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w Yorker - 무성영화부터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까지
들어가며
2021년 무렵, 학부 문화예술 경영 전공 수업으로 [영화와 서사]라는 수업을 들었었다. 수업은 할리우드 영화를 중심으로 기술 발전에 따른 영화 제작과 영화의 내재적 성격의 변천, 영상 "편집"의 기술이 관람자에게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등 영화를 중심으로 유물론적(교수님이 사용한 용어 X, 자본, 기술, 산업 구조의 변화를 중심으로 영화를 분석한 방식이 마치 유물론적 접근처럼 느껴졌음) 접근법으로 조명한 강의였다. 스스로 시네필이라 칭하기는 부끄럽지만 학창 시절부터 그냥 즐기기 이상으로 영화를 좋아하던 터라 디자인 수업이 아님에도 꽤나 즐겁게 수업에 참여했고 이 글에서는 수업에서 다뤘던 아티클 중 기억에 남는 텍스트를 공유해보고 싶다.
아마 바그너를 조금 아는 사람은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심상이 있을 것 같다. 웅장한 오페라, 장대한 서사, 독일 민족주의, 히틀러가 좋아하던 음악가 등등... 바그너를 잘 모르는 사람도 이름정도는 들어봤거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과정에서 언급되던 [바그너 그룹]을 들어 봤을 것이다.
내가 들은 수업에서는 바그너의 음악 니벨룽의 반지 중 [발퀴레의 기행]이 다양한 영화에서 삽입되어 쓰인 방식을 비교하고 설명했었다. 하나의 곡이 다양한 맥락에서 어떤 방식으로 쓰이는지 살펴보니 꽤나 흥미로웠고 같은 음악이 가진 의미작용의 변천이 드러나는 좋은 사례라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아래글은 The New Yorker에서 2020년 8월 24일에 작성된 글을 번역한 글입니다.
1915년 2월, D. W. 그리피스(D. W. Griffith)의 무성 영화『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이 로스앤젤레스의 클룬 극장(Clune’s Auditorium)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는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영화”, “세계의 여덟 번째 불가사의”라는 수식어로 홍보되었다. 이후 상영에서는 영화 음악의 선구자 조지프 칼 브릴(Joseph Carl Breil)이 여러 작곡가의 음악을 엮어 구성한 스코어를 50인조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남북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자 토마스 딕슨 주니어(Thomas Dixon, Jr.)의 소설 『클랜즈맨(The Clansman: An Historical Romance of the Ku Klux Klan)』을 바탕으로 한다. 클라이맥스 장면에서는 KKK 단원들이 말을 타고 등장해, 영화 속에서 "억압적인 흑인 통치"로 묘사된 상황에서 남부의 마을을 구해낸다. 이 장면의 음악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의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그의 초기 오페라 『리엔치(Rienzi)』의 한 대목이 흐른 뒤, 『발퀴레(Die Walküre)』에서 발췌한「발퀴레의 기행(Ride of the Valkyries)」가 편곡되어 이어진다. 절정의 순간, 자막에는 “흑인들을 무장 해제시키다”라고 나온다. 이때는 음악이 바그너에서「딕시(Dixie)」로 전환되는데, 이 음악은 남부의 비공식 국가(國歌)이다. 이어지는 자막은 그리피스가 꿈꾸는 ‘새로운 국가’의 방향을 명확히 보여준다.
“남과 북의 옛 적들이 이제 ‘아리안 혈통’이라는 공동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다시 하나가 되었다.”
『국가의 탄생』은 이후 100년 동안 이어진 영화 속 바그너식 ‘공격성’의 기준을 세웠다. 지금까지 천 편이 넘는 영화와 TV 프로그램이 바그너의 음악을 사운드트랙에 사용했으며, 그의 곡들은 온갖 형태의 폭력적인 군중, 진군하는 군대, 과장된 영웅, 교활한 악당들과 함께 등장해 왔다. 그중에서도「발퀴레의 기행」은 가장 다양한 상황 속에 쓰였다. 예컨대 애니메이션 『왓츠 오페라, 닥?(What’s Opera, Doc?)』에서는 엘머 퍼드가 “토끼를 죽여라(Kill da wabbit)”라고 외치며 벅스 버니를 쫓고, 존 랜디스의 영화 『블루스 브라더스(The Blues Brothers, 1980)』에서는 우스꽝스러운 신나치들이 주인공을 쫓는 고속도로 추격전 중 이 곡이 흘러나오며, 이들은 결국 고가도로에서 떨어진다. 그러나 이 곡이 가장 인상 깊게 사용된 장면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1979)』이다. 이 영화는 그리피스의 인종 이분법을 전복시키며, 백인 미국인들을 파괴의 전령으로 묘사한다. 헬리콥터 부대가 베트남 마을을 초토화시키며 이 곡을 틀어댄다.
하지만 바그너가 영화에서 쓰인 방식은 단순한 전투 장면에만 그치지 않는다. 영화 속에는 수상쩍고도 다채로운 바그너 애호가들이 등장해 왔다. 로버트 시오드막의 느와르 영화 『크리스마스 홀리데이(Christmas Holiday)』의 슬픈 연인들부터,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 커버넌트(Alien: Covenant)』에 등장하는 악마 같은 안드로이드까지 다양한 캐릭터들이 있다. 바그너 본인도 여러 차례 영화 속 인물로 등장했으며, 대표적으로는 리처드 버튼이 주연을 맡은 토니 팔머의 1983년작 8시간짜리 대작 전기 영화가 있다.
그러나 영화 속 바그너의 흔적은 단순한 인물 등장이나 배경 음악을 넘어서 더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있다. 이미지, 대사, 음악이 결합된 영화라는 매체는 바그너가 한때 주장했던 '총체 예술(Gesamtkunstwerk, 총합적 예술 작품)'의 개념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그는 캐릭터와 주제에 특정 음악을 대응시키는 ‘라이트모티프(leitmotif)’ 기법(역자설명:인물, 상황 등 반복되는 짧은 주제나 동기를 묘사할 때마다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주제선율)을 도입했는데, 이는 영화 음악에서 주요한 작곡 기법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할리우드는 바그너의 신화적 원형들—신, 영웅, 마법사, 모험가—을 반복적으로 차용해 왔다.
https://www.youtube.com/watch?v=MO-ZFut5vTI
이런 모순된 이미지의 소용돌이는 바그너라는 인물의 분열된 유산을 반영한다. 한편으로 그는 셰익스피어적인 폭과 깊이를 지닌 극작품을 창조한 연극적 비전가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히틀러에게 문화적 상징으로 추앙받은 악명 높은 반유대주의자였다. 여러 세대에 걸친 오페라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영화 제작자들 또한 바그너가 끝없는 경이의 원천인지, 아니면 증오의 심연인지 판단을 내리는 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모호함은 영화 산업 자체의 이중적 정체성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영화 산업은 영웅적 판타지를 부화시키는 공간이자, 그것이 정치적으로 어떻게든 이용될 수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할리우드가 바그너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종종—의식적이든 아니든—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셈이다.
1876년, 독일 바이로이트 축제극장(Bayreuth Festspielhaus)에서 『니벨룽의 반지(Ring of the Nibelung)』 초연이 열렸을 때, 일종의 ‘영화적 경험’이 태어났다. 바그너의 친구가 아니었던 빈의 음악 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Eduard Hanslick)는 그 무대를 “어두운 액자 속의 화려한 그림”이라 표현했는데, 마치 디오라마 전시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바그너는 실제로 그와 같은 무대를 의도했으며, 무대 장면은 “꿈속 환영처럼 범접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케스트라는 ‘신비의 심연(mystic abyss)’이라 불리는 무대 아래 움푹 팬 공간에 숨겨져 있었고, 그 소리는 마치 스피커 시스템을 통해 전해지듯 객석을 가득 채웠다. 이 첫 공연들은 거의 암흑에 가까운 조명 속에서 이루어졌다. 미디어 이론가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영화관의 어둠은 이 축제극장에서 비롯되었다.”
바이로이트의 기술적 성과는 이후 영화적 속임수들을 예고했다. 『반지』에서는 마법 랜턴(projection)을 이용해 하늘을 나는 발퀴레들을 표현했고, 『파르지팔(Parsifal)』에서는 성배가 전기 조명으로 빛났다. 두 개의 증기 기관차 보일러에서 생성된 수증기는 장면 전환을 부드럽게 연결해 주었으며, 이는 훗날 영화에서 사용하는 디졸브(dissolve)나 페이드아웃(fade-out) 기법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바그너의 음악 자체도 최면을 거는 듯한 연속성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에서 배경이 라인강에서 발할라 근처로 전환될 때, 대본의 무대 지시문에는 “물결이 점차 구름으로 바뀌고, 이내 가느다란 안개로 흩어진다”라고 되어 있다. 음악적으로는 격렬하게 흐르던 강의 패턴이 반짝이는 트레몰로로 바뀌고, 이어서 플루트와 바이올린의 더 희미하고 고요한 질감으로 전환된다. 음악학자 피터 프랭클린(Peter Franklin)은 이를 “정교한 위쪽 패닝 샷(elaborate upward panning shot)”에 비유한다.
또한 난쟁이들이 사는 니벨하임(Nibelheim)으로 내려가는 장면에서는 모루를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크레셴도로 표현되다가 서서히 사라진다. 이는 마치 돌리 샷(dolly shot)처럼 연출된다. 카메라가 니벨룽족의 작업 장면으로 가까이 다가갔다가, 다시 멀어지는 것과 같다.
『발퀴레(Die Walküre)』 3막에서 펼쳐지는 아홉 발퀴레들의 집결 장면은 바그너 최고의 액션 시퀀스 중 하나로, 거대한 에너지의 축적과 역동적인 힘의 집합을 탁월하게 연출한 장면이다. 초반에는 바람을 형상화한 듯한 관악기의 트릴과, 현악기의 빠른 상승 음형이 어우러지고, 호른과 바순, 첼로가 중간 볼륨으로 말 달리는 듯한 리듬을 형성한다.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관현악기의 겹겹이 엇갈린 진입과 하강 음형이 섞인 복잡한 텍스처가 등장하며, 마지막으로 호른과 베이스 트럼펫이 주요 테마를 선보인다. 이후 이 주제는 점차 강화되어 트럼펫, 추가 호른, 그리고 네 대의 장엄한 트롬본이 더해진다. 하지만 이 모든 연주는 처음에는 포르테(forte, 역자 설명 : 음악에서의 강세 중 하나)의 동적 수준에서 절제되며, 점차 포르티시모(fortissimo)를 향해 나아가는 크레셴도를 준비한다. 마침내 늦게 도착한 두 발퀴레—로스바이세(Rossweisse)와 그림 게르데(Grimgerde)—가 등장하면, 콘트라베이스 튜바가 포르티시모로 트롬본 아래서 울려 퍼지며, 강력한 지원군이 도착한 듯한 인상을 준다.
바그너의 음악은 무성영화 시대 초기부터 영화 음악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발퀴레의 기행(Ride of the Valkyries)」은 전투나 말이 달리는 장면에, 「마법의 불(Magic Fire)」 장면의 음악—신 바오탄(Wotan)이 발퀴레 브륀힐데를 불꽃의 고리로 감싸는 장면—은 실제로 깜박이는 불꽃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Flying Dutchman)』의 서곡은 바다나 폭풍우 장면에, 『탄호이저(Tannhäuser)』와 『파르지팔(Parsifal)』은 종교적인 장면에 쓰였으며, 『로엔그린(Lohengrin)』의 결혼행진곡(Bridal Chorus)은 결혼식 장면의 음악으로 말할 것도 없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용 관행을 감안하면,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에서 「발퀴레의 기행(Ride of the Valkyries)」이 사용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객은 그 음악 선택에 담긴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피스(Griffith)가 딕슨(Dixon)의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KKK 단원들의 기마 행렬 장면이 특히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 흰색 로브를 휘날리며 달리는 KKK 단원들이 영화 속 장면으로 그대로 떠올랐어요.”
아마도 그리피스는 이 장면에 바그너의 음악을 넣겠다는 생각을 꽤 일찍부터 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연 배우 릴리언 기시(Lillian Gish)에 따르면, 영화 음악을 맡은 조지프 칼 브릴(Joseph Carl Breil)과 그리피스는 「발퀴레의 기행」을 두고 언쟁을 벌였다. 그리피스는 음악을 약간 수정하고 싶어 했지만, 브릴은 “바그너를 함부로 손대선 안 됩니다!”라고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결국 그리피스가 이겼던 것으로 보인다.
KKK 단원들이 집결하는 장면—흰옷을 입은 기사들이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는 유명한 장면—에서는 먼저 바그너의 『리엔치(Rienzi)』 서곡의 일부가 들려온다. 이후 기마대가 ‘구출 작전’을 개시하면 편곡된 「발퀴레의 기행」이 터져 나온다. 당시 관객들이 이 장면에서 받은 충격과 전율은 애틀랜타 상영회에서의 관람 후기에서 엿볼 수 있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발코니석에서는 나팔 소리마다 함성이 터져 나왔다.”
『국가의 탄생』은 남북전쟁 이후 흑인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KKK의 부흥을 촉진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매슈 윌슨 스미스(Matthew Wilson Smith)는 이 영화에 대한 통찰력 있는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그리피스의 바그너 활용은 바이로이트(Bayreuth)의 가장 반동적인 에너지와 영화적 통합의 선구적 기법을 결합시킨 것이다.”
이는 타당한 평가다. 다만 주목할 점은, W. E. B. 듀보이스(W. E. B. Du Bois)가 1903년 발표한 단편소설 「존의 도래(Of the Coming of John)」에서 바그너를 전혀 정반대의 방식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듀보이스는 바그너의 음악을, 백인 기마 폭도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될 흑인 남성의 내면 깊은 갈망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 맑은 음악과 함께, 자신을 억압하고 더럽혀온 천한 삶의 먼지와 진흙 속에서 벗어나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깊은 갈망이 온 마음속에 부풀어 올랐다.”
듀보이스는 아마도 딕슨(Dixon)과 그리피스(Griffith)의 인종차별이 굳이 독일적 선례에 기대지 않아도 될 만큼 자생적이었다는 점을 지적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 영향은 정반대 방향으로 흐른 셈이다. 나치 독일은 미국의 흑인 및 소수 인종 차별 법제를 높이 평가하며 그것을 모방했다.『국가의 탄생』에 삽입된 「발퀴레의 기행」은, 바그너의 ‘사악한 영향력’보다는 미국 백인 우월주의의 문화적 오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토키(역자 설명 : 유성영화) 시대에 접어든 이후, 할리우드 황금기의 풍성한 제작 가치는 영화의 시작 타이틀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음악의 양탄자’를 요구하게 되었다. 1930년부터 1965년까지 약 300편의 영화 음악을 작곡한 맥스 스타이너(Max Steiner)는 라이트모티프(leitmotif) 기법을 거의 과학 수준으로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카사블랑카(Casablanca)』에서 “As Time Goes By”는 두리 윌슨(Dooley Wilson)이 노래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이 멜로디는 스타이너의 전체 스코어 속에도 흘러들어 가며 다양한 감정적 변주를 겪는다. 모험 영화의 대가였던 작곡가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Erich Wolfgang Korngold)는 라이트모티프를 정교하게 발전시키고, 변형하고, 결합하고, 압축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바그너의 음악 자체도 다양한 장르의 영화 속에서 울려 퍼졌다. 액션 어드벤처 영화(『라이언 맨(The Lion Man)』), 역사극(『더 바이킹(The Viking)』), 멜로드라마(『더 라이트 투 리브(The Right to Live)』), 갱스터 영화(『시티 스트리트(City Streets)』), SF(『플래시 고든(Flash Gordon)』), 서부극(『레드 리버 밸리(Red River Valley)』), 공포 영화(토드 브라우닝의 『드라큘라(Dracula)』와 『프릭스(Freaks)』) 등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프랭크 보제이지(Frank Borzage)가 1932년에 영화화한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게리 쿠퍼(Gary Cooper)가 헬렌 헤이즈(Helen Hayes)의 시신을 안고 “평화(Peace)!”라고 외치고, 그 순간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가 고조된다. 하지만 보제이 지는 더 감상적이지 않은 장면도 연출했는데, 전쟁의 악몽 같은 몽타주 장면에서는 「발퀴레의 기행」과 『반지』의 다른 모티프들이 뒤섞인 음악이 흐른다.
『국가의 탄생』 이후로 「발퀴레의 기행」은 거의 항상 남성의 무용담이나 영웅적 행동을 상징하는 음악으로 쓰였으며, 그 원래 주인공인 발퀴레들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거의 무시되었다. 예외적인 사례로는 요제프 폰 스턴베르크(Josef von Sternberg)의 1934년작 『스칼렛 엠프레스(The Scarlet Empress)』가 있다. 이 영화는 예카테리나 대제(Catherine the Great)의 등장을 다루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말렌 디트리히(Marlene Dietrich)가 말을 타고 차르의 궁전으로 돌진하는 장면에 발퀴레 판타지가 배경음악으로 흐른다.
코미디언들은 바그너를 훨씬 가볍고 풍자적으로 다뤘다. 마르크스 형제의 『엣 더 서커스(At the Circus, 1939)』에서는 마거릿 듀몽(Margaret Dumont)이 자신이 사는 로드아일랜드 뉴포트의 대저택에서, 거만한 프랑스 지휘자와 그의 오케스트라를 초청해 연주회를 연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출연료를 받으려는 서커스 공연단—그라우초 일행—은 이 경쟁자들을 물가에 대기하고 있던 뗏목에 유인한 뒤, 줄을 끊어버린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 프랑스 연주자들이 『로엔그린(Lohengrin)』 3막 전주곡을 연주하며 바다 한가운데로 둥실둥실 떠내려가는 모습이 나온다—이는 대중문화 시대 속에서 고전음악이 처한 운명을 암시하는 훌륭한 은유라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바그너에 대한 할리우드의 이미지도 불가피하게 어두워졌다. 1930년대 대부분의 시기 동안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독일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반(反) 나치적 메시지를 피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던 중, 1939년 워너 브라더스(Warner Bros.)에서 제작한 스릴러 영화『나치 스파이의 고백(Confessions of a Nazi Spy)』가 전환점을 마련했다. 이 영화의 음악은 맥스 스타이너(Max Steiner)가 맡았으며, 1940년 재개봉 당시에는 독일군의 최근 승리에 대한 다큐멘터리풍의 에필로그가 추가되었고, 음악 역시 「발퀴레의 기행」 및 『반지』의 다른 모티프들을 일그러진 형태로 암시하는 방식으로 보강되었다.
같은 시기, 바그너를 사랑하는 나치라는 클리셰가 대중문화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예컨대 1940년 드라마 『탈출(Escape)』에서는, 나치 장군(콘라드 바이트 Conrad Veidt)이 점차 정권의 사악함을 인식해 가는 귀족 미망인(노마 시어러 Norma Shearer)과 관계를 맺는다. 장군이 피아노로 바그너를 연주하자, 시어러는 “다른 곡 좀 연주해 주세요.”라고 말한다. 장군은 “『트리스탄』이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오페라 아니었나?”라고 묻지만,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너무 자주 들어서 그런가 봐요.”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 직후, 프랭크 카프라(Frank Capra)는 신병들에게 미국의 사명을 설명하는 선전 영화 제작에 착수했다. 그 준비 과정에서 그는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의 1935년 영화『의지의 승리(Triumph of the Will)』를 시청했고, 처음엔 “우리는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라고 생각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 영화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바그너 오페라의 장엄한 화려함과 신비로운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었지만, 그 메시지는 납 파이프처럼 직설적이고 잔혹했다. ‘우리는, 아리안 지배 민족(Herrenvolk), 새로운 무적의 신들이다!’”
(※ 『의지의 승리』에는 고대 뉘른베르크를 기리는 장면에서 『마이스터징어(Die Meistersinger)』의 90초 분량이 사용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한 끝에, 카프라는 나치의 사운드와 분노를 그들 자신에게 되돌려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우리는 왜 싸우는가(Why We Fight)』 시리즈다. 이 일곱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는 냉철한 역사적 해설과 파시스트 및 일본 제국주의의 위선적인 자세를 조롱하는 내레이션이 결합된 형태였다. 이 프로젝트에는 디미트리 티옴킨(Dimitri Tiomkin), 알프레드 뉴먼(Alfred Newman), 데이비드 락신(David Raksin) 등 할리우드의 유능한 작곡가들이 음악 작업에 참여했다.
『우리는 왜 싸우는가(Why We Fight)』 시리즈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전쟁의 서막(Prelude to War)」은 이 시리즈의 핵심 질문에 음악적으로 신속히 답을 제시한다. 내레이터가 자유 세계와 노예화된 세계 간의 전쟁에 대해 설명할 때, 오케스트라는 『반지』에서 지크프리트의 주요 주제를 약하게, 불길한 방식으로 인용한다. 이 주제는 시리즈 전반에 걸쳐 불협화음적 변형으로 수십 번 반복되며 등장한다. 이러한 창의적인 왜곡은 적에게 쉽게 식별 가능한 청각적 상징을 부여하는 동시에, 이야기의 전진하는 에너지를 부여한다.
비록 바그너는 이 시리즈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그의 음악은 여전히 영웅적인 분위기를 불어넣는다. 때때로 우리는 미국의 애국가들이 바그너풍으로 웅장하게 편곡된 형태로 등장하는 것을 듣게 된다. 결국 미국 측도 무적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우리는 왜 싸우는가』의 서두는 이렇게 선언한다: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 국기는 전 세계적으로 자유의 상징으로, 동시에 압도적인 힘의 상징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할리우드는 바그너의 강렬한 음악적 활력에 지나치게 매료되어 있었기에, 그를 완전히 악마화할 수는 없었다. 이 점은 애니메이션의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음악학자 다니엘 아이라 골드마크(Daniel Ira Goldmark)에 따르면, 워너 브라더스(Warner Bros.)의 애니메이션 중 100편이 넘는 작품의 사운드트랙에 바그너의 음악이 등장한다. 전쟁 기간 동안 애니메이션이 선전 도구로 활용되면서, 이들 음악 인용은 반나치적 함의를 띠게 되었다.
예컨대 『Herr Meets Hare』에서는 벅스 버니(Bugs Bunny)가 검은 숲(Black Forest)에 들어가,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 나치 독일의 공군사령관)을 연상케 하는 인물과 맞닥뜨린다. 칼 스탈링(Carl Stalling)의 음악은 그를 향해 바그너의 주제들을 정신없이 뒤섞은 혼란스러운 클러스터로 묘사한다. 그러나 『Hare We Go』나 『Captain Hareblower』 같은 다른 작품들에서는 나치의 악행을 암시하는 흔적 없이 바그너 음악이 사용된다.
한편, 일본인을 조롱하는 선전용 애니메이션인 『Bugs Bunny Nips the Nips』에서는 바그너의 음악이 연합군 측에 편입되는 모습까지 보인다. 스탈링의 음악은 지크프리트 모티프를 벅스의 구조 가능성을 암시하는 미군 전함의 등장에 사용하며, 결국 벅스는 구조를 거부하고, 섹시한 여성 토끼와 함께 남는 것을 선택한다.
영화음악 연구자 닐 러너(Neil Lerner)는 미국화된 바그너 음악이 일본인에 대한 노골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묘사와 불편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찰리 채플린은 『의지의 승리(Triumph of the Will)』를 보고 난 직후,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에 따르면, 폭소를 터뜨렸다. 화면 속 연설자는 채플린의 리틀 트램프(Little Tramp) 캐릭터를 광기로 변형한 듯한 모습이었고, 심지어 칫솔 수염까지 닮아 있었다. 그러나 이 경험은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이는 독일 영화의 기술적 정교함이 사악한 목적에 쓰이는 것을 본 많은 좌파 영화인들이 느낀 충격과 다르지 않았다.
1940년, 채플린은 히틀러의 과장된 연극적 제스처를 풍자한 대작『위대한 독재자(The Great Dictator)』를 발표했다. 이 영화에서도 바그너의 음악이 사운드트랙에 등장하지만, 채플린은 의외의 선택을 한다—그 음악을 나치 맥락에서 분리시키는 것이다. 성배의 신성한 힘을 상징하는 듯한 『로엔그린(Lohengrin)』의 신비로운 전주곡은 영화에서 두 번 등장하는데, 한 번은 나치의 아이콘을 희화화하는 용도로, 또 한 번은 평화의 메시지를 고조시키는 용도로 쓰인다.
영화에서 히틀러는 아데노이드 하인켈(Adenoid Hynkel)이라는 이름의 어리석은 독재자로 풍자된다. 그는 엉뚱한 독일어 흉내를 내며 재잘거리며, 다소 여성스러운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피아노 주변에 촛대가 놓인 채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어느 순간에는 꽃을 들고 오스카 와일드를 연상케 하는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그의 선전 장관 가르비치(Garbitsch)가 모든 유대인을 죽이고 하인켈을 “세계의 독재자”로 만들자고 제안하자, 하인켈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커튼을 타고 올라가 연극처럼 과장되게 외친다:
“날 내버려 둬, 혼자 있고 싶어!”
그 순간, 『로엔그린』 전주곡의 높고 섬세하며 빛나는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고, 하인켈은 커튼을 타고 내려와 바닥을 기어 다니다가 거대한 지구본 앞으로 다가간다.
“세계의 황제…” 그가 중얼거린다.
그는 지구본을 거치대에서 빼내어 손가락으로 돌리며 히스테릭하게 웃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채플린 특유의 무언극 발레와도 같은데, 그는 지구본을 손에서 손으로, 머리 위로, 발끝으로, 심지어 엉덩이로 두 번이나 튕기며 우스꽝스럽고도 은유적인 퍼포먼스를 펼친다.
이와 병행하여 전개되는 또 다른 이야기 줄거리는 유대인 이발사의 고난을 보여준다. 그는 하인켈(Hynkel)과 똑같이 생긴 인물로,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역전된 역할이 중심 테마다. 하인켈은 이발사로 오인되어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고, 이발사는 하인켈의 집회에서 연설을 하게 되는 상황에 처한다. 그의 마지막 연설은 자본주의의 무자비함을 비판하고 형제애를 호소하는 감동적인 연설이다. 군중들이 환호한 뒤, 그는 망명 중인 연인 **한나(Hannah)**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이때 『로엔그린(Lohengrin)』의 음악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이발사는 연설의 절정을 향해 나아가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 더 다정한 세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인간이 증오와 탐욕, 잔혹함을 넘어설 것입니다. 한나, 고개를 들어요!”
한나는 들판에 앉아, 라디오를 통해 이발사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그녀는 경이로운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외친다:
“들려요!”
그 순간, 『로엔그린』의 음악이 그녀를 둘러싼 공기 속에서 웅장하게 울려 퍼진다. 마치 하늘 위에서 직접 연주되는 것처럼. 영화학자 루츠 쾁닉(Lutz Koepnick)은 채플린이 바그너의 음악을 통해
“파시즘이 판타지를 남용한 것을 비판하는 동시에, 산업 문명이 지닌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옹호한다”고 말한다.
어떤 관객에게는 채플린의 이상주의가 몹시 순진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며, 그의 히틀러 풍자가 나치의 공포를 희화화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순진함’이야말로 채플린의 지속적인 매력의 핵심이다.
바그너의 열렬한 숭배자이기도 했던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은 언젠가 채플린을 이렇게 평했다:
“나이 든 바그너가 꿈꾸던 바로 그 ‘거룩한 순진무구함(Holy Innocent)’의 진정하고 감동적인 구현이다.”
전후 시대에 접어들며, 바그너식 악(惡)의 모티프는 영화 전반에 걸쳐 만연하게 되었다. 전쟁 또는 스파이 테마의 영화에서 바그너를 좋아하는 캐릭터는 나치와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표식 중 하나가 되었으며, 거의 하켄크로이츠 완장만큼이나 신뢰할 만한 지표였다. 예컨대『브라질에서 온 소년들』(1978)에서는 요제프 멩겔레가 히틀러 복제 인간 계획을 감독하면서 『지크프리트 목가(Siegfried Idyll)』를 감상한다. 반대로,『5 Fingers』(1952)에서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en)을 모델로 한 인물이 “바그너는 역겨워”라고 말하는 순간, 관객은 그가 완전히 악하지는 않다는 것을 암시받는다.
이러한 상징적 확장에 따라, 바그너는 사디스트나 냉혈한 살인자의 음악적 취향으로 자주 묘사되었다. 줄스 다신(Jules Dassin)의 느와르 영화『야수의 힘(Brute Force)』(1947)에서는, “약자는 죽어야 한다”는 가짜 니체 철학을 따르는 교도관이 재소자를 고문하기 전 자신의 사무실에서 『탄호이저 서곡』을 재생한다.
하지만 동시에, 바그너는 여전히 보다 순수하고 고전적인 상징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윌리엄 디터레(William Dieterle)의 1955년 바이오픽 『매직 파이어(Magic Fire)』에서는, 앨런 베이델(Alan Badel)이 광기 어린 낭만주의자로서 창작의 뮤즈에 사로잡힌 바그너를 연기하며, “트리스탄이 죽어가고 있는데, 내 안부를 묻다니!” 같은 대사를 내뱉는다. 고문가들이 애호하던 작곡가 바그너는, 여전히 수많은 신부들의 결혼식 입장 행진곡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Gentlemen Prefer Blondes)』에서는 마릴린 먼로와 제인 러셀이 『로엔그린』의 브라이덜 코러스를 따라 입장하고, 이는 곧바로 “Two Little Girls from Little Rock”과 “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로 이어진다.
중부유럽 출신의 망명 감독들은 전시 및 전후 할리우드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미국 감독들보다 바그너를 더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종종 바그너를 망가진, 오염된 과거의 상징으로 활용했다. 빌리 와일더(Billy Wilder)의 『A Foreign Affair』(1948)는 점령 하의 베를린을 배경으로, 미국 당국이 마를렌 디트리히가 연기한 카바레 가수의 나치 과거를 조사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당국은 히틀러가 그녀의 손에 키스하는 장면이 담긴 『로엔그린』 갈라 공연 뉴스릴을 본다. 그 광경을 본 한 인물은 “베를린이 불탈 때, 제대로도 연주했군.”이라고 냉소하고, 또 다른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로엔그린』이지. 백조의 노래(swan song) 말이야.”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느껴지는 초월적인 황홀함은 장 느굴레스코(Jean Negulesco)의 멜로드라마와 느와르가 결합된 영화 『휴머레스크(Humoresque)』(1946)에서도 고귀하면서도 어두운 방식으로 작용한다. 영화는 몰락한 사교계 여성(조안 크로포드)이 하층 계급 출신의 촉망받는 바이올린 솔리스트(존 가필드)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러나 그의 애매한 태도와 거절은 그녀를 극단적 절망으로 몰고 가고, 결국 그녀는 바다로 걸어 들어가 자살한다.
그녀가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라디오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하는 『이졸데의 사랑의 죽음(Liebestod)』 편곡 버전이 흘러나온다. 이 여성 주인공은 전형적인 팜 파탈(femme fatale)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음악학자 마르시아 시트론(Marcia Citron)에 따르면, 그녀의 죽음은 남성 주인공의 성장에 필요한 통과의례로 기능한다. 그러나 조안 크로포드의 섬뜩할 정도로 강렬한 연기는 영화 전체를 감싸고 있으며, 이를 통해 바그너 음악이 할리우드에 들어오면서 종종 사라지는 절박하고 비극적인 낭만주의의 기운을 되살려낸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이전 수십 년 동안, 공중전은 종종 『발퀴레의 기행(Ride of the Valkyries)』과 관련된 상상력을 자극해 왔다. 바그너는 발퀴레를 타고 하늘을 나는 “공중의 말(air-horses)”이라 묘사했는데,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 권인 『되찾은 시간(Time Regained)』에서 이를 언급한다. 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애호가인 로베르 드 생루(Robert de Saint-Loup)는 1916년 파리를 향한 독일 비행선(체펠린)의 공습을 목격하며 외친다.
“사이렌의 음악이 바로 『발퀴레의 기행』이야!”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지휘한 『발퀴레의 기행』 공연은 B-17 폭격기의 비행과 연결되어 기억되었고, 나치 독일 또한 동일한 구상을 활용했다. 한 독일 뉴스릴에서는 이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며, 크레타섬에 대한 낙하산 부대 공격 장면이 펼쳐진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 영화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의 헬리콥터 작전에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Ride of the Valkyries)』을 사용하는 것은 마치 운명처럼 보인다. 이 아이디어는 영화의 각본가 존 밀리어스(John Milius)의 머릿속에서 처음 나왔다. 그는 베트남전 당시 미군이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적을 위협하기 위해 음악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이에 착안해 바그너를 헬리콥터 씬에 넣기로 한 것이다. 훗날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실제로 미군은 바그너를 틀지 않았어요. 록 음악 같은 걸 틀었죠. 하지만 난 바그너가 훨씬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야심 찬 인물답게, 밀리어스의 각본은 여러 고급문화적 레퍼런스를 끌어들인다. 문학적 주요 참고점은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이다. 영화 속 주인공 윌러드(Willard)는 특수 작전 병사로, 정글에서 광기에 빠져 자신의 제국을 만든 커츠 대령을 추적하고 제거하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이는 콘래드 소설 속 악당의 설정과 유사하다. 보수 성향의 유대계 미국인인 밀리어스는 반전 메시지를 의도하지 않았다. 그는 1967년 중동 6일 전쟁 직후 이 영화 작업에 착수했으며, 이스라엘의 진격을 흥분 속에 지켜봤다. 그는 작가 로렌스 웨슈슬러(Lawrence Weschler)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승전 과정을 매일매일 따라가며 가슴이 뛰었어요. 그해 여름에는 ‘Light My Fire’가 유행했는데, 물론 바그너도 들었죠.”
일부 학자들은 이 헬기 장면을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에서 KKK가 공격해 오는 장면과 비교하기도 한다. 공수 부대원들이 마치 기병대처럼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밀리어스는 바그너 음악이 그리피스 영화에 사용된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퀀스의 도입부에서, 공수부대 지휘관인 킬고어 중령(Lieutenant Colonel Kilgore)은 윌러드 일행에게 자신의 전술을 설명하며 인종차별적 발언을 던진다.
KILGORE: 우리는 해가 떠오를 무렵 저공으로 진입해, 1마일쯤 남았을 때 음악을 틀 거야.
LANCE: 음악이요?
KILGORE: 그래, 나는 바그너를 써—슬로프(동양인들)들이 기겁하지. 우리 애들이 정말 좋아해.
이후 음악이 울려 퍼지고, 카메라는 바그너의 박자에 맞춰 헬기에 부착된 스피커들을 보여주며 장면을 구성한다. 그러나 이 엄격한 리듬감은 잠시 깨지는데, 그 순간 카메라는 윌러드 부대의 두 흑인 병사(알버트 홀, 로렌스 피시번 분)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들의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은 이 장면에 담긴 은밀한 메시지를 부각한다: 백인 미국인들이, 인종차별주의 작곡가의 음악을 틀며 유색인 마을을 공격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 남성적 야만의 퍼레이드를 이끄는 음악이 과거엔 여성주의적 상징성을 지녔다는 점이다.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에 사용된 『발퀴레의 기행(Ride of the Valkyries)』은 게오르그 솔티(Georg Solti)가 지휘한 데카(Decca) 레이블의 명반 『니벨룽의 반지(Ring Cycle)』 녹음에서 가져온 것이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발퀴레』 3막 초반 143마디 중 약 5분 분량을 발췌하여, 몇 군데를 잘라내고 몇몇 부분을 압축하여 사용했다. 이 장면의 음향과 영상의 완벽한 조화를 만들어낸 데에는, 사운드 디자이너이자 편집자인 월터 머치(Walter Murch)의 공이 컸다. 발퀴레 주제의 본격적인 진입은 14대의 헬리콥터가 하늘을 나는 와이드샷과 동시에 시작된다. 병사들은 총을 준비하고, 킬고어 중령은 음악에 맞춰 고개를 끄덕인다. 이어지는 또 다른 와이드샷은 반짝이는 B장조 화음과 맞물리고, 곧 트롬본이 주제 선율을 이어받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 전환은 탁월하다. 트롬본이 선율을 마무리하기 직전 한 마디, 카메라는 폭격이 임박한 베트남 마을로 전환된다.
남자, 기계, 음악의 아드레날린 넘치는 러시가 순식간에 끊기고, 카메라는 학교 바깥의 조용한 마당에 안착한다. 밀리어스의 원래 각본에는 무장한 베트콩 거점이 등장하지만, 코폴라는 아이들이 노래 부르며 뛰어나오는 목가적인 풍경으로 장면을 연출했다. 그러다 한 여성 베트콩 병사가 갑작스레 등장해 대피를 명령하고, 멀리서부터 바그너의 음악이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한다. 트롬본이 선율을 마무리하고, 곧 발퀴레들이 “호요토호!(Hojotoho!)”를 외치며 등장한다. 발퀴레 헬름비게(Helmwige)가 고음 B를 길게 끌며 도달할 때, 첫 번째 미사일이 발사된다. 집들은 폭발하고, 마을 사람들은 무참히 쓰러진다.
오페라적인 허세는 전투의 혼란 속에서 무너진다. 헬리콥터들이 착륙하고, 병사들이 뛰어내린다. 한 흑인 병사가, 동료가 집 안으로 총을 쏘고 폭발이 일어나면서 심각한 부상을 입는다. 의미심장하게도, 그 병사가 쓰러지는 순간 바그너의 음악은 멈춘다. 그의 다리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장면은, 발퀴레 환상을 단번에 깨뜨린다. 이는 미국의 오만함에 대한 고발을 의도한 장면이지만, 영화가 주는 강렬한 감각적 충격은 비판의 힘을 약화시킨다.『지옥의 묵시록』은 곧 군사적 페티시의 상징물이 되었고, 그 바그너 장면은 현실의 군사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983년, 미국이 그레나다를 침공할 당시, 한 블랙호크 헬리콥터가 ‘발퀴레의 기행’을 틀며 작전을 수행했다. 8년 후, 걸프전 중 73 이스팅 전투에 앞서 심리전(PsyOps) 부대가 이 음악을 재생했다. 2004년, 이라크전의 팔루자 전투에서는 험비(Humvee)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발퀴레의 기행’이 울려 퍼졌다.
바그너식의 미장 아빔(mise en abyme)이 펼쳐지는 샘 멘데스 감독의 영화 『자헤드(Jarhead)』(2005)는, 걸프전 참전 회고록인 앤서니 스워포드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이 영화의 한 장면에서는 젊은 해병들이 『지옥의 묵시록』 상영 장면에 흥분하여 ‘발퀴레의 기행’을 따라 부르며 주먹을 하늘로 치켜든다.
놀라운 점은 이 장면을 ‘지옥의 묵시록’의 편집자였던 월터 머치(Walter Murch)가 다시 편집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번에는 자신과 코폴라가 애써 구축한 복합적이고 다의적인 연출 의도의 패배를 직접 보여주는 입장이 되었다. 조용한 마을로의 전환 장면은 이 젊은 해병들에게 아무런 각성 효과를 주지 못한다. 오히려 음악이 다시 시작되자, 한 병사는 “저 새끼 쏴버려!”라고 외친다. 이는 놀라운 문화적 전환이다.
https://youtu.be/vDStyH8oVvY?si=TOR4ecCgZQs2Q--E
‘발퀴레의 기행’은 이제 미국의 패권주의를 상징하는 국가(國歌)처럼 재창조되었다. 이러한 의미의 전도는, 전후 시대에 나타난 다른 불편한 역사적 연속성과도 궤를 같이한다. 예컨대, 나치 과학자들의 미국 이주, 이라크에서 다시 등장한 게슈타포식 고문 기법, 그리고 리펜슈탈의 아리아 이상형을 계승한 조각된 육체 숭배 문화 등이 그것이다.
에릭 렌트슐러(Eric Rentschler)는 저서 『환상의 부서(The Ministry of Illusion)』(1996)에서 이렇게 썼다.
“오늘날 미국의 미디어 문화는 제3제국의 ‘스펙터클 사회’와 단지 피상적이거나 대리적인 관계 이상을 맺고 있다.”
영화사에서 이 생각을 이토록 생생하게 입증하는 작품은 없다.『지옥의 묵시록』은 독일의 권력 의지가 ‘하느님이 미국을 축복하사’ 식의 제국주의로 이양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바그너의 영향력이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영역은 신화와 전설의 세계일 것이다. 그는 게르만과 아서 왕의 신화를 능수능란하게 변형하고 활용했으며, 이러한 신화들이 현대 관객에게 어떻게 알레고리(우화)적으로 울림을 줄 수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신화가 지닌 비교 불가능한 특징은 그것이 언제나 참되며, 그 내용은 극도로 응축되어 있으면서도 고갈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그너는 차용하고, 수정하고, 새롭게 창조한 원형(archetype)의 거대한 배열을 구축했다. 그의 서사 속에 등장하는 유령선 위의 방랑자, 이름 없는 구원자, 저주받은 반지, 나무에 박힌 검, 다시 벼려지는 검, 숨겨진 능력을 지닌 초보자 등의 캐릭터들은 현대 할리우드를 지배하는 블록버스터 판타지와 슈퍼히어로 서사들 뒤에 그림자처럼 숨어 있다. 1930년대, 전체주의 정권들이 유럽과 러시아를 휩쓸던 시기에 슈퍼히어로가 등장한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공산주의와 파시즘 선전 속에서 이상화된 젊은 남성의 육체 이미지는 이러한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 ‘나약하다’고 조롱받던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강력한 전사들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만화책 속 슈퍼히어로들이 지닌 근육질 몸매나 과장된 육체 묘사는, 19세기말 삽화가 아서 래컴(Arthur Rackham)이나 프란츠 슈타센(Franz Stassen)이 그린 바그너의 영웅·영웅녀 그림들로부터 유래한 것처럼 보인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숨겨진 정체성’이라는 모티프가 슈퍼히어로 영화의 핵심인데, 이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Lohengrin)』을 떠올리게 한다고 지적했다. 로엔그린은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기사이며, 그의 신부 엘자는 너무 많은 질문을 해서 관계를 망치게 되는 인물이다. 슈퍼맨이나 배트맨의 연인들이 지나치게 캐묻다가 관계에 금이 가는 것도 이와 유사한 패턴이다.
현대 판타지의 시작은 1977년,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Star Wars)』 개봉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작품은 1930년대의 『플래시 고든(Flash Gordon)』, 『벅 로저스(Buck Rogers)』 연재 시리즈에 경의를 표한 작품이었다.『스타워즈』는 초창기부터 바그너와 자주 비교되었고,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나치 시대 독일 영화를 “팝-바그네리안(pop-Wagnerian)”이라 칭한 바 있으며, 폴린 카엘(Pauline Kael)은 이 용어를 『스타워즈』 속편『제국의 역습(The Empire Strikes Back)』에 적용했다.
이러한 연재물들과 마찬가지로, 『스타워즈』의 미래적 우주는 중세적 기사도적 색채를 띤다. 광선검은 검을 대신하고, 다스 베이더는 정체를 숨긴 흑기사로 등장한다. 비평가 마이크 애시먼(Mike Ashman)은 『반지』(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연작)와의 유사성을 여러 차례 지적했다. 예컨대,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가 아버지의 광선검을 손에 넣는 장면은, 지크프리트가 지그문트의 검을 다시 벼리는 장면과 닮아 있다. 또한, 제다이 마스터 요다가 늪지대에서 루크를 훈련시키는 장면은, 난쟁이 미메(Mime)가 지크프리트를 가르치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단지 다른 점은 요다는 ‘선(善)’의 편이라는 것이다.
더 불편한 메아리는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들려온다. 루크, 한 솔로, 츄바카가 반란군을 승리로 이끈 후, 그들은 사원에서 열린 의식에서 영예를 받는다. 화려한 팡파르가 끝나면 존 윌리엄스의 ‘포스(Force)’ 테마가 행진곡 형태로 힘차게 연주되는데, 이는 바그너의 지크프리트(Siegfried) 모티프를 떠올리게 한다. 루카스는 이 장면에 기묘한 시각적 연출을 택한다. 카메라는 루크 일행이 긴 석조 회랑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뒤에서 비춘다. 길 양쪽에는 병사들이 엄격히 정렬된 상태로 도열해 있고, 그들이 향하는 단상 뒤로는 거대한 기둥들이 솟아 있다. 이 장면에는 두 개의 분명한 영화적 선례가 있다. 하나는 프리츠 랑(Fritz Lang)의 무성 대작 『니벨룽의 반지(Die Nibelungen)』에서 영웅 지크프리트가 군터의 궁정에 입장하는 장면, 또 하나는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의 『의지의 승리(Triumph of the Will)』에서 히틀러가 뉘른베르크 퍼레이드 광장을 행진하는 장면이다.
루카스는 이 장면이 리펜슈탈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그 유사성은 우연이라 보기에는 너무 뚜렷하다. 물론, 이 장면에서 주인공들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어 화면의 엄숙함을 일부러 희화화하려는 듯한 연출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멍청하게 웃는 방식의 파시스트 스타일 차용"은 그 암시를 덜 이상하거나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처럼, 그러나 비판적 거리감 없이, 미국식 영웅들은 '악의 제국'의 아이코노그래피(시각 상징)를 흡수해 버린다. 21세기 초, 판타지 영화들은 세계 시장을 휩쓸었고, 그 안에는 수많은 ‘바그너적 요소들(Wagnerisms)’이 흩어져 있었다.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Lord of the Rings)』 3부작은 톨킨(J. R. R. Tolkien)의 원작과 마찬가지로, ‘모든 자를 타락시키는 절대 반지’라는 설정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서사다. 라나와 릴리 워쇼스키의 『매트릭스(Matrix)』 3부작(1999–2003)은 바그너의 신비로운 마지막 오페라 『파르지팔(Parsifal)』과 닮아 있다.『파르지팔』의 핵심 주제인 ‘입문(入門)’과 ‘깨달음’이 『매트릭스』 전반에 걸쳐 반복된다. 첫 번째 영화에서, 젊은 컴퓨터 해커 네오는 모피어스(Morpheus)라는 인물이 이끄는 지하 저항운동에 끌려 들어간다. 모피어스는 그에게 현실 세계가 기계 지배자들이 만든 환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모피어스의 다음 대사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진실로부터 너의 눈을 가리기 위해 덮어 씌워진 세계다.”
쇼펜하우어는 바그너 후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다. 슬라보예 지젝은 모피어스가 말한 ‘실재의 사막(desert of the real)’이 『파르지팔』 속, 클링조르(Klingsor)의 유혹적인 마법 정원 뒤에 있는 황무지와 동일한 개념이라고 지적한다. 모피어스는 마치 오페라 속 현자 구르네만츠(Gurnemanz)처럼, 선택받은 자를 비밀의 지식으로 인도하는 인물이다. SF 평론가 앤드루 메이(Andrew May)는 영화의 결정적인 장면을 지적한다. 바로, 네오가 총알을 공중에서 멈추게 하는 장면이다. 이는 『파르지팔』에서 파르지팔이 날아오는 클링조르의 창을 공중에서 멈춰 세우는 장면을 재현한 것처럼 보인다.
민주주의적 대중문화는 바그너가 나치에 의해 악용될 수 있었던 역사적 힘들로부터 자신은 예외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판타지 창작자들은 자신들이 자유주의적 선과 반동적 악의 대결을 그리는 비유(allegory)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길 좋아한다. 2011년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 『퍼스트 어벤저: 캡틴 아메리카(Captain America: The First Avenger)』에는 이러한 선/악의 이분법 속에 바그너를 직접적으로 끼워 넣는 장면이 등장한다. 요한 슈미트(Johann Schmidt) — 즉, 붉은 해골(Red Skull)로 알려진 나치 출신 테러리스트 —
그는 산속의 실험실에서 실험을 이어가고 있으며, 배경에는 축음기에서 바그너의 『반지』 일부가 흘러나온다. 커다란 창 너머로는 히틀러의 바이에른 산장처럼 알프스 산맥이 펼쳐져 있다. 한편, 원래는 왜소했던 소년이 과학적 실험을 통해 슈퍼히어로로 강화된 캡틴 아메리카는 붉은 해골을 쫓아 그의 실험실을 파괴한다.
이 장면에서 바그너는 마치 유럽 과거의 괴물처럼 다뤄지며, 쫓아내야 할 존재로 설정된다. 하지만 쫓아내기 전, 『반지』 오케스트라의 울림을 이용해 관객에게 스릴을 선사한다 — 이는 프랭크 카프라(Frank Capra) 감독이 『왜 우리는 싸우는가(Why We Fight)』에서 썼던 것과 같은 방식의 연출이다.
정치학자 헤르프리트 뮌클러(Herfried Münkler)가 지적했듯, 어떤 신화든 이념적으로 단순화되고 왜곡될 위험이 있다. 특히, 평범한 개인이 특별한 능력을 얻게 되는 슈퍼히어로 서사는 소외된 공동체를 대변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동시에, 19세기말 청년들이 지크프리트, 브륀힐데, 로엔그린 역할을 꿈꾸며 바그너 오페라에 빠져들던 것처럼, 과장된 자기 투사(grandiose self-projection)를 조장할 위험도 있다.『매트릭스』에서 새롭게 각성한 네오(Neo)는 두 알약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빨간 약(red pill)을 먹으면 영원한 진실을 인식하게 되고, 파란 약(blue pill)을 먹으면 환상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이 이야기는 미국 극우 세력, 특히 그들 중 일부 바그너 숭배자(Wagnerites)에 의해 자기화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각성을 "레드필(red-pill) 모먼트"라고 부른다. 즉, 그 순간은 다문화주의적 자유주의를 버리고, 자신들만의 진실에 눈뜨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바그너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예술과 예술가 숭배는 항상 위험한 행위라는 점이다.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는 이 교훈을 느리지만 꾸준히 배워 왔으며, 그 결과 현대 유럽에서 바그너 오페라를 공연할 때는 그의 어두운 유산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이제는 할리우드 영화나 다른 대중문화가 어떻게 미국 헤게모니—즉, 배타적 패권주의, 폭력 문화, 만연한 경제적·인종적 불평등—의 실행에 공모하는지를 고민해 볼 때일지도 모른다. 문화를 신성시하고, 미적 추구를 세속적 종교이자 구원의 정치로 바꾸려는 충동은, 바그너 낭만주의가 나치 키치로 타락하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
이 글은 2020년 8월 31일자 인쇄본에 “할리우드 속 바그너”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습니다.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20/08/31/how-wagner-shaped-hollywood
https://www.newyorker.com/video/watch/how-a-wagner-opera-defined-the-sound-of-hollywood-blockbust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