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시처럼 던져 04시처럼 받은 이유 - 글쓰기의 연유

끝과 맞닿은 시작을 위하여

by 시인 손락천
글쓰기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대한 항거였다.



글을 쓴다는 것은 현실과 현실의 존재 가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지난한 물음이다. 그래서 글을 쓴다는 것은 때로는 과거의 거울과 미래의 환상을 이유로 오컴과 같은 도망자가 되는 일이기도 하고, 때로는 말뿐인 당위에 대한 염증을 발설하며 지금의 나와 그 곁을 소중하게 돌아보라는 현실의 부역자가 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망자이든 부역자이든 그 근거가 현실임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돌아가 말하면 [글을 쓴다는 것은 현실과 현실의 존재 가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지난한 물임]이다. 오늘을 살아야 하니까, 그 살아야 할 오늘에 대하여 이유를 물은 것이다.


이러한 물음은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심각하게 제기될 수가 있다. 하지만 사람은 이러한 물음이 없더라도 산다. 따라서 이러한 물음은 삶에 있어서 결코 필수적인 물음이 아닌 것이다.


다시 돌아가 말하면 [글을 쓴다는 것은 현실과 현실의 존재 가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지난한 물임]이지만, 그와 같은 물음을 끊임없이 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병인 까닭에서다. 즉, 글을 쓰는 이유는 너무나 예민한 나머지 삶의 이유를 묻지 않으면 스스로 살았음을 자신할 수 없는 병에 걸린 탓인 것이다.



내가 쓴 글의 전체는 그리움으로 관통된다.
나는 그리움을 존재하는 나에 대한, 존재하는 너에 대한, 그리고 존재하는 곁의 모든 것에 대한 물음으로 표현한다.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실재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실재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말이다.



이제 02시처럼 던져 04시처럼 받은 이유를 말할 차례다.


나는 칼빈 계통의 개혁주의에 동조하는 크리스천이자 실재론에 입각한 이상주의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쓴 글의 전체는 그리움으로 관통된다. 바랬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 나, 바랬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 너, 그리고 소중하였지만 지키지 못한 모든 것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움을 표현한 사상적 지반이 이제까지 언급한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과 그에 따른 인문학적 물음, 그리고 철학적 사유에 있다. 즉, 나는 이러한 사상적 지반에서 그리움을 존재하는 나에 대한, 존재하는 너에 대한, 그리고 존재하는 곁의 모든 것에 대한 물음으로 표현한다.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실재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실재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말이다.



나는 이러한 병에 대하여 스스로를 털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02시처럼 던져 04시처럼 받은 이유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이라고 하였다. 다행이다. 나는 병에 걸렸으나 이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닌 까닭이다. 그렇지만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고독은 굳이 글쓰기가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발현되기 마련이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더라도, 힘든 홀로의 병을 앓기 마련이다.


나는 이러한 병에 대하여 스스로를 털어놓은 것이다. 병의 정체와 그 병의 발현 양상에 대해서 말이다. 낫고자 함이 아니다. 그저 나를 밝힘으로써 나의 병에게로 더 깊이 나아가고자 함이다. 그 끝이 어디인지를 알기 위한 그리움으로 말이다.


그것이 02시처럼 던져 04시처럼 받은 이유다.

매거진의 이전글인문학, 물음에 찍은 쉼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