. 청동 기마상을 석조 기단 위에 세워야 한다는 얘긴데, 한 다리를 들고 있는 말의 무게 중심을 정확히 잡기가 생각보다 까다롭다. 도나텔로가 내놓은 해법은 말의 들려 있는 발 밑에 살짝 포탄(으로 보이는 구체)을 놓는 것이었다.

베로끼오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기마상>(1483-96)

  <콜레오니 청동 기마상>은 가타멜라타 동상과 달리 베네치아 본국 도심 한 복판에 세워졌다. 이는 베네치아의 두 사람에 대한 호의와는 큰 상관이 없고, 단지 콜레오니 본인이 상당한 영지를 베네치아에 유증하면서 조건으로 자신의 동상 건립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원래 그는 유언으로 동상을 산 마르코 광장에 세워달라 요청했으나, 베네치아 정부는 공화국의 상징과도 같은 심장부에 개인을 위한 기념물을 설치할 수 없다며 대신 다른 곳(성 조반니-파올로 광장)을 건립 장소로 지정했다. 콜레오니가 죽고 4년 뒤(1479), 베네치아는 콜레오니 청동 기마상 제작을 위한 공모를 개최했는데 피렌체의 대가 안드레아 델 베로끼오(Andrea del Verocchio)와 베네치아 조각가 알레산드로 레오파르디(Alessandro Leopardi), 바르톨로메오 벨라노(Bartolomeo Vellano)라는 파도바 예술가가 최종 후보에 올랐다(1483).

  조르조 바사리의 <르네상스 예술가 열전>에 따르면, 공모 끝에 베로끼오가 낙점된 데는 이런 일화가 있다고 한다. 원래 베네치아 정부는 심사 결과 콜레오니는 벨라노가, 말은 베로끼오가 제작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베로끼오는 심사물로 제출한 자신의 모델에서 말 머리와 다리를 부숴 버린 뒤 그 길로 말없이 피렌체로 돌아가 버렸다. 베로끼오의 행동을 공화국의 권위에 대한 불복과 모욕으로 간주한 베네치아 정부는 그에게 편지를 보내 "다시는 우리 공화국 땅에 발 딛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베네치아 영내에서 발각되면 즉시 체포해 참수하겠소."라고 경고했다. 이에 베로끼오는 베네치아에 답장을 보내 "귀국의 경고는 명심하고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저 같은 조각가는 잘라버린 말의 머리와 다리쯤 다시 붙일 수 있지만, 제 아무리 베네치아라도 한 번 잘라버린 사람 머리를 다시 붙일 능력은 없으니까요."라고 비꼬았다. 이 답장을 받은 베네치아 정부는 베로끼오의 기개가 마음에 들었는지 결정을 번복하고 정중한 사과와 함께 그에게 동상 제작의 전권을 맡기기로 한다.

  바사리 이야기의 진위 여부를 떠나 어쨌든 오늘날 우리가 보는 <콜레오니 기마상>은 전적으로 베로끼오가 만든 것임은 분명하다[3]. 이 작품도 도나텔로의 기마상처럼 실물크기로 제작됐으며(높이 3.95m), 말의 해부학적 묘사, 기수와 말의 비례 등도 매우 사실적이다. 베로끼오 역시 도나텔로의 작품을 포함해 기마상의 여러 전례들을 충실히 연구한데다가 30년이라는 시차동안 진척된 기술적 발전도 반영된 탓인지, <콜레오니 기마상>은 <가타멜라타 기마상>보다도 더 역동적인 자세로 움직이고 있는 말의 모습을 (발 밑의 포탄같은 꼼수도 없이) 잘 구현하고 있다. 인물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방식도 도나텔로와는 다르다. 차분하고 안정적으로 말 위에 앉아 절제된 지휘관의 위엄을 보여주는 가타멜라타와 달리, 힘이 넘치는 위압적인 포즈와 섬뜩할 만큼 강렬한 표정으로 근육질의 말을 통제하는 베로끼오의 콜레오니는 정력적인 영웅의 분위기를 풍긴다. 굳이 고대 로마 장군의 갑옷이라는 상투적 수단에 호소하지 않아도 비범한 인물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콜레오니 기마상>은 <가타멜라타 기마상>과 마찬가지로 후대에 제작된 수 많은 기마 동상, 석상들의 중요한 표본이 됐다. 간단히 요약하면 인물의 힘과 역동성, 영웅적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고자 한 경우에는 주로 전자가, 안정감 있는 리더십과 통솔력, 권위를 강조하는 작품들은 후자가 그 모델이 됐다고 볼 수 있다.

 

폴란드 슈체친의 <콜레오니 기마상> 복제품(좌)과 <콜레오니 기마상>의 얼굴 부분(우)

  여담이지만 폴란드의 슈체친이라는 도시에 가면 베로끼오의 <콜레오니 기마상>과 똑같은 복제품이 어느 공원에 놓여있다. 이 베네치아 용병대장이 폴란드와 무슨 관계가 있었을까 싶지만 콜레오니는 생전에 폴란드는 고사하고 이탈리아 반도 밖으로 나가 본 적도 없다. 이 동상은 20세기 초 슈체친의 어느 기념 예술품 제작 업체가 홍보용으로 제작해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을 동원해 원본을 복제) 국립 박물관에 기증한 것인데, 공산정권 시절 바르샤바의 국립 미술학교 앞마당으로 옮겨졌다가 2002년 슈체친으로 반환돼 지금의 자리에 놓였다고 한다. 아이러니하지만 원본 기마상이 워낙 높은 기단 위에 올려져 있으니 베로끼오의 동상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베네치아보다 폴란드 슈체친을 가 보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주석

[1] 이런 식의 용병계약은 대기계약 또는 사전계약이라고 하여 르네상스 후기로 갈수록 많아지는데, 콜레오니의 경우는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2] Regisole: 로마제국 말기(5세기 초중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태양왕'이라는 이름의 기마동상. 동상의 모델이 된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실하진 않으나 제국 후반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이거나 동고트족 왕 테오도릭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원래 라벤나에 세워졌으나 14세기 파비아로 옮겨졌고 1796년 프랑스 혁명기 자코뱅 당원들에 의해 파괴됐다.

[3] 베로끼오는 <콜레오니 기마상>의 주형을 완성하고 1488년 사망했다. 마지막으로 주형에 청동을 부어 동상을 만드는 작업은 유언으로 수제자 로렌쪼 디 크레디(Lorenzo di Credi)에게 일임했으나 베네치아 정부는 그의 뜻과 달리 공모전의 경쟁자였던 알레산드로 레오파르디에게 마무리를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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