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10/10

10화. 청도회담

by 은명

10화. 청도회담


며칠 뒤, 안창호와 이강은 손정도와 조성환을 북경의 번화가인 왕부정 거리에서 만났다. 왕부정은 명나라 때 ‘왕가의 우물’이 있었던 장소이다. 이들은 근처 동안시장 안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정영도는 안창호에게 시장 거리를 구경하고 오겠다고 했다.

국내에서 우여곡절을 겪던 손정도는 북미 감리교단의 후원을 받고 5월에 이곳 북경으로 파견되었다. 현재는 목회 활동을 위해 중국어를 배우며 조성환과 교류하고 있었다. 조성환은 1909년 2월에 북경 연락책으로 신민회에서 파견했던 동지다. 훗날(1912.8.15.), 손정도와 조성환은 만주 시찰에 나선 일본의 정계 거물 가쓰라 다로의 암살 혐의로 하얼빈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다. 가쓰라 다로는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일본의 한국 지배 논리성 인정’을 받아냈던 을사늑약의 주범이다.


안창호는 이갑을 통해서 조성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조성환(1875~1948)은 대대로 관직을 지냈던 부제학공파 집안 출신으로 대한제국의 장교양성 기관인 육군무관학교 2기생이다. 1902년 신규식, 노백린, 김희선 등과 육군무관학교 개혁에 앞장서다 13명이 구속되었는데, 그 가운데 유일하게 실형을 살고 나왔다. 조성환은 상동교회 청년회와 인연이 되어 손정도를 알게 되었고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조성환은 안창호의 독립전쟁 준비와 교육 운동에 크게 공감했다. 신민회 시절 평양 기명학교 교사로 있던 중,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지원 활동을 모색했다.


안창호는 조성환에게 안중근이 의병부대 규합을 도모하면서 연해주로 가고 있다고 전한 바 있었다. 조성환은 안중근의 망명길 의병 규합을 도우면서 교육 구국운동과 연해주 의병 연계 작업을 구상했다. 1908년 1월, 조성환은 안중근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크라스키노의 도헌 최재형을 만났고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의논했다. 연해주 독립운동 기지 개척은 러시아 사정으로 만만치 않았다. 조성환은 1909년 2월, 신민회 명령에 따라 북경으로 왔다. 무관학교 건설은 그의 최대과제였다. 마침 안창호로부터 밀산 기지 개척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고, 청도(칭다오)회담에 참여하였다.

안창호는 조성환을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했다.

“형님, 정미년 의병 전쟁 때 중근의 뒤를 쫓았었지요? 어디서 만났던가요?”

조성환은 안창호의 손을 잡으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그때 안중근을 찾아 함경북도를 헤매다가 두만강 근처 혜산에서 간신히 만났소. 의병부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지. 그때가 아마 (1907년) 11월쯤이었을 거요. 그런데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힘들어했던 것 같소. 그러니 이듬해 정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여기, 이강 동지가 있는 공립협회를 찾아간 게지.”

이강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랬지요. 도산이 안중근이 찾아갈 것이라고 했으니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성환은 이강을 따뜻한 시선으로 마주 보았다.

“그때 이강 동지는 『해조신문』 발행을 준비하고 있었소. 미국에서 날라오는 『공립신보』의 위력을 보고 러시아에서도 신문발행을 시도했던 것이지요. 맞지요? 하하.”

이강도 따라 웃었다.

“『해조신문』은 언론계 망명 인사들의 집합 장소였지요. 망명 언론인들은 가난뱅이였으니, 최봉준 선생이 돈을 댄 셈이고. 양성춘 선생의 도움이 컸습니다. 큰일을 하는 데는 돈과 지성이 모두 필요합니다. 하하.”

조성환은 연해주에서 있었던 미완의 일들이 생각났다.

“우리는 이강 동지와 함께 크라스키노로 건너가 최재형 선생을 찾아갔소. 한눈에 봐도 그분은 도량이 넓은 진정한 애국자였소. 그분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온 안중근을 매우 환대하고 처조카 엄인섭을 당장 소개합디다.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었고.”

안창호는 안중근의 망명길이 험난했음을 짐작하니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슬픔이 솟아올랐다. “최재형 선생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지들에겐 큰 힘이 되신 분이죠.”

조성환은 잠시 회상에 빠졌다.

“그렇다오. 최재형 선생과 의병부대를 추스르고, 마침 이범윤의 부대와 합쳐서 동의회를 재구축했소. 그리고 크라스키노를 출발해 하산 두만강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던 때가 1908년 여름이었소. 일설에 의하면 홍범도 의병부대가 안중근 부대와 협력 전투를 치를 전략을 수립하고 있었다고 합디다.”

안창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독립전쟁 준비는 결국 홍범도 부대가 머릿돌이 될 것입니다.”

조성환도 따라서 단호하게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해 4월, 안중근이 동의회 우영장으로서 보여준 경흥과 신아산 진공 작전의 승리는 조선의 무력을 보여주었지. 그 때문에 일본 놈들은 총동원령을 내려 토벌에 나섰고 끊임없는 귀순 공작을 병행했소.”

조성환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1908년 7, 8월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소. 놈들은 주민을 야만적으로 탄압했고 의병부대 물자는 최악의 상황이었소. 결국, 의병부대는 약화되었지. 마침 홍범도 부대가 연해주로 건너와 재기를 모색하게 되었으니 이는 큰 힘으로 작용할 것이오. 그러나 러시아 상황은 여의치가 않아요. 러시아를 믿을 수가 없어요. 연해주에 기지 개척 가능성을 궁리해 봤지만, 러시아를 쥐락펴락하는 일본의 간섭과 방해가 워낙 심해서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소. 그래서 북만주 기지 개척을 모색하는 것이 급선무라 여기게 되었소. 그러니 청도회담이 매우 중요하오.”

안창호는 문득 조성환이 안중근과 함께 겪은 노고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1909년 2월에 신민회는 형님을 북경 책임자로 파견했지요. 의병 정신을 계승한 청년들의 고급 군사훈련을 모색하기 위해서.”

조성환이 갑자기 떠오른 듯 말했다. “참, 무관학교 동기생인 신규식을 북경으로 오게 할 생각이오.”

“아, 신규식 동지. 그 사람이라면 새 나라 건설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혁명적인 동지이니까요.”

안창호는 생각이 같은 동지들로 인맥이 형성되니 국권 회복의 전도가 양양하다고 믿었다. 독립전쟁 준비. ‘어떻게 해서든 무력의 씨앗을 살려 놓아야 한다.’

안창호는 조성환 선배가 있어 든든했다. 조성환도 매사를 꼼꼼하게 살피고 배려하는 안창호가 있어 든든했다. ‘안창호는 선배들 앞에서 늘 겸손하다. 그러면서도 결정을 내릴 때는 단호하다. 무관 출신도 아닌데 독립전쟁 준비를 설파하다니! 안창호가 군사훈련을 받은 무관 출신이라면 어땠을꼬?’ 조성환은 안창호를 바라보며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이강과 손정도는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면서 신뢰를 보냈다. 손정도는 특히 안창호의 화법과 중저음 목소리에 반하게 되었다. ‘저 목소리로 설교한다면 교회는 만원일 것이다.’

조성환은 훗날 안창호가 미주로 돌아가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으로 해외 독립운동을 진두지휘할 때, 신해혁명 등 중국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신민회 동지들의 독립운동 상황을 편지로 낱낱이 알렸다.


1910년 7월 초, 안창호는 정영도, 이강, 이갑과 함께 산동성 대도시인 청도에 도착했다. 청도는 역사와 문화의 명승지이고, 산과 바다를 끼고 있어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1897년 11월, 독일 군대가 들어와 청도를 점령하고 그 일대를 조차지로 삼았다. 당시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퇴하였고, 러시아 ‧ 독일 ‧ 프랑스 3국이 일본의 중국 점령을 간섭하고 나서면서 청도지역은 독일이 강점했다. 중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된 상태였고, 독일과 일본의 관계 역시 나빴다. 그 때문에 청도는 일본으로부터 비교적 안전지대였다. 또한 청도는 바닷길과 육로가 자유로운 교통의 요충지였다. 청도에서 회담을 약속했던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약속 장소는 독일총독부 관저 근처에 있는 신호산 공원이었다. 멀리 바닷가로 청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잔교(棧橋)가 보였다.


국내 탈출에 성공한 신민회 동지들이 모여들었다. 이날 모인 사람은 이갑, 신채호, 이종호 형제, 김지간, 이강, 박영노, 조성환, 김희선, 유동열 그리고 정영도였다.

안창호는 신채호와 김지간을 보자마자 안도의 숨을 크게 쉬었다. “무사히들 오셨구려. 압록강을 건너온 건 하늘이 도운 것이오. 서간도 땅을 밟은 소감은 나중에 들읍시다. 하하.”

신채호가 말했다. “그땐 정말 뱃멀미 때문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덕분에 고구려 땅을 밟을 수 있어 좋았지요. 우리 둘이 여기저기 역사 흔적을 찾아 헤매다 이곳에 왔습니다. 김지간 동지가 청도회담 약속 장소에 꼭 가야 한다면서.”

김지간이 옆에서 웃고 있었다. 안창호는 이들을 다시 보게 된 것이 마치 일이 잘 풀릴 징조처럼 느껴졌다. 이 회의에서 신민회 사업 추진 방향에 대해서는 모두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해외 활동의 측면에서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었다.

안창호가 회의를 주재했다.

“모두 이렇게 무사하셨군요. 하늘이 우리 조국을 돕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지금 서, 북간도와 시베리아에는 수십만의 우리 동포가 살고 있습니다. 신민회에서 결의한 바대로 북만주 일대의 땅을 사서 자급자족의 기반을 마련하면서 사관학교를 운영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강이 말했다. “미주 국민회에서 아세아실업주식회사 이익금으로 러시아 국경 인접 지역인 북만주 밀산 십리와에 일부 농지를 매입하고, 자급자족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자금이 턱없이 부족하여 이주민 중심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안창호가 부연 설명을 했다. “제가 들은 바로는 둔전병 식으로 개척한다면 의병부대 결집을 도모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만간 밀산으로 가보려고 합니다.”

그러자 김희선이 유동열을 바라보며 잡지를 발행하여 중국을 무대로 대일 정치 운동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은 어떠냐고 뜬금없는 의견을 피력했다. 안창호는 의구심을 감추고, 잡지 발행도 좋은 생각이니 독일 당국으로 가서 알아보자고 했다. 독일 총독은 정치적 색깔의 잡지 발행은 불허한다고 못을 박았다.

참가자 일행은 원안대로 밀산 기지 개척과 동시에 사관학교를 세우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사관학교 운영 개요도 합의를 보았다. 유동열, 이갑, 김희선이 군대 교련 교육을 담당하고, 신채호가 역사 등 일반과목과 교양을 가르치고, 김지간은 농업경영을 가르치기로 했다.

5천 루블 자금을 대기로 약속했던 이종호는 러시아은행 상해 지점에 예치되어 있던 돈을 알아보았으나 통장은 비어있었고 누군가가 이미 예치금을 찾아갔다고 했다. 안창호와 일행은 자금줄이 무산되자 크게 낙담했다. 일단 북만주 밀산으로 가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일단 흩어져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고 해산했다. 유동열과 김희선은 일행과 헤어져 따로 만주로 가다가 1910년 10월, 연태(옌타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유동열은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0년 형을 받았으나 1913년 3월에 무죄 방면된다. 김희선은 국내로 압송된 후 일본의 회유정책에 넘어가 안주 군수로 재직하다가, 1919년 3.1운동 이후 관직을 버리고 상해로 간다.


이강과 이갑은 북경과 상해를 오가며 간신히 러시아 여행권을 마련했다. 안창호는 이강과 이갑, 정영도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배를 탔다.

배가 상해 푸동 항을 빠져나갈 무렵, 이강이 소식을 들고 달려왔다.

“도산, 큰일 났소! 이 배는 일본 나가사키 항구를 들렀다 가는 배요!”

안창호와 이갑은 당황하면서 바다 주변을 살피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아니, 이런 낭패가 있나?”

“이런, 낭패로군!”

이강이 소리쳤다. “이대로 가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격이요. 근처에서 내립시다.”

네 사람은 선장에게 사정사정하여 간신히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오송 근처 등대에서 내렸다. 세 시간 남짓을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망망대해에서 쩔쩔매었다. 그러다 다행히 상해 항구로 들어가는 중국 군함에 구조되어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직행하는 배를 타게 되었다.

(2장 마침. 3장에 계속)

이전 09화제2장.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