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전 날 일찍 일을 마치고 혼자 카페에 가서 이주란 신간 소설을 드디어 다 읽었다. 서로를 끝까지 그리워하며 끝이 나는 이야기가 좋았다. 그리고 나는 이주란 소설 속 동네가 자주 그립다. 서로의 슬픔을 가끔씩은 못 본 척하기도 하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서로가 서로에게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하면서.
어린 아이가 내 앞을 지나가면서 누나는 왜 울고 있어요,라고 말을 거는 상상을 한다.
계속 걸었다. 걷기에는 조금 더웠다. 아직은 가을이 마저 오지 않았고 땀에 절여진 나는 며칠 전에 친구랑 같이 갔던 술집이 생각났다. 그곳에서 마지막 여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에 또 걸었다.
합정을 지나고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망원우동집을 지나고 내가 좋아하는 이모가 있는 너랑나랑호프를 지나고 연휴 전이라 사람들이 많은 망원시장을 지났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 친구와 함께 앉았던 바 자리에 앉았다. 사장님이 바로 알아보셨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술을 시켰고 단골손님 둘이 왔고 나는 혼자서 서한나 작가의 사랑의 은어를 읽으면서 킥킥 댔다. 이 사람 글은 너스레 떠는 느낌이 좋다. 농담처럼 사랑 고백하는 것 같아서 좋아. 기억력이 좋은 작가의 재능이 부럽다. 나는 기억력이 매우 좋지 않은데, 이건 나만의 자기 방어의 일종이었다. 나는 잊어야 잘 살 수 있었다. 모든 걸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다면 나는 지금쯤 이렇게 살고 있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글을 썼다. 좋았던 순간들은 기억해내고 싶어서.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잊어버릴까 봐. 그것만큼은 기억하고 싶으니까. 그렇게 써 내려간 연서는 적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어디로 갔을까?
혼자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데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한 커플이 천천히 지나갔다. 서로에게 잘 보이고 싶어 가장 멋지고 예쁜 옷을 입은 것 같은 두 사람은 쭈그려 앉아있는 나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 갑자기 멈추고 서로를 오래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담배를 입에 머금고 그 둘을 바라본다. 갑자기 눈물이 날 것만 같았지만 그런 나를 두고 그 둘은 지나간다.
기억력이 좋은 내 친구에게 너는 정말 좋은 재능을 가졌어! 너는 사랑을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고 싶어졌는데 괜히 낯간지러워 그만뒀다. 나중에 만나서 술을 마시면 말해야지 싶어서 야 있잖아 방금 내가 한 커플을 봤는데… 하면서 내가 보고 느낀 걸 말해줬다.
그래서 너를 못 본 척 그냥 지나간 게 포인트지?
그치, 그거야
나는 거친 손을 좋아하는데, 그거는 할아버지 손이 조금은 까슬거렸다는 게 내 오랜 기억이라서 그런 것 같다. 그 손이 마지막에는 아주 슬플 정도로 차가운 감각이었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다. 몇몇 슬픈 장면은 버릴 수가 없다. 나는 그를 정말로 사랑하니까 그것은 슬프더라도 잊어버릴 수가 없으니까.
하나둘씩 바 자리에 앉았다 가버렸다. 다시 누군가가 새로 오고 나는 혼자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는다.
가을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