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 이탈리아는 서독과 함께 서방세계 유럽의 최전방이었다. 동쪽으로 공산국가 유고슬라비아(육상), 알바니아(해상)와 맞붙어있고 북으로는 국경을 접한 중립국 오스트리아를 통해 숨어 들어올 수 있는 동구권 스파이들을 경계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지정학적으로만 최전방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는 서유럽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지지 기반을 갖춘 공산당이 합법적인 원내 정당이었을 뿐 아니라, 온전히 청산되지 못한 파시즘 체제의 유산으로 인해 무솔리니 시대를 공공연히 찬양하는 극우정당도 공존하고 있었다. 내부적으로도 극좌와 극우의 갈등이 첨예한 최전방이었던 셈이다. 특히 서유럽의 68혁명과 프라하의 봄(1968) 사태 이후 이탈리아 공산당이 소련의 교조주의적 국제혁명 노선을 거부하자 이에 반발한 일부 극렬 좌파들이 붉은 여단 등의 비밀 테러 조직을 결성하면서, 이들과 극우 테러단들이 일으키는 상호 폭력과 암살, 테러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게 된다.* 극좌와 극우 비밀 결사들의 폭력은 상대 조직에 대한 공격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혼란 조장, 정부 전복 기도를 위해 일반 시민이나 국가 기관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테러 행위로 확대되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가 바로 볼로냐역 폭탄테러다.
폭탄테러 직후 모습(좌)과 폭파된 잔해를 치운 뒤 볼로냐역의 모습(우)
1980년 8월 2일 오전 10시 25분, 볼로냐역 대합실에 누군가 놓고 간 서류가방 안에서 시한폭탄이 터졌다. 이용객 수에 비해 작기로 유명한 볼로냐역에는 여름 관광/휴가철 토요일을 맞아 그날따라 사람이 많았고 불행하게도 때마침 대합실 건물에 가장 가까운 1번 플랫폼에는 안코나행 기차도 정차해 있었다. 고성능 폭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합실 건물이 폭발로 완전히 무너진데다가 잔해 일부가 1번 플랫폼의 객차를 덮치는 바람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후 최종 집계된 희생자는 사망 85명에 부상 200명 이상.
2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최악의 테러 사건이었지만 참사의 와중에서도 볼로냐의 시민정신은 빛났다. 폭발의 충격이 가라앉자 마자 사태를 파악한 시민들은 구조대와 구급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생존자 구조에 뛰어들었다. 역 안에 있던 다치지 않은 승객들은 물론이고 주변 상인들과 지나가던 행인들까지 달려와 잔해 속에서 부상자들을 구조해 내는 데 힘을 모았고, 구급차가 부족해 사상자의 이송이 지연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근처를 지나던 택시, 승용차, 시내버스까지 나서 피해자들을 실어 날랐다. 볼로냐의 의사와 의료진들 중에는 사고 소식을 접한 뒤 바로 휴가를 취소하거나 중단하고 병원으로 복귀한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테러가 일어난 이튿날에는 볼로냐의 마조레 광장에서 정부의 철저한 사건 조사를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도 벌어졌다.
폭발 직후 구조대, 군경과 함께 사상자 구조와 수송에 나선 시민들
폭발 원인에 대한 수사가 시작됐고 며칠 뒤 폭탄에 의한 테러임이 밝혀졌다. 그 해 8월, 이탈리아 정부 당국과 수사기관은 테러의 주범으로 극우파 비밀 폭력 단체 NAR(Nuclei Armati Rivoluzionari 무장혁명중추)을 지목하고 수 년에 걸쳐 20여 명의 조직원들을 체포한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군 정보기관의 일부 간부들이 프리메이슨 비밀결사와 결탁해 수사 증거를 조작하려다 발각되는 스캔들도 불거졌으며*** 이 때문에 볼로냐 폭탄테러 사건의 재판은 더욱 복잡하고 지지부진하게 진행됐다.
10여 년간 계속된 지리한 재판은 재심에 재심을 거듭한 끝에 1995년 폭탄테러의 주범 발레리오 피오라반티Valerio Fioravanti와 프란체스카 맘브로Francesca Mambro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뒤늦게 검거된 루이지 차바르디니Luigi Ciavardini는 2007년 징역 30년을 확정받았다. 그 밖에 검거된 NAR 조직원들은 모두 최종 무죄판결을 받았으며, 증거 조작과 제2의 가짜 폭탄 테러를 기획한 혐의로 기소된 피에트로 무수메치Pietro Musumeci, 프란체스코 파치엔차Francesco Pazienza, 주세페 벨몬테Giuseppe Belmonte와 리치오 젤리Licio Gelli에게는 유죄가 확정됐다. 폭발로 부서진 역 대합실 건물은 이후 완전히 새로 지어졌으나 오늘날에도 볼로냐역에는 당시의 참상을 기억하고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남겨진 흔적들이 있다. 테러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벽면 아래 폭발 당시 충격으로 타일이 훼손된 대합실 바닥의 일부가 보존돼 있으며 역 건물 외벽의 시계는 1996년 이래로 10시 25분을 가리키며 멈춰 있다.
볼로냐역의 멈춰진 시계
2007년 법원의 최종 선고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피오라반티, 맘브로, 차바르디니 세 사람 모두 자신들의 다른 모든 범죄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볼로냐 폭탄테러의 혐의만은 처음부터 완강히 부인하고 있는데다가, 수사기관이 재판에 제시한 증거들에도 불확실한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테러의 주체를 두고 여러가지 가설과 음모론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강경 분파가 벌였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팔레스타인에 우호적인 이탈리아 정부에게 경고성 메세지를 주기 위해 이스라엘 모사드와 미국 CIA가 PLO 분파의 소행으로 가장해 꾸민 사건이라는 설도 있다.
주석
* 1960년대 말부터 8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이 테러의 시기를 이탈리아에서는 Anni di piombo(납탄시대 Years of Lead)라 부른다. 이 명칭의 유래를 두고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이탈리아에서 인기를 끈 독일 영화 Die Bleierne Zeit(1981)의 이탈리아 개봉 당시 제목에서 따온 것이라는 주장이 가장 유력하다.
** 23kg 가량의 TNT와 니트로글리세린 혼합 폭발물을 폭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지면에서 50cm 높이에 놓아둔 것으로 추정된다.
*** 이탈리아군 정보기관인 SISMI의 장교 프란체스코 파치엔차는 테러리스트와 소련 KGB의 연관성을 의심케하는 가짜 메모와 문서를 만들어 수사기관에 흘렸다가 발각됐으며, 같은 기관의 피에트로 무수메치 장군과 주세페 벨몬테 대령은 NAR이 아닌 다른 극우 단체 Terza Posizione를 암시하는 물품을 넣은 채 서류가방 폭탄을 만들어 볼로냐역의 다른 기차 안에 놓아두려다 붙잡혔다. 두 사건을 꾸민 세 사람 모두 프리메이슨 비밀조직 P2의 일원이었으며 수사를 통해 이들이 P2의 수장 리치오 젤리가 볼로냐 테러범들에게 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은폐하려고 범행을 기획한 것으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