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남미 여행에 대한 메모같은 짧은 생각
그제 성수동에서 퇴근하면서 볼리비아를 생각했다. 남미 여행 갔던 생각을 요즘 부쩍 많이 한다. 남미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시 남미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마치 모파상이 에펠탑을 보지 않기 위해 에펠탑에서 글을 썼던 것처럼...
여행 직후 네이버 블로그에 썼던 글이 생각나서 다시 읽어보았다. 글에서는 여행보다 여행 직후의 생각이 났다. 그때는 글로 뭔가를 남기려고 했던 것 같다. 취미로 웃긴 글, 기상천외해서 막 다른 길로 빠지는 그런 글을 쓰고 싶었었고 그건 아직도 그렇다.
(2020년 2월 12일에 개인 네이버 블로그에 작성한 글의 분량을 줄여 편집한 글이다)
지금은 여행에서 돌아온 지 6일째 되는 날이다. 여행을 계획할 때의 설렘, 여행 중 예기치 못한 일에 대한 당혹 그리고 귀국의 안도감도 점점 희미해져 간다. 모든 걸 잡아두고 싶다. 연대기적인 글을 쓰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다. 머릿속에서 모든 기억은 이미 잡탕 죽이 되어버렸고 내가 여행 기간 중 쓴 메모들도 앞뒤 맥락을 모르겠다. 이 글은 부위도, 이름도 모르는 고기를 숭덩숭덩 자른 것 같은 글이 되겠다.
언젠가 엄마가 남미를 한번 꼭 가고 싶다고 했었다. 그때부터 내게 남미는 나라의 집합인 대륙이기보다는 엄마가 가고 싶어 하는 '여행의 종착'으로 남았다. 어릴 적 방에 붙어있던 태평양 중심의 지도에서 위치는 오른쪽 아래. 인상은 미국과 아프리카의 중간 어디쯤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었다. 인터넷에서 추천받은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책을 읽었다. 소설은 새들이 찾아와 죽는다는 페루의 한적한 해변이 배경이다. 짤막한 이야기의 주제인 삶의 무감각에 대한 이야기보다 내게 더 큰 파장은 절벽이 이어진 해변과 눅눅하고 짠 새벽 공기 속, 새들이 이유 없이 와서 죽는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새들이 와서 죽는 세상의 끝'의 이미지는 당시 고등학생의 감수성으로 재해석해 상상되었다.
그 후 6년 뒤 군대를 갔다. 함께 중국 윈난성 트래킹 여행을 갔던 군동기가 남미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고 좋은 기회다 싶어서 나도 껴달라고 했다. 한두 달 남미를 돌고 뉴욕에서 스톱 오버로 잠시 머물다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남미라는 말은 내 마음을 뺏는 구석이 있었다. 이유를 생각해 보면 내가 아는 가장 이국적인 환경이어서 그럴 것이다.
단편 <중국 여행 프로젝트>에서 선생님께서는 주요 방위 이야기를 하시면서
각각에 해당하는 정서적인 자질을 부여하셨습니다.
동쪽은 분노, 서쪽은 비탄, 남쪽은 기쁨, 북쪽은 공포...(후략)
수전 손택의 말 - 파리와 뉴욕, 마흔 중반의 인터뷰 中
수전 손택은 그녀의 단편 소설에서 방위의 이항대립에 대해 말한 적 있다. 남미는 남쪽과 서쪽인데 손택에 따르면 기쁨과 비탄이다. 그냥 개인의 의미 부여이지 큰 의미가 있다고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항대립에 대해서는 다르다. 세상에는 많은 이항들이 있다. 남과 여, 동양과 서양, 말과 글, 입과 귀, 엄마와 아빠, 뜨거움과 차가움, 해와 달, 냉면과 온면 등등... 이러한 이항들은 우리가 모르거나 경험한 적 없는 것들을 더 쉽게 개념화하게 하고 의미 파악이 어려운 것이 의미를 가지게 할 때 도움이 된다. 내가 좋아하던 '남미' 또한 경험한 적 없는 내 머릿속에 상상하던 것이다. 어머니의 말로, 지도와 미디어의 이미지로, 지정학적 정보로 그리고 로맹 가리의 소설로. 나는 내가 생각하는 수많은 이항 대립들 속에 세상 가장 반대편에 있는 남미를 상상했다.
내가 아는 여행은 언제나 관광인데 다음은 각각 여행과 관광의 사전적 정의이다.
여행 :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
관광 : 다른 지방이나 다른 나라에 가서 그곳의 풍경, 풍습, 문물 따위를 구경함.
네이버 표준국어 대사전
우리의 여행은 필연적이게 '구경함' 혹은 '유람함'이다. 여행자는 그곳에서 일상을 사는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험을 한다. 여행자는 그 장소와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관계를 맺은 사람들과 구분된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수개월 그곳에 머문다 하더라도 이러한 원리는 변하지 않는다. 여행은 사람에게 여행자의 관점, 여행자의 기분, 여행자의 지위를 누리게 해 준다. 일상적 경험과 대척에 있다.
틀에 박히지 않은 비일상적인 우연의 연속인 여행은 이 순간 가장 확실한 것을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진 실험실과 같다. 우연히 발견한 식당의 새로운 음식들, 난처하던 상황 속 사람들의 조건 없는 친절, 우연히 만난 여행자와의 뜻밖의 인연 등 수많은 우연이 있다.
역사는 하나의 공통된 기억으로 공동체를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한 공통 기억을 바탕으로 시민들은 함께 기뻐하고 분노하고 싸운다. 지나가는 행인일 뿐인 여행자는 이러한 공통 기억도, 공간과 이어진 정체성도, 인간관계도 없다. 이렇게 여행자는 멀찍이 서서 관찰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내게 경험적 예시가 있다. 칠레의 산티아고를 갔을 때 이야기이다. 그때가 2020년 1월 초였는데 아직도 산티아고 곳곳에서 반정부 시위가있었다. 정권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낙서가 도시를 뒤덮었다. 젊은이들은 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하고 경찰들은 해당 지역 지하철역을 폐쇄하고 최루탄을 쏘며 진압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근 수십 년간 정부의 부패와 경제침체 그리고 과거 군사 정권부터 이어져 내려온 군인 경찰에 대한 불만이 시위의 원인이었다. 그들과 역사적, 경제적 공통분모가 없는 여행자/관광자/유람자로써 어떤 의견을 가지기 어려웠다.
나와 공통분모로 묶인 사회로부터 벗어난다는 건 큰 의미가 있다. 이것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가 쓴 <그림자를 판 사나이>이다. 주인공 슐레밀은 자신의 그림자와 금화가 끝없이 나오는 마법의 자루를 맞바꿔 엄청난 부자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그림자 없는 그를 싫어해서 결국 떠돌이가 된다. 그렇게 고생하던 중 천 리 길을 한 걸음에 갈 수 있는 마법의 장화를 얻게 되어 그림자가 없다는 결점을 이겨낸다는 단순한 이야기다.
여기서 그림자는 사람들 사이에서 같이 살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다. 타인과 함께 살기 위해 필요한 신분이나 돈보다 더 중요한 무엇인가다. 이것이 없으면 사회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데 이것은 '장소'라는 개념이 포함하고 있는 '사회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인다. 가령 유행을 따르지 않았을 때 집단에서 소외된 느낌을 갖는 십 대나 생김새가 다른 다문화가정을 타자화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이런 결점을 끊임없이 장소를 바꾸는 것으로 극복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와 궤를 같이한다. 방랑하는 사람은 여행자라는 지위를 얻게 된다. 내가 속하던 사회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신분에 속하는지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그들은 개의치 않고 그럼 나 또한 잊을 수 있다.
사살상 차별의 상징체계를 전복할 힘이 없는 개인이 스티그마(낙인)에서 벗어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주어진 장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슐레밀이 그림자가 없는 인간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비장소화를 통해서이다... 세계 구석구석을 자기 집처럼 친숙하게 돌아볼 수 있다. 그의 시야는 지구 전체로 확장되며, 인식의 지평 역시 그러하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인류 전체에 속하는 방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中
여행지에서 우리는 여행자로서 자유를 만끽한다. 내가 모르는 낯선 장소에서 온전한 이방인이 된다. 나를 아는 사람도 없고 나도 일상과 다르게 행동한다. 모국에 적응해 온 내 사고 양식은 새로운 환경과 언어에서 매 순간 새로움을 느낀다. 총체적 경험으로의 여행은 새로운 자극들을 동반한다. 어색한 교통 시스템과 거리의 차량들, 인사를 건네는 사소한 의례들, 이 모든 건 현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해 준다. 상념 이전에 감각이 있다. 머리로 미래를 설계하기 이전이니 언제나 새 출발이다.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자신을 환기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일상루틴에서도 할 수도 있는 게 여행이다. 살바도르 달리는 왜 여행을 하지 않냐고 물음에 나는 상상으로 여행을 다닌다고 답했다고 한다. 여행은 어쩔 수 없이 작위적인 단기간의 자극이고 이것이 지속되려면 슐레밀의 '마법의 장화'를 가져야만 한다. 순간의 디톡스이고 잔치이며 끝나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또다시 기억하며 상상해 재생산한다.
대부분의 우리는 정착하고 살아간다. 언제나 나를 환대해 줄 것이라고 믿는 장소 필요하다. 내게는 우리 집, 우리 가족이 그렇다.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의 영화 <인 디 에어 Up in the Air>에서 주인공 라이언 빙헴(조지 클루니)은 자신의 목표 1000만 마일을 다 채우고 축하받는 상황에서 비행기 기장의 당신은 어디 출신이냐는 질문에 "I'm from here (이곳, 떠있는 하늘)"이라고 답한다. 미국 각지에 있는 호텔 방들이 집인 그는 슐레밀의 장화를 가졌고 그게 좋은 줄 알고 있었지만 마음은 비어있다. 영화에서 무거운 배낭에 비유하던 책임을 다 비우고 일 년 대부분을 미국 이곳저곳 날아다니는 그는 아직 정착할 곳을 찾지 못했다. 하나 보다 둘이 낫다고 인생에는 부조종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언제나 하늘 위를 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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