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취향에 대한 몇몇 일화들을 곁들여서
취향에 대한 몇몇 개인적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 스포티파이 2024 Wrapped이 나올 때쯤 친구가 음악 취향 관련 릴스들을 공유해 준 덕에 간만에 떠오른 기억들인데 누군가에게는 재미있을지도?
일화 #01
졸업전시를 하기 10일 전 나는 내 첫 직장의 면접을 보러 갔다. 내 resume발표를 포함해 1시간 30분간 진행한 면접 질문 중 기억에 남는 질문이 있었는데....(가물가물한 기억이라 세부사항은 좀 다를 수 있다)
"평소 어디에서 인사이트를 얻고나요? 또 그 최근 사례를 말해주세요"
트렌디한 빠른 정보도 좋지만 사람은 변치 않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그런 지점은 '책'을 통해 얻는다고 대답했다. 이어서, 가장 최근에 읽은 피에르 부르디외에 관한 책을 언급하며 그 책의 핵심 인사이트에 대한 내 생각을 공유했다. 다소간 신나게 말했던 기억이 있는데 나는 아는 것을 떠들기 좋아하는 걸까. (이 글도 그런 저렴한 생각의 결과일지도)
당시 내가 말한 피에르 부르디외의 핵심 인사이트는 취향은 계급에 따라 다르게 체화된다는 것이었고 개인의 취향은 단순한 선호가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연결되어 지배계급의 문화자본을 공고히 한다는 것이었다. 이어지는 대답에서 나는 이런 인사이트를 비판적으로 보기도 해서 현대 우리 사회에도 과연 적용가능한 주장인지도 생각해 보았다고 했다. 현대 우리 대중문화 중심의 사회, 또한 유럽(부르디외는 프랑스인이다)과 같은 귀족 개념이 희박하다는 점을 들어 "계급"에 대해 똑같이 적용하기 어려울 것 같다 언급한 기억이 있다.
이 책덕분에 회사에 합격한 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 친구, 적당한 호기심도 있고 생각을 하며 살고 있구나" 라는 인상은 남기기에는 충분한 것 같다. 부르디외옹덕에 취향에 대해 더 구조적으로 생각할 수 있던 기회였던 한편으로 "진짜 그런가?"를 고민할 수 있었고 취향이 그저 가벼운 스몰톡 재료를 넘어 사회적 기능을 한다는 가능성을 생각하게 해주지 않았나 싶다.
일화 #02
위 면접을 보기 두해 전 나는 [ 책표지로 내 독서 취향을 보여주는 책장 ]을 디자인해 실제 쓸 수 있는 프로토타입까지 제작한 적이 있다. 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나의 가장 큰 딜레마는 "취향을 드러내고 싶지만... 그건 좀 과시적이라 얄팍하고 부끄럽지 않나?" 하는 문제였다.
나는 취향을 자랑하고 드러내는 것은 좀 멋이 없지 않나?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게 생각한다. 왜일까를 생각해 보면 오직 내 취향으로 나를 정의하고 내 정체성을 이것에 투영하는 건 실없는 사람 같다고 생각한다. 나의 말과 행동으로 나를 표현해야지 고작 내가 좋아하는 것? 그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대단한 사람인양하는 모습을 종종 봐와서 그런지 멋이 없다고생각하는한면 이런 내 생각이 좀 부당한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취향을 드러내고 싶지만... 그건 좀 과시적이라 얄팍하고 부끄럽지 않나?"의 문제는 그냥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당시 내가 내린 결론은 디자인으로 그런 미묘한 부분을 담는 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결정은 함께 수학하던 설치미술 소모임 친구들과 술자리 토론으로 도출된 결론이다.
일화 #03
평소 패션잡지를 즐겨보지 않지만(싫은 건 아니고 그저 볼 기회가 없다) 미용실에서 차례를 기다릴 때는 보곤 하는데 무척 재밌다. 요즘 사람들이 열망하는 갖가지 물건들의 향연! 개인적으로 시계를 좋아해 업데이트가 빠른 편이지만 그 물건에 대한 사치적 시점을 멋지게 표현해 주는 사진들도 퍽 흥미롭다.
이런 잡지들을 보면 제품에 스토리, 특별한 이유를 지속적으로 설득하려 한다. 이 제품을 가진 당신은 남과 다를지도...?라고 하는듯하다. 잡지들의 일관적인 호소에 귀 기울여보면 제품은 기능적 부분을 떼고 생각하면 남과 구별되게 해주는 그 제품의 "상징"을 획득하는 것이 핵심인가 싶다.
여기서 또 다른 일화를 소개하고 싶다. 회사의 교육세션 때 대표님이 "브랜딩의 핵심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무엇이라 생각하나?"였다. 직원들 모두 갖가지 생각을 공유했지만 대표님이 원하시던 답은 아니었다. 정답은 구별되게 하는 것이었고 이를 상표에 대한 브랜딩의 기원을 설명해 주시며 마무리하셨던 기억이 있다.
브랜딩이고 소비고 나발이고 모두, 나를 남과 다른 특별한 무언가로 만들어주는 일을 도와주고 그에 대한 대가를 소비품에 녹여파는 연금술이라 하겠다.
일화 #04
중학교 때부터 함께 음악도 공유하고 같이 듣던 친구가 있다. 중고등학생 때는 대중음악을 정말 공부하듯 들어서 피치포크 같은 곳을 드나들고 코엑스 지하에 있던 에반레코드나 홍대 앞 퍼플레코드도 정말 많이 갔었다. 몇몇 장르를 제외하곤 안 들어본 음악이 없었다. 지금도 그 친구와는 음악이야기를 나누곤 하는데 모두 스포티파이(Spotify) 사용자다.
그 친구가 지난주에 수차례 다음과 같은 인스타 릴즈들을 보내왔었다.
정말 많은 숏폼 영상들을 공유해 줬는데 모두 스포티파이 Wrapped에 관한 내용이다. 스포티파이 Wrapped는 유저가 1년간 들었던 음악들을 연말결산처럼 정리해 주는 서비스이다. 언젠가부터 음악 스트리밍서비스들이 1년간의 사용자의 음악 청취 기록을 편집해 알려주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그중 스포티파이는 비교적 일찍 2017년부터 이러한 서비스를 해왔다고 한다.
다시 친구가 공유해 준 인스타그램 릴스로 돌아가서 릴스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스포티파이 Wrapped를 기다리는 우리들
- 멋진 음악 취향으로 조작하기 위해 음악을 무한 재생 중
- 사람들의 Wrapped를 재판관처럼 판결(그들의 음악 취향을)하는 나의 모습
- 다른 이들과 Wrapped를 함께 공유하고 싶어서 1주일 전에 연말 결산이 나왔지만 공유를 아끼고 있는 유튜브 뮤직 유저
내 생각보다 스포티파이 유저들은 Wrapped의 결과와 이것을 공유하는 행위에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았다. 심지어 "내 멋진 취향"을 보여주기 위해 고의로 "멋진"곡을 계속 재생할 정도로!
친구는 이런 행위를 "취향 게임"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아마 그 과정이 즐겁기 때문 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취향을 전시하는 행위를 통해 무엇을 얻고 또 즐길 수 있을까?
위 이미지는 스포티파이 Wrapped 2024 홈페이지에 있는 내용이다. 스포티파이가 제안하는 서비스의 핵심 역할은 크게 두 가지이다. 1. 나의 지난 1년간의 음악과 팟캐스트 되돌아보기 2. Wrapped결과를 전 세계 사람들과 공유하고 소통하기. 두 가지 주요 효익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긁어준다.
1. 내가 좋아하는 건 뭐지?
2. 그럼, 너는 뭘 좋아하니?
스포티파이는 내가 가장 많이 들은 곡, 아티스트를 알려주는 기본 기능 외에도 매년 조금씩 다른 기능을 제공하는데 가령 이 전해에는 오디오 아우라를 제공하여 내 음악 취향을 색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런 기능은 나의 음악취향을 대단한 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도와준다.
2024에는 내 1년간 음악 취향의 흐름을 AI가 장르의 이름을 붙여주고 크게 3단계로 알려준다. Rainy Day K-rpa, Cozy Gramma House Dream Pop 이런 식인데 이름이 너무 AI 스러워서 나만의 장르라는 기분은 덜 드는 기능이었지만 정량데이터를 기반으로 추이를 보여준다는 게 흥미롭다.
이 기능은 개인의 취향은 계속 바뀐다는 것을 전제로 한 기능이라는 점이 제일 흥미로운데 그 추이 변화를 바탕으로 다음에 들을만한 음악 제안이나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인사이트를 추출하는 기능은 어떨까 생각했다. 마치 사용자가 대시보드를 보는 관리자라는 기분이 들게끔 말이다.
덕분에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공유하고 싶어 지는 결과물을 받게 되었고 공유하기 편하게 공유하기 버튼을 하단 중앙 버튼으로 만들어줬다.
개인적으로는 내 취향을 드러내는 것을 위 일화 #02에서 언급하였듯 부담스러워하는데 그런 허들도 이런 콘텐츠를 완성품으로 제공해 준다면 한 단계 낮아진다 생각한다.
소개팅을 생각해 보자, 주로 최근 무슨 영화를 봤는지, 무슨 노래를 좋아하는지 등 취향 탐색 시간을 가지며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가늠한다. 내가 먹고 보고 듣는 게 나를 대변해 주는 역할을 기능적으로 보여주는 대표 예시인 것 같다. 그래서 일화 #4에서 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멋진 취향을 뽐내기 위해 (Wrapped에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음악들을 올리기 위해) 반복 재생을 하는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내가 소비하는 것이 곧 나를 대변한다는 것, 이건 계급적인 상징일 수도, 그저 스몰톡 소스일수도 있다. 취향 탐색과 상대의 취향에 대한 각자의 심상 그리기라는 게임일 수도 있고 마치 패션처럼 내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전달하기도 한다. 나도 이 게임의 플레이어로서 조금 부끄럽지만 누군가 알아주기를 를 바라면서 오늘도 뭔가를 듣고 보고 먹는다 다만 조금 덜 위선적으로 하기를....
+ 번외 및 잡담)
음악 취향에 관해 이것저것 찾아보다 발견한 재미있는 이미지다. 조각조각 분화되는 음악에 대한 인포그래픽인데 점점 더 장르를 특정하기 어려워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