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묻다 20
알 수 있는 미래는 딱 한 가지뿐이다.
우리는 미래에 대하여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늘 불안하면서도, 마치 전혀 죽지 않을 것처럼 오늘을 산다. 어떤 이들은 삶이란 [끊임없이 죽는다는 기정사실에 대하여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삶이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으려는 진통제 또는 안정제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벌써 나부터가 말은 죽으면 그만이지, 죽음을 준비해야지 하면서도, 실제로는 전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지도, 죽음을 준비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나도 그렇게 살뿐이다.
실상, 나는 오늘도 여섯 시 반에 일어나서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화장실에 다녀왔으며, 청국장 환 한 봉지를 먹고, 샤워를 하였으며, 옷을 입고, 커피 한잔을 한 후, 아내에 딸에게 [다녀오리라]하고 출근을 하였다.
그리고 전철을 타고 출근을 하면서도 오늘과 내일,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대한 기도를 할 뿐, 어느 순간에도 삶이 계속되리라는 전제를 벗어나 무엇을 기도하지 않았다.
현실을 떠나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어쩌면 삶을 전제로 하지 아니한 삶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초월자의 삶일 것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러한 초월자임을 자처하거나 초월자로서의 삶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위선자일 것이다.
설사 기독교가 아무리 내세에 대한 것이고, 현재를 그림자에 불과한 것으로 설파한다고 하더라도, 기독교는 한 번도 그러하다고 해서 현재를 방종하도록 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신앙과 이상은 현실의 삶을 통해서만 고백되는 것일 뿐, 현실의 삶을 떠나서 고백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이와 견해를 달리한 종교가 있다면, 설령 그것이 기독교라 하더라도 이미 그러한 집단은 사이비인 것이다. 즉, 현실의 삶을 포기하는 순간 이단도 그런 이단이 없게 되는 것이다.
종교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겁박이다.
현실에 충실하다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부담감을 느끼도록 한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기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혹 이기심에 발로한 현실에의 충실성이 신앙에 배치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다. 그리고 일부의 교회는(물론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러한 두려움을 부추기어 현실을 접고서라도 일주일 내내 교회에 헌신하기를 강권한다.
그러나 실상과 그림자, 근본과 껍데기 사이의 이러한 충돌이야말로, 그리고 이러한 치열한 전쟁이야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다. 내세를 꿈꾼다는 것은 전혀 죽음을 예정하지 않는다는 것이기에, 그림자의 삶일지라도 결코 죽음을 예정하여 방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림자는 실상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가치란 현실에의 충실도가 치열한 신앙적 고민으로 인하여 고양되는 그 무엇이다. 만약 목회의 직책으로 교회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먹고사는 도구로 교회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면, 이제 스스로의 암시와 가면을 벗고 말해야 할 터다.
[현실에 충실합시다. 현실에서 올바르고, 현실에서 거짓을 고하지 말며, 현실에서 남을 상하게 말고, 현실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눈을 돌리지 맙시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라고.
인문학은 현실의 치열함에 온 몸을 던짐으로써, 그 치열함 속에서 피울 수 있는 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불꽃이어야 한다.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그것이 종교든, 인문학이든 현실을 떠나서는 그 어떤 달콤한 대가의 약속도 거짓말이 될 뿐이고, 또한 그러한 거짓말은 불을 보듯 적패와 부조리를 양산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종교가 그리고 그에 영향을 받은 인문학이 앞서 살펴본 현실 부정의 억제력으로 사람을 제어한 면이 있다면, 이제는 과감하게 종교적 현실 부정의 억제력에서 자유하여, 현실의 치열함에 온 몸을 던짐으로써, 그 치열함 속에서 피울 수 있는 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불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