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베를린과 런던을 거쳐 뉴욕 도착
안창호는 이갑의 소개장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베를린에 도착하여 메르크바흐를 찾아갔다. 그는 이갑의 서명이 있는 소개장을 보자마자 환한 얼굴로 안창호의 손을 잡았다. 언어 소통은 되지 않았으나 안창호는 마음이 놓였다. 그의 안내에 따라 집으로 들어서니 부인과 딸이 나와 손님을 반겼다. 안창호는 낯선 사람에게도 마음을 열고 웃는 얼굴로 대하는 이들의 모습에 감동했다.
‘우리나라도 이런 사회로 발전해야 한다. 유정한 사회.’
안창호는 짐을 풀고 베를린대학부터 찾아갔다. 유길준 선생이 『서유견문』에서 소개한 바 있는 베를린대학에 꼭 와보고 싶었다. 이 대학은 1810년에 훔볼트가 설립했다. 유길준 선생은 책에 베를린대학의 학생 수, 교직원 수, 교실 수, 과목 등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그러면서 고금의 으뜸 대학이라고 했다. 책에서 도서관 등을 자랑한 것을 보고 안창호는 태극서관을 꿈꾸었다. 우리나라 청년들도 이런 대학으로 유학하게 하면 좋을 것이다. 안창호는 베를린 시가지를 다니면서 눈에 들어온 도로, 운하, 가로수, 건축물, 시장 등을 보고 메모했다. 장차 우리나라도 이렇게 근대국가로 설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창호는 조국이 광복되면 도시 디자인 공부를 전문적으로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야. 그러나 꿈은 또 얼마나 신선한가? 희망을 품게 한다. 유쾌한 희망!’
며칠 후 안창호는 이갑이 소개해 준 유학생 청년 김중세와 장택상 등 몇몇을 만났다. 안창호는 유학생 청년들과 유럽의 정세를 비롯하여 유럽 민중이 처한 현실에 대하여 토론했다. 유럽은 1848 시민혁명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으로 독점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안고 있는 모순에 대한 저항의 기류가 많은 것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했다.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이 성장하고 있으며 노동자 단체들이 국제연대를 결성하고 정당을 구성하여 참정권을 가지려는 움직임이 관측된다고 했다. 제국주의로 인해 약소 민족들도 해방과 혁명을 부르짖고 있어 우리 나라도 예외가 아니라고 했다. 특히 조국의 암담한 현실에서 해방이 되면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청년들은 우리나라도 공화주의 이념으로 민족혁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안창호는 깊이 공감했다. 공화주의는 사적 욕구를 절제하고 공익에 참여하는 시민적 덕성에 기초한다. 이는 또한 가족 중심의 개인 윤리가 사회 공동체 윤리 규범으로 확장되는 동양의 전통 윤리와도 맥을 같이 한다. 안창호는 유럽을 체험하고 있는 유학생들이 소중하고 자랑스러웠다. 장택상의 후일담에 의하면 도산은 대화 중 학생들에게 존칭어를 썼으며, 어떤 특별한 문제에 대해서는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답을 유도하는 대화 기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해방 후 ‘우리 대한민국의 진정한 대통령이 해방을 못 보고 돌아가셨다.’라고 한탄한 바 있다. 장택상은 1952년 이승만 정부에서 국무총리로 발탁되는 인재다.
8월, 안창호는 정영도가 베를린에 도착하자 메르크바흐 박사가 써 준 소개장을 들고 짐을 꾸려 영국으로 무사히 건너갔다. 마침내 경비가 바닥이 났다. 안창호는 궁리 끝에 중국 식당을 찾아가 허드렛일을 돕는 일자리를 겨우 얻었다. 중국인 왕 사장은 친절했다. 안창호는 열심히 일했다. 정영도가 이리저리 알아보니 8월 24일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항에서 대서양을 가로질러 뉴욕으로 가는 배편이 있었다. 칼레도니아 호였다. 안창호는 런던에서 마냥 지체할 수가 없었다. 안창호는 급해진 마음에 중국인 왕 사장에게 뱃삯 50달러를 빌렸다. 큰돈이었다. 그러나 안창호의 진실성과 성실함에 감동한 왕 씨는, 그 돈을 갚으리라는 기대 없이 안창호에게 선뜻 돈을 빌려주었다.
스코틀랜드에서 뉴욕으로 올 때 영국 관리가 안창호의 러시아 여행권을 보자 ‘일본신민’이라는 선서를 압박했으나 안창호는 이를 거부했다. 뉴욕에 도착해서는 미국 이민국의 사증이 인정되어 정치적 망명인으로 하선할 수 있었다. 나라가 없어진 까닭이다. 안창호는 1911년 9월 3일 뉴욕항에 도착해서 첼시호텔에서 하루 묶었다고 부인 혜련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는 독일과 대서양을 건너오면서 건강상태가 좋아졌고, 얼마 동안 이곳에 머물겠다고 썼지만, 안창호는 영도와 함께 파나마운하 공사장으로 직행했다.
파나마운하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64km에 달하는 인공 뱃길이다. 남아메리카를 우회할 필요 없이 태평양으로 관통된다. 파나마운하 건설은 1880년대 프랑스가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1903년에 미국이 운하 건설권을 가지고 공사에 착공하여 1914년에 개통된다.
안창호는 개조를 문명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위대한 문명의 공사 현장이 궁금했다. 간신히 시멘트와 흙을 나르는 일자리를 얻어 일을 시작했다. 막노동을 하면서 안창호는 수에즈운하를 건넌 유길준을 생각했다. 유길준은 1년간 미국 유학을 하다가 귀국길에 1885년 수에즈운하를 건너와서 『서유견문』을 썼다. 수에즈운하는 1869년 11월에 개통되었는데, 아프리카를 우회할 필요 없이 지중해와 홍해를 가로질러 태평양 뱃길을 이용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운하 뱃길은 서양의 동양 침략에 크게 이용되었다. 파나마운하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창호는 파나마운하와 수에즈운하가 근대를 넘어 인류 문명의 미래로 관통하는 위대한 개조라고 생각했다. 안창호는 운하 공사장에서 며칠 일하고 일당을 챙겨 런던에서 중국인 왕 씨에게 빌린 50달러를 갚았다. 고맙다는 인사 편지와 선물도 함께 보냈다. 그리고 이갑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얼마간 더 일했다.
마침내 안창호는 공사장을 떠나 뉴욕에서 시카고를 거쳐 미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9월 26일 새크라멘토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신달윤의 벼 농장을 방문하고 회포를 풀며 휴식을 취했다. 신달윤은 1907년 1월 초, 공립협회 국내지부 ‘대한신민회’의 발기인이다. 안창호는 1910년 4월 7일, 모국을 떠나 중국과 연해주, 러시아와 유럽을 거쳐 미주 동지들 곁으로 온 1년 6개월의 망명 여정이 꿈만 같았다. 이틀 후, 다시 행장을 꾸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때는 1911년 9월 28일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