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안창호의 노동
안창호는 이갑의 초청이 무산되자 마음을 추스르고 샌프란시스코와 스톡턴, 맨티카, 새크라멘토 등 캘리포니아 일대 한인농장을 순회하면서 북미실업주식회사 발기를 준비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경제학 기초를 학습했다. 백일규와 송종익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독립전쟁에 대비하려면 자본을 확보해야 해.’ 안창호는 망명 여정에서 자금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뼈아프게 느껴왔다. 안창호는 경제운동, 실업운동을 일으키는 일은 미주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걸음마를 시작하기에 적합한 곳, 개척 정신을 가지고 일을 하면 돈을 모을 수 있는 땅. 이 광활한 땅, 미국이 독립전쟁 준비의 최적지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미국은 냉정하지만, 공정한 사회이기도 하다. 자본의 논리가 통용되는 사회. 회사를 결성하여 이익과 시너지를 내면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 ‘미주 한인 동포들은 자본의 힘을 길러 독립전쟁을 준비한다.’ 안창호가 내린 결론이었다. 안창호의 캘리포니아 일대 순방에 신달윤이 따라나섰다.
신달윤(1881~?)의 꿈은 항공력으로 독립전쟁을 치르는 것이었다. 신달윤은 1921년 5월 22일 윌로스비행학교 조종사 자격시험에 합격한다. 안창호를 따랐던 청년들은 안창호의 활동을 통해서 인격을 배웠다. 안창호는 청년들의 인격 스승이었던 셈이다. ‘인격 형성’은 지식으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롤모델을 통해 덕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인격이 성장한다. 안창호가 방문하는 곳마다 청년들이 따랐고, 안창호는 이들과 마주하면서 이들이 장차 독립된 새 나라를 이끌어 갈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을 위한 좀 더 체계적인 훈련단체를 설립해야 한다.’ 안창호의 머릿속에 ‘흥사단’ 구상이 떠나질 않았다.
안창호는 캘리포니아 일대를 순회하면서 짬짬이 막노동으로 일당을 벌어 활동경비로 충당했다. ‘노동을 자본으로!’가 안창호의 생활신조였던 셈이다. 안창호는 다양한 형태의 노동을 했다. 안창호는 부잣집에서는 하우스 보이가 되고 농장에서는 허드렛일을 했다. 광산에 가면 광부가 되고 파나마운하 공사장에서는 시멘트와 흙을 날랐다. 중국집에서는 그릇을 닦거나 청소를 하고, 오렌지 농장에선 오렌지를 땄다.
안창호는 ‘노동운동가’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노동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고, 또 실천했다. 안창호의 노동은 ‘무실역행’이다. 어떤 노동을 하든 덕, 체, 지의 3요소는 노동의 기본 요소이다. 그것이 인격이다. 노동은 신이 인간에게 내려 준 선물이며,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자유와 평화를 획득할 수 있다. 평등과 부의 축적도 노동을 기반으로 한다. 성실하고 정직한 노동은 세계 어디에서나 통용된다. 노동에는 따로 언어가 필요 없다. 그러나 몸이 약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체력 관리가 중요하다. 이러한 생각은 이갑과 신채호, 장도빈을 안타깝게 지켜보면서 안창호가 얻은 결론이었다.
캘리포니아 중부 프레스노에서 60마일 떨어진 첩첩산중 아이드라에 수은 광산이 있었다. 그곳에 30여 명의 한인이 중국인과 섞여 힘든 노동을 하고 있었다. 안창호도 그곳에 일자리를 얻어 며칠 동안 있으면서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들은 국민회로 의무금을 꼬박꼬박 내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일대 순회를 마치고 국민회관으로 돌아오니 2통의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안창호는 신민회 부총감 겸 집행원 책임자로서 각처로 흩어진 신민회 동지들의 관련 보고를 서신으로 받고 있었다. 해외로 흩어진 신민회 회원들은 안창호에게 사건 사고들을 보고해 왔다.
소식에 의하면 국내는 현재 데라우치 총독의 탄압 정국이었다. 일제총독부는 안악 사건(1910.11)을 조작하여 160명을 체포했다. 이 사건은 안중근의 사촌 동생 안명근이 황해도 안악에서 서간도 무관학교 자금 모금에 나섰다가 밀고를 당했는데, 일본이 총독 데라우치 암살을 꾀했다고 조작한 사건이다. 체포된 사람 중에는 김구, 최명식, 이유필 등 신민회 인사들이 포함되었다. 1911년 9월부터는 신민회 비밀조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드러났다. 무차별로 체포된 신민회 인사들은 무려 800여 명이 넘었다. 안창호는 신민회 탄압 사건이 가져올 파장이 걱정되었다. 신민회 핵심 동지들은 지금쯤 한창 고문을 당하고 있을 터였다. ‘몸들이 많이 망가질 터인데....’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안창호는 먼저 이강이 치타에서 보낸 두툼한 편지부터 뜯었다. 2통이 들어있었다. 하나는 8월 7일 자로 정재관의 서명이 있는 편지였다. 이강은 시베리아지방회 소식을 전하면서 안창호의 안부를 물었다. 시베리아지방회는 조직이 급속히 늘어나는 추세라면서 머지않아 지방총회를 설치할 계획이라고 했다. 또 하나는 10월 11일 자로 김성무도 서명한 보고서였다. 『대한인정교보』 발행 취지서가 들어있었다. 기관지 『대한인정교보』 발행은 러시아 당국의 간섭으로 잡지 형태의 정교 월보로 발행하게 되었다고 보고하였다. 러시아 당국이 한인을 경계하여 한인의 러시아 귀화를 권장했기 때문이다. 『대한인정교보』는 1912년 1월에 창간호를 간행한 이후, 일본군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시베리아 한인사회의 추방 압력을 가해 오는 1914년 6월까지 총 11회 간행되었다.
안창호는 즉각 국민회 이름으로 답장을 썼다. 이갑의 미국 상륙이 좌절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치타국민회와 시베리아지방총회를 지원한다고 전했다. 이강에게는 이갑을 잘 돌봐주기를 부탁한다고도 썼다.
두 번째로 안정근의 편지를 뜯었다. 1911년 10월 28일에 보낸 것이다. 안정근은 안창호와 이갑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두 분 형님이 마련해 준 목릉 팔면통 농토에서 벼를 수확했고, 벼농사 농법 연구로 겨울을 날 계획이라고 했다.
안정근의 편지에서 충격적인 내용은 4월, 목릉으로 거처를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중근의 장남 분도가 독이 묻은 과자를 먹고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안정근은 밀정 짓이라고 했다. 안중근의 유족들이 그들의 감시에서 벗어난 화풀이로 그의 맏아들에게 접근한 것이라고 했다.
안창호는 깊게 탄식했다. ‘아, 분도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나는 그것도 모르고 목릉을 지나갔구나.’ 안창호는 한동안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꼼꼼하게 대비하고 주위를 시켜 지켜주지 못한 것이 회한으로 남았다. 안창호 품에 안겼던 분도의 해맑은 얼굴이 떠올라 애끊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3장 마침. 4장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