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초 칠레 아옌데 정권의 사이버네틱 관리 체제
들어가며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의한 칠레 아옌데 정권의 몰락 이야기는 2019년 남미 여행 때 처음 알게 되었다. 당시 칠레 산티아고에서는 반정부 시위가 한창이었는데 그 배경이나 칠레의 역사가 궁금해서 찾아봤었다. 그 이후에는 로베르토 볼라뇨 소설에서 읽었다. 볼라뇨는 소설을 참 맛깔나게 쓰니까 뭐든 추천한다(피노체트 이야기는 [먼 별]에서 읽음). 국민에 의해 처음으로 선출된 사회주의 대통령의 사회주의 실험이 쿠데타 없이 진행되었다면 성공했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사이버네틱스를 들어봤는가? 이 개념을 제안한 노버트 위버에 따르면 "동물(인간)과 기계를 통제하거나 그들과 소통하는 것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한다. 언뜻 보면 사람의 능력을 확장하는 (마셜 맥루한이 말하는 미디어처럼) 융합적 기술 영역 같아서 호기심이 간다. 알듯 말듯해서 노버트 위버의 동명의 책을 좀 봤는데 어려워서 읽다 말았다. 이해가 안 가는 책을 끝까지 읽는 것 만큼 힘든게 또 있을까? 있을것 같긴하다;;
내가 호기심을 느끼는 두 가지, 정치 체제 실험과 사람-기계를 연결하는 기술적 시도, 를 함께 다루는 흥미로운 사례가 있어서 번역해 봤다. 아옌데는 정부는 정부 내에 산업 디자인 그룹을 구성했다고 한다. 그는 디자인이 정치적이라고 믿었다는 부분도 흥미를 끌었다.
아래글은 MIT Press에서 2023년 9월 11일에 작성된 글을 번역한 글입니다.
1973년 9월 11일 오전 9시가 조금 지난 시각, 칠레 최초의 민주적으로 선출된 사회주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는 마지막 라디오 연설을 전했습니다. 정오가 되자 전투기들이 대통령궁을 향해 로켓을 발사했고, 오후 2시경 아옌데 대통령은 사망했습니다. 군부가 칠레의 사회주의 정치 실험을 폭력적으로 종식시키면서, 동시에 사이버네틱한 방식으로 국가를 관리하려 했던 기술적 실험 역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 소개할 내용은 에덴 메디나(Eden Medina)의 2011년 저서 『사이버네틱 혁명가들: 아옌데 시대 칠레의 기술과 정치』에서 발췌·각색한 것으로, 칠레가 야심차고 선구적인 기술을 구축하려 했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변화를 이루기 위해 컴퓨터와 통신 기술을 어떻게 활용하려 했는지를 복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칠레의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혁신적인 정치 실험이 어떻게 독창적인 기술 시스템으로 이어졌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정치적 혁신이 기술적 혁신을 촉진할 수 있으며, 과학과 기술, 디자인 또한 칠레 사회주의 과정의 중요한 특징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정치적 맥락은 기술적 가능성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 가능성을 차단하기도 합니다. 이는 해당 시스템의 우수성이나 결함 여부와는 무관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1970년, 칠레 유권자들은 살바도르 아옌데의 지도 아래 민주적인 방식으로 사회주의적 변화를 추구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아옌데는 칠레 최초의 민주적으로 선출된 사회주의 대통령으로서, 냉전 시기 미국이나 소련의 정치 이념과는 다른 ‘제3의 길’을 제안했습니다.
아옌데는 칠레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고자 했지만, 그 변화가 평화롭게 이루어지길 바랐고, 기존의 민주적 절차와 제도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추진하길 원했습니다. 외국 다국적 기업들과 칠레 과도층이 소유하던 자산을 국가로 이전하고, 소득을 재분배하며, 노동자들이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옌데 정부의 주요 과제였습니다. 아옌데가 지키고자 했던 민주주의 제도에는 선거 결과에 대한 존중, 사상·언론·출판·집회의 자유 같은 개인의 자유, 그리고 법치주의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헌법적 절차를 통한 사회주의적 변화를 추구했고, 이는 쿠바나 소련의 사회주의와는 다른 점이었습니다. 그의 정치 노선은 ‘칠레식 사회주의의 길’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칠레는 라틴아메리카 내에서도 예외적인 국가였습니다. 1932년부터 1973년까지 칠레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민주주의가 중단 없이 유지된 나라였습니다. 아옌데가 표방한 평화로운 사회주의적 변화와 자유로운 사상 표현에 대한 의지는, 같은 시기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등 인접 국가들의 정치 상황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뤘습니다. 1970년 당시 이들 두 나라는 공산주의 위협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군부가 장악한 억압적인 정권 하에 있었습니다.
또한 칠레는 세계 냉전의 주요 격전지였고, 미국의 특별한 관심을 받는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1962년부터 1969년까지 칠레는 ‘진보를 위한 동맹(Alliance for Progress)’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미국으로부터 10억 달러가 넘는 원조를 받았으며, 이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가운데 가장 많은 금액이었습니다. 미국은 이러한 대규모 원조가 칠레 국민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켜, 빈곤층과 노동계층이 공산주의로 기울지 않도록 막아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칠레 정부의 일부 인사들은 사이버네틱스가 국가의 경제 전환 과정을 정부가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은 아옌데의 당선에 대응하여 칠레가 사회주의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비공식적 대응(non-overt course)’ 전략을 채택했습니다. 이는 정부 반대 정당들과 반정부 성향 언론에 자금을 지원하고, 칠레 경제를 방해하는 등의 조치를 포함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금융 봉쇄를 시행하고 칠레에 대한 원조를 대폭 축소했습니다. 또한 막강한 영향력을 활용해 국제 및 양자 간 원조와 민간 은행의 대출을 차단했고, 아옌데가 전임자로부터 물려받은 국가 부채를 재협상하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칠레로 향하는 미국 수출품의 가치를 낮추기도 했습니다.
아옌데가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온 칠레의 사회 및 경제 구조를 변화시키고자 한 노력은, 칠레 내 특권층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레가 오랜 시간 동안 민주주의 제도를 굳건히 지켜온 나라인 만큼, 칠레 국민들과 세계 각지의 관찰자들은 아옌데 정부가 과연 새로운 정치 모델을 개척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실험은 이후 혁신적이고 야심 찬 기술 실험인 ‘사이버신 프로젝트(Project Cybersyn)’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아옌데의 주요 정치 공약 중 하나는 칠레의 핵심 산업들을 국가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이었고, 이는 곧 아옌데 정부의 관리 역량에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이에 칠레 정부의 일부 인사들은 전자식 컴퓨터와 사이버네틱스라는 학제 간 과학이 국가의 경제 전환 과정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971년 7월, 영국의 사이버네틱스 전문가 스태퍼드 비어(Stafford Beer)는 칠레로부터 한 통의 뜻밖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 편지는 그의 인생을 극적으로 바꾸게 될 계기가 되었습니다. 편지를 보낸 이는 페르난도 플로레스(Fernando Flores)라는 젊은 칠레 엔지니어로, 새롭게 선출된 사회주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플로레스는 칠레 국영개발공사(CORFO) 소속으로, 국가 산업 국유화 작업을 주도하는 기관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편지를 쓸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28세였지만, 플로레스는 해당 기관에서 세 번째로 높은 직위를 맡고 있었고, 국유화 과정에서 핵심적인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플로레스는 비어가 경영 사이버네틱스 분야에서 이룬 성과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제 사이버네틱 사고가 필수적인 국가적 규모에서 과학적 경영 및 조직 이론을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아옌데의 공격적인 국유화 정책으로 인해 급속히 팽창하고 있는 칠레 경제를 어떻게 사이버네틱스로 관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조언을 비어에게 요청했습니다.
https://youtu.be/e_bXlEvygHg?si=w8hQHuJt72VKDdbc
“사이버네틱스”라고 불리는 이 학제 간 전후 과학을 보편적으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이 분야의 창시자 중 한 명인 MIT 수학자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는 가장 자주 인용되는 정의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는 1948년 사이버네틱스를 “동물과 기계에서의 제어와 통신에 대한 연구”라고 설명했습니다.
사이버네틱스는 종종 공학과 생물학의 은유를 혼합하여, 컴퓨터의 전기기계적 작동부터 인간의 뇌 기능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시스템의 행동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이 학문은 커뮤니케이션, 피드백, 제어라는 영역에서 기계와 생명체가 공유하는 특성을 가설로 제시하고, 이러한 행동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분야를 통합했습니다. 사이버네틱스 공동체의 일부 구성원들은 이를 기계, 생명체, 조직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보편 언어로 보기도 했습니다.
사이버네틱 사고는 이후 정보 이론, 컴퓨팅, 인지과학, 공학, 생물학, 사회과학, 산업 경영 등 다양한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비어(Beer)는 기업 경영에 사이버네틱스 개념을 적용하고자 했던 ‘경영 사이버네틱스’ 분야의 대표적인 사상가였습니다. 1950년대부터 그는 인간 신경계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기업이 변화하는 환경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새로운 형태의 경영 모델을 제안해 왔습니다. 비어의 저작에서 핵심적으로 다뤄지는 주제는 중앙집권적 통제와 분권적 자율성 간의 균형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그리고 구성 요소의 자율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조직 전체의 안정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은 칠레가 추구한 평화롭고 민주적인 사회주의 접근 방식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인민연합(UP) 정부는 기존의 민주적 헌법 체계를 유지하면서도 사회, 정치, 경제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변화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칠레의 사회주의적 과정은 국가의 역할과 개입을 확대하면서도, 기존의 시민적 자유와 민주 제도를 보존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고민은 비어가 글에서 표현한 핵심 사상들과 깊이 맞닿아 있었으며, 플로레스는 그 철학에 강한 공감을 느꼈습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저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가 생긴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유지 계약을 기꺼이 포기할 것입니다,”라고 영국의
사이버네틱스 전문가 스태퍼드 비어가 썼습니다.
비어는 칠레로부터 온 초대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플로레스는 그에게 정치적 변혁의 시기에 국가 차원에서 자신의 경영 이론을 적용할 기회를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비어는 단순히 조언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참여하고 싶다는 결심을 했고, 플로레스에게 보낸 답장은 당연히 열정적이었습니다. 비어는 “저를 믿으십시오. 저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가 생긴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유지 계약을 기꺼이 포기할 것입니다.”라고 썼습니다. “그 이유는 저는 귀하의 나라가 진정으로 이 일을 해낼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4개월 후, 비어는 칠레에 도착하여 정부의 경영 컨설턴트로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스태퍼드 비어는 1971년 11월 4일 화요일, 아옌데 정부 출범 1주년 되는 날 칠레에 도착했습니다. 같은 날, 아옌데 대통령은 산티아고의 국립경기장에서 직접 칠레 국민에게 연설하며 지난 1년간 정부가 이룬 성과들을 상세히 보고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는 칠레와 외국 소유의 기업들을 정부가 국유화, 개입, 또는 수용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중대한 진전을 바탕으로, 아옌데는 두 번째 해에 새롭게 확대되는 공공 부문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방안을 시급히 찾아야 했습니다.
구조주의 경제학과 케인즈식 ‘펌프 프라이밍(pump priming)’ 정책은 구매력 증가와 고용률 향상을 통해 경제 성장을 이끌어냈습니다. 1971년 11월까지 칠레의 공장 노동자들은 실질 임금이 평균 30% 상승하는 성과를 누렸습니다. 그 결과, 점점 더 많은 국민들이 소비할 수 있는 돈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수요를 증가시키며 생산을 늘려 인민연합(UP) 연합에 대한 대중적 지지 기반을 확장하는 선순환을 만들어냈습니다.
아옌데 정부의 첫 해 동안 국내총생산(GDP)은 7.7% 성장했고, 생산량은 13.7%, 소비 수준은 11.6% 증가했습니다. 1971년 말까지 정부는 주요 광산 기업 전부와 칠레에서 가장 중요한 68개 산업을 민간 부문에서 공공 부문으로 이전시켰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속도는 관료주의의 느림과 변화 실행의 어려움을 자주 비판하던 비어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칠레는 ‘생산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즉, 칠레 사회주의의 성공을 위해 산업 생산 수준을 높이는 것을 핵심 과제로 삼았으며, 이를 위해 경제의 ‘주도적 요지(commanding heights)’를 장악하려 했습니다. 생산 수준을 높이는 것은 부의 재분배로 인해 증가한 수요에 맞춰 공급을 따라가게 하고,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옌데의 핵심 정치 목표는 민주적 틀 안에서 사회주의적 변혁을 이루는 것이었지만, 그는 경제가 이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경제가 번영하지 않는 한 칠레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비어는 플로레스가 모은 소규모 칠레 팀과 함께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비어는 국유화된 부문의 성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영 문제들을 파악하고, 자신의 사이버네틱스 모델을 경제 시스템에 적용하여 해결책을 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는 “프로젝트 사이버스트라이드(Project Cyberstride)”라는 “산업 경제를 위한 정보 및 통제의 예비 시스템” 제안서를 작성했습니다. 이 제안서는 정부가 경제 관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축할 수 있는 컴퓨터 시스템에 대한 최초의 구체적인 설계였습니다.
비어는 이 시스템이 구축된다면 “사이버네틱 경영의 주요 특징을 보여줄 것”이며, “1972년 3월, 즉 불과 4개월 후에는 정부의 실제 의사결정 업무에 도움을 주기 시작할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프로젝트 사이버스트라이드에는 비어의 이전 저서와 강연에서 나온 아이디어들이 반영되었는데, 그중에는 “자유 기계(Liberty Machine)” 개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개념적 기계는 관료주의적 절차를 배제하고, 실시간에 가까운 정보 공유를 위한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들어 즉각적인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거대한 관성”에 대응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비어는 이러한 자유 기계가 “유능한 정보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정부를 만들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정부 관계자들이 문제를 인지하는 즉시 신속히 대응할 수 있고, 관료주의적 정치가 아니라 전문 지식이 정책을 이끌게 된다는 뜻입니다.
비어는 물리적인 자유 기계가 모니터링되는 여러 시스템에서 실시간 정보를 수집하는 일련의 운영실로 구성될 것이며, 컴퓨터를 사용해 “정보 내용을 추출(distil)”할 것이라고 구상했습니다. 칠레 시스템은 결국 국가가 통제하는 산업들에서 매일 수집되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운영되는 통제실을 포함하게 되었고, 메인프레임 기술을 활용해 미래 경제 행동에 관한 통계적 예측을 수행할 예정이었습니다.
당시 칠레의 국가 전산 센터(ECOM)는 네 대의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들 모두 수요가 매우 높았습니다. 국가 전산 공사(ECOM)의 이사는 비어에게 단 한 대의 메인프레임 컴퓨터에서만 처리 시간을 제공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겉보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어는 하나의 메인프레임 컴퓨터에 통신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형태의 프로젝트 사이버스트라이드 설계를 제안했습니다.
이 비전통적인 네트워크 구조를 작동시키기 위해, 비어와 그의 팀은 숫자 데이터와 텍스트를 거의 실시간으로 장거리 전송할 수 있는 저렴한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 해결책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텔렉스(또는 텔레타이프) 기계였습니다. 이 기기들은 기존의 전화선, 위성, 마이크로파 채널 등에 연결된 네트워크를 통해 통신할 수 있었습니다. 비어는 프로젝트 사이버스트라이드를 단일 메인프레임 컴퓨터에 연결된 텔렉스 기계 네트워크를 통해 구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FMQ1qT_RFM
마침 국가통신회사 ENTEL에는 1960년대에 이전 정부가 구입했지만 설치하지 않은 텔렉스 기계 400대가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이 발견 덕분에 팀은 추가적인 텔렉스 기계를 수입하지 않고도 비어가 제안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외환 보유고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미국이 주도한 보이지 않는 금융 봉쇄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1972년 1월, 비어는 런던에 있는 컨설팅 회사 아서 앤더슨(Arthur Andersen and Company)에 연락하여 프로젝트 사이버스트라이드용 소프트웨어를 설계할 수 있을지를 타진했습니다. 그러나 플로레스와 비어는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작업을 빠르게 진행하기 위해, 결국 프로그래밍 작업을 칠레와 런던으로 분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영국 팀은 개념 증명용 임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집중하고, 칠레 엔지니어들은 칠레 경제의 고유한 조건을 반영한 영구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 소프트웨어는 베이지안 통계 예측 기법을 활용하여 생산 데이터에서 중요한 변동을 인식하고, 새로운 데이터가 선형 추세, 지수 함수적 추세, 계단 함수, 혹은 다시 정상으로 회귀할 이상 현상 중 어떤 유형인지를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소프트웨어는 경제 활동에 대한 예측을 수행할 수 있었으며, 새로운 데이터를 반영해 실시간으로 예측을 수정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비어는 사이버스트라이드(Cyberstride) 소프트웨어가 궁극적으로 칠레 정부로 하여금 전통적인 보고 방식—즉, 매월 혹은 매년 수집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방대한 분량의 인쇄 보고서—을 폐기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대신, 이 소프트웨어는 정부가 특정 시점에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산업에 우선적으로 주의를 집중하고 자원을 분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능을 제공했습니다.
사이버스트라이드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 기술을 구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정부가 모든 곳에 동시에 개입하려 하기보다는, 한정된 자원을 가장 필요한 곳에 효율적으로 배분하도록 돕는 기술이었습니다.
또한 비어는 경제 시뮬레이터를 구축하기 위한 팀도 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시뮬레이터가 사이버스트라이드 소프트웨어를 보완하고, 정부의 "실험실" 역할을 하게 하려 했습니다. 이 시뮬레이터가 완성되면, 정부의 의사결정자들이 단기적인 운영을 넘어서 장기적인 경제 정책을 실험하고 계획할 수 있게 될 것이었습니다.
1972년 3월, 비어는 다시 칠레로 돌아왔습니다. 그때쯤 칠레 프로젝트 팀은 초기의 10명에서 35명으로 확대되어 있었습니다. 3월 중순, 컴퓨터 기관인 ECOM은 아서 앤더슨이 개발한 예비 사이버스트라이드 프로그램의 첫 결과를 전송했습니다. 이는 칠레에서 자체 개발 중인 영구 버전 소프트웨어가 완성되었을 때 실제로 이루어질 일일 운영을 모의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영구 버전 소프트웨어는 아직 갈 길이 멀었습니다. 칠레의 운영 연구 과학자들은 모든 국영 기업을 조사하고, 소프트웨어가 어떤 생산 지표를 모니터링해야 하는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또한 각 지표에 대한 허용 가능한 값의 범위도 설정해야 했습니다. 경제 시뮬레이터의 초기 버전 역시 이제 막 개발이 시작된 단계였습니다.
사이버스트라이드는 비어가 3월에 칠레를 방문하는 동안 중요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프로젝트의 새로운 명칭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 프로젝트는 '사이버신(Cybersyn)'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시너지(synergy)의 합성어입니다. 이 새로운 이름은 프로젝트의 사이버네틱스적 기반과, 인간과 기계가 함께 이루는 전체 시스템이 단순한 부분의 합보다 더 크다는 팀의 믿음을 반영했습니다.
이 시점부터 '사이버스트라이드(Cyberstride)'는 아서 앤더슨과 칠레 국가 컴퓨터 공사가 공동으로 개발하고 있는 소프트웨어 모듈, 즉 공장 생산성을 측정하기 위한 소프트웨어 제품군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한정되었습니다. 전체 프로젝트 명칭으로는 '사이버신(Cybersyn)'이 보다 적절했으며, 영어권에서는 그 발음이 자연스러웠지만, 스페인어 사용자들에게는 발음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에 따라 프로젝트는 별도의 스페인어 명칭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SYNCO, 즉 Sistema de Información y Control(정보 및 제어 시스템)의 약자였습니다.
그 방은 이후 인터페이스 디자인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이는 기술적인 참신함 때문이 아니라,
설계자들이 인간 운영자를 최우선으로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사이버스트라이드 시스템을 구성하던 세 가지 프로젝트 — 텔렉스 네트워크(사이버넷), 통계 소프트웨어(사이버스트라이드), 경제 시뮬레이터(CHECO) — 에 더해, 사이버신은 네 번째 구성 요소인 운영실에 더욱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 운영실은 비어가 자신의 에세이 「리버티 머신」에서 제안했던 전쟁 지휘실(war room)의 실현된 형태였습니다. 비어는 이렇게 썼습니다. “사이버신(CYBERSYN)의 목표는 … [이 도구들을] 효과적인 통제 센터로 통합하는 것이다 — 즉, 1972년 11월까지 설치될 운영실이다.”
이 운영실은 이후 인터페이스 디자인 분야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됩니다. 기술적인 참신함 때문이 아니라, 설계자들이 인간 운영자를 최우선으로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비어는 “인간-기계 인터페이스 개발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라고 명시하면서, 화려한 기술보다 사용자의 이해를 우선시했습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운영실은 흥미로운 장비들이 들어선 방이 아니라, 사람과 도구가 공생 관계를 이루는 하나의 통제 기계로 여겨져야 합니다. 전체적이며 작동 가능한 실체로서 설계되어야 합니다.”
이 운영실은 이후 사이버신 프로젝트를 상징하는 아이코닉한 이미지이자 상징적인 중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72년 말, 아옌데 대통령은 산티아고에 설치된 시제품 운영실을 직접 방문했습니다.
사이버신 프로젝트는 1972년 내내 지속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10월, 아옌데 정부와 프로젝트 전체의 흐름을 뒤바꾸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수천 명의 칠레 화물차 소유주들이 시작한 전국적인 파업이 칠레를 비상사태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이 파업은 부르주아 계급의 힘을 과시하고, 경제를 마비시키며, 쿠데타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의도로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파업을 극복하기 위해 아옌데 정부는 전국에 필수 물자의 분배를 유지할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정부는 사이버신 프로젝트를 위해 구축된 텔렉스 네트워크를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네트워크는 산업 부문을 넘어 칠레 최북단 아리카에서 최남단 푼타 아레나스까지, 약 5,152킬로미터(3,201마일)에 달하는 전국 각지로 빠르고 신뢰성 있게 메시지를 전송할 수 있도록 확장되었습니다. 비어는 파업 기간 동안 이 텔렉스 네트워크가 하루 평균 2,000건의 메시지를 전송했다고 추산했습니다. 비어는 “소음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당시 산업 통제 센터인 CORFO에 설치된 20대의 텔렉스 기계가 동시에 딸깍거리는 소리를 회상했습니다.
이 텔렉스 네트워크는 정부가 원자재, 연료, 운송 자원을 가장 필요한 곳으로 신속히 배분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또한 정부가 보유한 트럭의 위치를 추적하고, 어떤 도로가 차단되었고 어떤 도로가 열려 있는지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이러한 역할 덕분에 텔렉스 네트워크는 파업으로 인해 발생한 여러 긴급 상황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게 했고, 궁극적으로 정부가 위기를 견뎌내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파업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반대 세력은 정부를 끊임없이 수세적인 위치로 몰아넣었고, 정부는 겨우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습니다. 10월 파업은 또한 비어와 플로레스가 기술과 정치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플로레스는 사이버신이 여전히 유용하다고 생각했지만, 칠레 경제와 정치 문제의 규모와 범위를 조절하거나 칠레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이버신 프로젝트의 기술적 요소가 완성된다 해도, 통제 불가능한 인플레이션, 외국 신용 부족, 구리 가격 하락, 암시장 물자 비축, 폭력 사태 가능성 같은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플로레스는 아옌데 정부 내에서 점차 영향력을 키워가면서, 과학과 기술을 칠레 혁명 과정의 핵심 요소로 보던 관점에서 벗어나, 군사 쿠데타라는 현실적 위협 앞에서 과학과 기술이 가진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비어는 파업 이후 사이버네틱스가 단순한 생산 관리뿐만 아니라 칠레 사회주의의 여러 측면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파업 이후 몇 달 동안 그는 사이버신의 설계와 구축 과정에 사회주의적 가치를 내재화하는 새로운 방식을 구상했으며, 이러한 가치들이 작업 현장뿐 아니라 칠레 사회 전반의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이론화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노동자들이 사이버신의 사용을 통제해야 하며,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운영실을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키보드 타이핑 지식이 없어도 사용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 설계를 돕기도 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국영 공장의 모델 설계를 노동자들이 직접 해야 한다고 권고하며 “공장을 가장 잘 모델링할 수 있는 사람은 그곳에서 평생을 일하는 사람이다. 그는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비어는 또한 정부가 사이버신을 사회주의 하에서 칠레의 기술적 역량을 상징하는 홍보 수단으로 적극 활용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12월에는 사이버네틱스가 생산 관리뿐만 아니라 분배와 소비 조절까지 포함하는 칠레의 사회주의 전환 과정에서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1973년 2월 강연에서 그는 자신의 사이버네틱 관리 방식이 칠레 국민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과학의 힘을 국민의 손에 쥐어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비어는 청중에게 “나는 권력 이양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정부도 그 점을 혁명의 핵심으로 삼았다. 나는 이것이 좋은 사이버네틱스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칠레에서 개발 중인 도구들이 “국민의 도구”이며, 그의 시스템은 칠레 노동자들과 협의하여 설계되었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칠레 야당 측에서는 이 시스템을 정부의 감시를 강화하고 권력 남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통제로 비판하며 반발했습니다.
8월에 야당은 유통을 차단하고 경제를 파괴하며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두 번째 트럭 운전사 파업을 벌였습니다. 정부는 다시 한 번 프로젝트 사이버신을 위해 구축된 텔렉스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실시간 적응형 관리 방식을 시행했습니다. 이 네트워크는 어떤 트럭이 이용 가능한지, 자원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도로가 개방되어 있는지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계속 운행 중인 트럭, 버스, 기차에 대한 야당의 물리적 공격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8월 중순까지 20명이 사망했습니다. 공장에서는 점점 더 많은 칠레 노동자들이 급진 좌파 운동(MIR)에 동참하며 무장 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알렌데 대통령은 플로레스를 정부의 총서기로 임명했는데, 이 직책은 정부의 내외부 통신을 책임지는 자리였습니다. 당시 플로레스는 30세로, 공격받는 정부 내에서 가장 높은 직위 중 하나를 맡게 되었습니다.
칠레 군부가 사회주의 실험을 폭력적으로 끝내기 몇 일 전, 알렌데 대통령은 사이버신 운영실을 현재 위치에서 대통령 궁인 라 모네다로 옮기기를 요청했습니다. 알렌데가 왜 운영실을 라 모네다에 두고 싶어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알렌데는 나라의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 사이버네틱 전쟁실을 설치하는 것처럼 다소 비현실적인 방법이라도 시도해보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운영실은 결국 새로운 장소로 옮겨지지 못했습니다.
에덴 메디나는 MIT 과학기술사회학과의 부교수입니다. 이 글은 그녀의 저서 『사이버네틱 혁명가들: 알렌데의 칠레에서의 기술과 정치』에서 발췌하여 각색한 내용입니다.
[원문 및 참고]
https://www.aipolicyperspectives.com/p/stafford-beer-and-ai-as-variety-engineering
https://99percentinvisible.org/episode/project-cybersyn/
https://transform-social.org/en/texts/cybersy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