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나의 사랑 한반도야 #9/10

9화. 미주 동지들

by 은명

9화. 미주 동지들


안창호는 편지에서 약속한 대로 정영도를 데리고 혜련을 만나러 리버사이드로 갔다. 사실 혜련은 남편이 보고 싶은 마음에 샌프란시스코로 마중 나가려고 했으나 집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공과 사가 분명한 남편이었기에 혜련은 늘 그랬듯이 섭섭함을 그리움으로 대신하였다. 혜련에게 남편은 공경의 대상이자 ‘그리움과 기다림’의 대상이었다. 혜련은 안창호를 존경했다.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첫 마디로 언제나 ‘사랑하는 나의 혜련’이라고 썼다. ‘사랑’이라는 두 글자로 마음을 전하는 남자, 안창호. 그 이상 무엇을 바라랴. 마침내 안창호는 혜련과 필립을 만났다. 필립은 6살이었다.


1911년 10월 4일, 안창호 환영회. 을사늑약 이후 고국의 국권 회복 의지를 탐색하고, 고국에 대한신민회를 설치하러 떠났던 지도자 안창호가 돌아왔다.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고 있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회 동지들이 환영 만찬을 준비했다. 북미 한인사회는 안창호의 이야기를 듣고자 구름떼처럼 모였다. 안창호는 도착 인사말을 통해서 신민회 사업 추진 경위를 간단히 보고했다.

“신민회 인사들은 공화제 신국건설에 힘을 모으기로 했고 일본을 견제한 독립전쟁 준비에 합의를 이루었습니다. 교육을 일으키고 실업을 육성하여 민족 자본을 형성해 나가는 사회개혁에 힘을 키워가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까지 해산하는 정치적 폭정을 휘둘러 댔소. 매우 혼란한 때, 하얼빈에서 안중근 동지가 엄청난 거사를 했소. 이 일들은 모두 여러분이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나는 배후로 주목되어 잡혀가 고초를 겪었소. 그리고 더는 고국에 있을 상황이 아니어서 일단 연해주로 빠져나왔소. 그때 나는 국권 상실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했었소. 연해주. 그곳에는 우리들의 동지 이강, 정재관, 김성무가 파견 의무를 다하고 있었소. 그러나 애국지사들이 러시아 한인사회로 모여들자 지역 파벌과 분열로 서로 원수가 되어 우리 동지들은 시베리아로 거점을 옮길 수밖에 없었소. 러시아가 동아시아 진출을 놓고 일본의 눈치를 살피며 미국과 겨루기를 하고 있어 우리 동지들은 앞날이 만만치 않은 상황이오. 신민회 간부들이 북만주 밀산에 투자를 시도했으나 무산되었습니다. 여러분이 파견한 김성무 동지의 고초가 말도 아닙니다. 신민회 동지 몇 분이 서간도에 땅을 구매하여 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기지를 개척하고 있소. 그곳은 일이 잘 진척되어가고 있어 희망적입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신민회 뜻에 따라 재산을 털어 서간도 개척에 나선 이회영 선생을 존경합니다. 근거지가 확보되면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어있소.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안창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빠져드나 싶더니 이내 소리높여 말을 이었다.

“나는 시베리아 열차로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었소. 연해주에서 북만주를 지나 시베리아로 들어설 때 고구려와 발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역사는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숲과 강과 호수를 끼고 있는 비옥한 땅.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땅. 해외 기지 개척과 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형편을 알아보려고 페테르부르크까지 갔던 이갑 동지가 중풍을 앓고 있었소. 나는 억장이 무너졌소. 추정 이갑이 혼자 감당해 온 독립운동의 영역은 시베리아 벌판과는 비교도 안 될 지경이라오. 나는 고국에서 내내 그를 의지했고 그의 신세를 졌소. 그분은 안중근의 유가족을 위해 목릉에 땅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나는 이제 병든 그분을 이곳으로 모셔 오려고 합니다. 이곳에서 병을 고치고 청년에게 군사 지식을 전수하며 살게 하고 싶소. 그래서 『신한민보』 편집인으로 초청하고 싶습니다.”

“모셔 옵시다! 우리가 돈을 내겠소!”

환영객들은 모두 손뼉을 치면서 외쳤다. 안창호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미주 동지들의 호응에 감격했다.

환영 만찬이 끝나고 송종익이 다가왔다. 송종익은 안창호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송종익이라고 합니다. 1908년에 하와이를 거쳐 여기로 왔습니다. 지금은 최정익 사장 밑에서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최정익은 공립협회 창립회원이며 안창호의 돌아가신 둘째 형의 부인과 재혼했다.

안창호는 그의 손을 잡았다. “오, 송 동지! 반갑소.”

최정익이 다가와서 참견했다. “송종익 동지는 한의사나 다름없습니다. 미국말을 어찌나 빨리 습득하던지 조금은 놀랍습니다. 하하.”

송종익이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원, 사장님도. 오늘 도산 선생 말씀을 듣고 가슴이 벅찼습니다. 선생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안창호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혜련이 늘 송 동지의 보살핌에 감동하며 나날을 지냈다고 합디다. 그래서 사실은 그대 얼굴이 몹시 궁금했었소. 하하.”

안창호가 유쾌하게 웃자, 이번엔 백일규가 다가와 대화에 끼어들었다. “스티븐스 사건 때도 송 동지가 장인환, 전명운 재판 후원에 앞장섰지요.”

안창호는 백일규와 악수했다. “내가 듣기로는 백 동지가 큰일을 했다고 들었소. 1908년 ‘3.23 의거’는 쾌거요.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 합작품이라니. 정말 대단하오.”


백일규(1880~1962)는 평안남도 증산 출신이며 대동보국회 사람이다. 그가 공립협회가 아닌 대동보국회 인사가 된 것은, 보왕파 성향 때문이다. 백일규는 1905년 5월 진남포에서 하와이 이민선을 탈 때 강명화 가족 12명과 동행했다. 이듬해 8월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문양목, 장경 등 황제권 강화를 지지하는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장경의 대동교육회는 1907년 3월 대동보국회로 확대 발전하여 공립협회와 쌍벽을 이루게 된다. 백일규는 1908~9년 네브래스카주로 이주하여 박용만과 교류했다. 그곳에서 박용만이 키우는 한인소년병학교 간부로 봉사했다. 1912년 미주로 망명한 안창호를 만나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을 지내고 1914년 흥사단에 가입했다가 얼마 후 학업 전념을 이유로 흥사단을 탈퇴한다. 백일규는 1918년 『신한민보』 주필로 활동하면서 캘리포니아대학 경제과를 졸업하고 1920년 『한국경제사』를 발간한다. 안창호가 노동 체험을 넘어 경제 지식을 연마하여 실업 운동을 선도하는 데 있어 백일규는 스승이나 다름없었다. 백일규는 1919년 4월, 안창호 후임으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이 된다. 백일규는 30만 달러를 조달하여 상해임시정부로 보냈다. 그리고 중앙총회는 1919년 7월 상해임시정부로 통합된다. 이후 백일규는 1926년 2월 북미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1934년까지 8년간 봉직한다.


안창호는 파나마운하에서 노동으로 번 돈과 혜련이 삯바느질로 모아둔 돈을 합해서 300달러를 마련했다. 또 국민회 회원 150여 명이 256달러를 모금했다. 재미 한인 156명도 기꺼이 찬조금을 보탰다. 안창호는 이 치료비와 함께 이갑을 『신한민보』 주필로 초청한다는 여행 증명서를 페테르부르크로 보냈다.

후일담에 의하면 이갑은 안창호가 보낸 돈을 받고 감동하여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갑은 이 돈을 쓰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가 목릉에 있을 때 본국 땅을 판 돈과 합해서 안창호의 아들 필립과 안중근의 아들 분도의 이름으로 만주 땅을 구매했다.

이갑은 미국행을 결심하고 뉴욕항까지 왔으나 끝내 입국허가를 받지 못했다. 이갑은 1911년 11월 24일 자로, 초청장을 보내준 국민회 동지 20여 명 앞으로 감사 인사 편지를 보내왔다. 안창호는 안타까운 마음에 이갑을 이강이 있는 치타로 가게 했다. 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 청년들이 이갑을 치타로 모셔갔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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