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물음에 대한 정리

인문학을 묻다 21

by 시인 손락천

#1

[인문학을 묻다 1 - 요행 앞에 선 인문학]은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갑자기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보게 되고, 그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물음으로 시작했다.


이 물음에 대한 사상적 의견으로는 니체의 [의지와 힘 - 권력의지]를 차용하였고, 결국에는 뜻밖의 요행으로 원하는 것을 얻는 상황이 닥치게 되면, 니체의 설명이 힘을 잃게 되는 과정까지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요행 앞에서 인문학은 어떠한 태도와 해석을 내어놓아야 하는 것일까? 필자도 이에 대한 의견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였고, 그래서 물음만을 던진 상태다.


즉, 이 물음은 답을 구한다기보다는 앞으로 살펴볼 [인문학이 가야 할 길]에 대한 서두에 해당한다.



#2

[인문학을 묻다 2 - 불가지론 앞에 선 인문학]은 [철학이란 모르는 것을 추구하는 우문에 불과한 것이냐]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이 물음에 대한 사상적 의견으로는 경험론자인 흄이 겪게 된 [회의론]과 진리 가능성에 대한 칸트의 [발생의 전환 및 순수이성 등]을 차용하였고, 결국은 인문학이 [내가 보는 이것은 이것이야, 내가 바라는 것은 이것이야, 내가 갈 길은 이것이야]라고 사유하고, 그것으로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있지만, 정작 판단의 대상이 된 그것 자체에 대하여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비판에까지 이르렀다.


이 물음 역시 답을 구한다기보다는 앞으로 살펴볼 [인문학이 가야 할 길]에 대한 서두에 해당한다.


이에 대한 고민을 함께하고자 [인문학을 묻다 2 - 불가지론 앞에 선 인문학]과 그 사상적 재료인 흄 및 칸트의 견해를 써머리하여 공유하였다.



#3

[인문학을 묻다 3 - 도 앞에 선 인문학]은 도덕경의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을 차용하여, 사람이 가진 [진리 가능성에 대한 불안]을 살펴보았다.


이 챕터 역시 인문학을 묻기 위한 서두에 해당하고, 그 사상적 재료에는 데카르트, 로크, 스피노자, 흄, 버클리, 칸트, 헤겔, 맑스, 프로이트, 니체, 야콥슨, 레비 스트로스, 라캉, 푸코 등의 견해가 종합적으로 섞여 있다.



#4

[인문학을 묻다 4 - 불가능 앞에 선 인문학]에서는 인식과 존재 사이의 불가능성, 즉 자명함의 불가능성으로 치달은 현대사상의 경향을 살펴보았다.


이 물음에 대한 사상적 의견은 헤겔의 변증법, 구조주의 언어학, 구조주의 철학, 구조주의 심리학이 무작위로 차용되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의미 있게 차용한 것이 라캉의 데카르트에 대한 비꼼이었다.



#5

[인문학을 묻다 5 - 내려놓은 앞에 선 인문학]는 흄과 맑스의 사상을 재료로 하여 사람에 대한 이해를 재고하였다.


즉, 인문학이 사람에게 던진 화두는 겉사람의 어렵고 고단했던 짐을 내려놓으라는 것, 다시 말해 [눈치와 체면, 당위와 의무, 욕심과 겉치레, 단호한 신념과 고집. 그러한 것들을 내려놓고 내면의 정당하고 긍정적인 믿음과 확신대로 스스로와 세상에 마주하라는 것]이라는 나름의 견해를 밝힌 것이 [인문학을 묻다 5]였다.


이에 [인문학을 묻다 5 - 내려놓음 앞에 선 인문학]는 그 사상적 재료인 맑스와 흄의 견해를 써머리하여 함께 공유하였다.



#6

[인문학을 묻다 6 - 신 앞에 선 인문학]은 유물론과 성경의 [태초]에 대한 해석을 통하여, 세상에는 인식할 수 없는 것, 시간과 공간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언어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이를 언어의 틀 속에 한정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함을 설명하였다.


즉, 이 챕터는 인문학에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낭만이 필요하고, 그러한 낭만이 없는 이상 인문학은 어리석은 질문이거나 불안 또는 불가능에 대한 고증학으로 전락할 뿐임을 살펴보았다.



#7

[인문학을 묻다 7 - 낭만 앞에 선 인문학]은 구조주의 언어학에 관한 사상을 재료로 하여 [언어 - 랑그]와 사람 사이의 관계, [랑그]로 인하여 사람이 소외되어버린 흐름을 살펴본 챕터다.


랑그가 사회적 약속에 기반한 것이라면, 그것은 어차피 사람으로 말미암아 생긴 구조일 뿐 그 이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필자는 스피노자가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낭만을 가지고 대륙의 합리론을 비판하였던 것처럼, 구조주의 언어학이 그 정도의 낭만도 가지지 않고 인류와 문화를 랑그로써 재단하고, 주체를 언어에서 외화된 존재로 독단한다면, 그것은 수단과 목적에 따라 존재를 전횡하려는 어불성설에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이에 [인문학을 묻다 7 - 낭만 앞에 선 인문학]과 그 사상적 재료인 야콥슨의 견해를 써머리하여 공유하였다.



#8

[인문학을 묻다 8 - 존재 앞에 선 인문학]은 경험론자인 버클리와 흄의 사상적 견해를 재료로 하여 결국 인문학적 담론의 기초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다시 말해 [존재에 대한 믿음]에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쳅터다.


이에 [인문학을 묻다 8 - 존재 앞에 선 인문학]과 그 사상적 재료인 흄과 버클리의 견해를 써머리하여 공유하였다.



#9

[인문학을 묻다 9 - 신비 앞에 선 인문학]은 구조주의 인류학을 재료로 하여 인류 문화의 근간이 근친상간의 금지라는 무의식에 기만한 것이라는 사상적 사조를 비판한 쳅터다.


우리의 인문학이 취할 것은 사람에 대한 따뜻하고 신비로운 시선일 뿐, 결코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강박과 독선이어서는 안 된다. 하여, 때로는 차갑고 날카로운 비판, 그래서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분석이 멋있어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에 열을 올리다 보면 어느 듯 인문학은 사람에게서 죽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쓴 글이다.


이에 [인문학을 묻다 9 - 신비 앞에 선 인문학]과 그 사상적 재료인 흄과 레비 스트로스의 견해를 써머리하여 공유하였다.



#10

[인문학을 묻다 10]은 스피노자의 사상을 재료로 하여 [인문학은 낭만이라는 필요조건 위에 서서 타자의 담론을 관조하여야 한다]는 견해를 밝힌 챕터다.


이 챕터는 자연주의자이자 공화주의자인 스피노자의 실패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살펴본 것에 의의가 있다.


즉, 그의 실패는 근대의 언어로 하자면 데카르트의 정념에 대하여, 지금의 언어로 하자면 무의식, 사회적 무의식, 타자 등에 대하여(달리 말하면 사람의 감성과 정념) 너무 낭만적으로 바라본 데에 있었던 것이어서, 오늘날의 인문학이 이러한 실패를 극복하려면 어떤 사상적 지반을 가져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고민한 지점이다.


이에 [인문학을 묻다 10 - 윤리 앞에 선 인문학]과 그 사상적 재료인 스피노자의 견해를 써머리하여 공유하였다.



#11

[인문학을 묻다 11 - 무의식 앞에 선 인문학]은 무의식에 관한 사상을 재료로 하여 인류의 정서가 허망함으로 치닫게 된 경과를 살펴본 챕터다.


그래서 이 챕터에서는 [스스로를 관조하는 관점이 여러 가지일 수 있지만, 그것을 역리로 사용하여 스스로를 해체하는 수순으로 몰고 가는 것이 과연 철학이나 인문학이 지향하여야 할 길인지를], 그리고 [존재와 삶의 이유를 고양토록 하지 않은 채, 만연히 사람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존재로 풀이하는 것이 얼마나 절박한 현실을 방치하는, 안일하고 소모적이며, 무책임한 행동인 것인지를]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에 [인문학을 묻다 11 - 무의식 앞에 선 인문학]과 관련된 사상적 재료인 헤겔, 프로이트, 야콥슨, 레비스트로스, 라캉에 대한 써머리를 공유하였다.



#12

[인문학을 묻다 12 - 물음 앞에 선 인문학]에서는 데카르트, 로크, 스피노자, 흄, 버클리, 칸트, 헤겔, 맑스, 프로이트, 니체, 야콥슨, 레비 스트로스, 라캉, 푸코의 철학적 견해를 압축하여 각각의 아포리즘으로 형성하였고, 이에 대한 반론을 통하여 현재의 인문학에 물어야 할,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떻게 산다는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물음을 파괴가 아닌 생산의 관점으로 살펴보았다.



#13

[인문학을 묻다 13 - 배고픈 돼지 앞에 선 인문학]은 사람이 사과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느냐에 대한 각 철학자들의 예상 답변을 일괄한 후, 이에 대한 비판으로써 인문학의 지향점을 살펴본 챕터다.


즉, 철학자들의 복잡한 사유와는 달리, 사람은 생존본능으로 사과에 대한 원초적인 지식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러한 생존본능에 터 잡은 지식이 사람을 생존하게 한 이후에, 비로소 사람이 사과를 낭만적으로 관조함으로써, 사과를 수색 대상, 채집 대상, 경작 대상, 요리 대상, 제례 대상, 장식 대상으로 심화하여 하나의 문화 및 문화적 지식을 형성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래서 알게 된 것에 대한 낭만과 알 수 있는 것에 대한 모험, 그것이 인문학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4

[인문학을 묻다 14 - 관계 앞에 선 인문학]은 유명론자인 오컴과 경험론자인 로크, 흄, 버클리의 견해를 사상적 소재로 하여, 사상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버젓이 존재하는, 스스로 역시 그럴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부정하는 모순에 빠져버리고 마는지에 대한 흐름을 살펴본 챕터다.


즉, 사람은 태어나서 엄마에 대한 믿음, 아빠에 대한 믿음, 나에 대한 믿음, 친구들에 대한 믿음, 지인들에 대한 믿음, 단체에 대한 믿음, 신에 대한 믿음으로 그 믿음의 영역을 확장하며 관계를 형성하고, 그것에서 소위 말하는 문화가 형성된다는 것으로, 사람이 사람인 이상, 그러할 것이라고 믿고 시작하는 것이 사람의 시작이자 인문학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15

[인문학을 묻다 15 - 진실 앞에 선 인문학]은 타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한다는 점을 황금률에서 찾고, 그 지점에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그리고 칸트와 니체의 사유를 살펴보았다.


이에 [인문학을 묻다 15 - 진실 앞에 선 인문학]과 그 사상적 재료인 데카르트, 로크, 스피노자, 흄, 버클리, 칸트, 헤겔, 맑스, 프로이트, 니체, 야콥슨, 레비 스트로스, 라캉, 푸코 등의 견해를 종합적으로 써머리하여 공유하였다.



#16

[인문학을 묻다 16 - 강요 앞에 선 인문학]은 오컴의 면도날 이론을 차용하여 [인문학은 당위가 아니라 필요에 중점을 두어야 하고, 그래서 사람에게 오류를 감수한 단정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챕터다.


이에 [인문학을 묻다 16 - 강요 앞에 선 인문학]과 그 사상적 재료인 [보편 논쟁 - 철학적 문제의 처음과 끝 1, 2]를 공유하였다.



#17

[인문학을 묻다 17 - 사랑 앞에 선 인문학]에서는 아가페와 관련한 내리사랑과 치사랑을 비교하여 인문학이 사람에게 취할 태도가 무엇인지를 고민하여 보았다.


그래서, 인문학은 카운슬러의 입장에서 사람에게 충고와 조언을 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무엇을 생각하여야 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해야 하는지,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어떤 가치판단으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물음을 어린아이의 관점에서 살펴 아울러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여야만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사람을 위한 학문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어보았다.



#18

[인문학을 묻다 18 - 돈키호테 앞에 선 인문학]은 사람들이 누대에 걸쳐 돈키호테와 산초에게 열광한 이유가 [비록 후회가 남는다고 하더라도 생각한 대로 살아보고 싶다]는 근원적 판타지에 근거하였을 것이라고 전제한 후, [어쩌면 미친 사람일지도 모르는 돈키호테와 그의 추종자 산초]을 주제로 하여 사회적 합의를 도출함에 있어 필요한 [아픔에 대한 배려]를 논하였다.


하여, [인문학을 묻다 18 - 돈키호테 앞에 선 인문학]과 이에 쓰인 사상적 재료인 [푸코]의 견해를 공유하였다.



#19

[인문학을 묻다 19 - 족함 앞에 선 인문학]에서는 칸트가 어떤 연유로 [인류가 가진 보편적 판단 패턴에 대해서만 언급한 채, 정작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한 언급 없이, 사람을 도덕률에 옭아 메어 버렸는지]에 대한 재고를 통하여, 인문학이란 사람이라는 범위 내에서 스스로 자제하여 자족한 삶의 방법을 제시하는 학문이어야 하는 것이라고 제시하였다.



#20

[인문학을 묻다 20 - 종교 앞에 선 인문학]에서는 기독교의 원리와 동떨어진 기독교의 상황을 비판함으로써, 그 지점에서 인문학은 종교적 현실 부정의 억제력에서 자유 하여, 현실의 치열함에 온 몸을 던짐으로써, 그 치열함 속에서 피울 수 있는 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불꽃이 되어야 한다고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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