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페테르부르크의 이갑
이강과 정재관이 치타로 거점을 옮겨 국민회 조직사업이 진척되자 안창호는 다시 미주로 가려던 길을 재촉했다. 1911년 6월 25일 안창호는 동지들과 작별하고 정영도와 함께 시베리아 열차를 탔다.
열차는 울란우데와 이르쿠츠크를 지나 모스크바를 향해 몇 날 며칠을 달리고 또 달렸다. 광활한 시베리아 벌판과 밀림을 지나면서 안창호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안창호는 동지들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김필순, 양기탁, 안태국, 차리석. ‘내가 중근이 일로 잡힐 때 신민회 문서들을 태워 버리길 참 잘했어.’ 안창호는 모험으로 시작한 결사체가 역사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려 할 때 마주한 위기의 순간들을 떠올렸다. 죽음을 초월한 동지애를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안창호는 문득 안중근을 생각하다 장례도 못 치른 사실이 떠올라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인간의 존엄성은 상실되었다. 안중근 가족이 목릉에서 이 어둠의 시대를 잘 버텨 주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옆에 있던 정영도가 당황하여 “선생님, 왜 그렇게 우십니까?”하고 물었다.
열차는 시베리아의 울창한 숲을 뚫고 지나가고 있었다. 안창호는 인간의 운명과 삶의 가치에 대해 생각했다. 인간의 존엄함은 고뇌에 그 바탕을 둔다. 운명의 가치는 우리가 역사적인 삶을 살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역사적인 삶이란 우리에게 닥친 질곡과 풍파를 뚫고 나아가는 것, 자력으로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가 없는 고뇌와 광증은 무의미하다. 역사적인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자아 혁신이다. 조국광복과 번영이라는 종착역에 도달하기 위한 출발점은 개인의 혁신이요, 정치적 단결력이다. 이는 흥사단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안창호는 이러한 기초 위에서 사회 제도를 준비해나가야 한다고 믿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열차가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안창호는 정영도를 시켜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이갑에게 연통을 넣었다. 이갑은 지난 1월 밀산 방문에 동행한 이후 목릉에서 헤어졌다. 낯선 여정에서도 만날 동지가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이갑이 페테르부르크로 간 이유는, 이범진 공사를 만나 러시아 극동 한인사회의 권익을 청원하고 밀산에 사관학교 설립 자금 지원을 모색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갑이 떠난 얼마 후 안창호는 이범진 공사의 자결 소식을 들었다. 이범진 공사는 1월 26일 권총으로 자결을 시도했다가 실패하자, 다시 목을 매서 자결했다. 그가 유언으로 남긴 천 루블은 신한촌 한민학교 신축 기부금으로 쓰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창호는 이갑이 실망하고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의 안부도 몹시 궁금했다. 사실 목릉에서 헤어진 이후 서너 달간 아무 기별이 없었다. ‘잘 있겠지. 정치와 외교 수완이 남다른 사람이니.’
이갑(1877~1917)은 평안남도 숙천 출신이다. 안창호와는 1살 차이로 만민공동회 관서지부 결성 때 만났다. 이갑은 독립협회 해산 이후 한국육군무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으로 가서 게이오의숙과 세이조학교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보병과를 졸업했다. 1904년에 귀국해 1905년 을사늑약이 일어나자 군인 신분을 사직했다. 그러고 나서 전덕기 목사의 상동교회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서우학회와 오성학교를 설립, 근대 교육 운동에 앞장섰다. 이갑은 노백린과 함께 유길준의 흥사단에도 참여했다.
1907년 안창호가 귀국하여 독립전쟁 준비를 호소하자 이에 뜻을 같이하고, 신민회 발기인에 서명하여 안창호와 절친이 되었다. 이갑은 안창호의 높은 이상을 존중하여 그가 정치 일선에 나서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안창호는 원칙에 충실하고 신중했다.
이갑은 자기 주머니를 털어 안창호의 신민회 등 활동비를 후원했다.
안창호는 군사 지식과 덕성을 겸비한 이갑을 좋아했다. 이갑의 소개로 일본육사 동기인 유동열, 김희선, 노백린 등과도 전쟁준비론에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이갑은 성실하고 낙관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실 사람 보는 눈은 그리 예리하지 못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안창호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최석하와 정운복에게 설득당해 나를 이토 히로부미와 만나게 했었지. 큰 실수를 할 뻔하지 않았는가.’
7월 초, 안창호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수소문 끝에 그가 병이 나서 거동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낙담하였다. 마침내 이갑의 병실로 그를 찾아갔다.
이갑은 자리에 누워 있었다. “도산이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형님, 이게 무슨 일이오. 왜 누워계신 게요?” 안창호는 일어나려고 애쓰는 이갑의 손을 잡고 울음을 삼켰다. 안창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갑은 찾아와준 안창호가 고마웠다. “울긴 왜 우오? 연필을 깎다가 손을 베였는데, 괜찮겠지 하고 며칠을 놔두다가 이 꼴이 됐소.”
안창호는 마음을 진정한 뒤 자초지종을 물었다. “언제부터 이리된 것이오?”
“1월 말경이던가? 그때 목릉에서 헤어져 하얼빈에 들렀다가 치타에서 시베리아 열차를 갈아타고 예까지 부지런히 왔는데... 도산도 그렇게 온 것 아니오? 하하.”
이갑은 특유의 호쾌한 말투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형님이 여기로 떠난 며칠 후에 이범진 공사께서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형님 걱정을 많이 했소.”
이갑은 이곳에 도착했을 당시의 황당함을 떠올렸다. “사실은 여기 도착해서 그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지긴 했었소. 의논할 상대 어른이 그렇게 비분강개하다니....”
“그럼, 돌아오지 그러셨소.” 안창호는 안타까운 마음에 원망하듯 말했으나 곧 후회했다. ‘우리가 돌아갈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도 이렇게 떠돌고 있지 않은가?’
이갑은 안창호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럴 생각이 없진 않았소. 하지만 이렇게 된 몸으로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이오? 그리고 내가 누구요?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여러 사람을 만났지. 여기에 주저앉은 관리도 있고, 거쳐 가는 유학생도 있고.”
“음, 그들과 후일을 도모하셨군요.” 안창호는 ‘과연 형님답다’고 생각했다.
이갑은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그렇다오. 무관학교 투자자를 물색하려면 러시아 말을 배워야겠기에 열심히 공부하다가 그만.... 처음에는 왼손 검지로 마비가 시작되더니 왼손 전체로 퍼지고, 보다시피 왼쪽 다리까지 마비됩디다. 손을 일찍 썼어야 했는데... ‘설마’ 한 것이 이리될 줄 누가 알았겠소.”
안창호는 억장이 무너졌다. ‘추정이 이대로 무너지면 안 된다. 어떻게 하든 낫게 해야 한다.’ “형님, 제가 빨리 미주로 돌아가서 형님이 미국으로 입국할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틀림없이, 완쾌의 방법을 찾아내겠습니다.”
이갑은 안창호와 작별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무너졌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도산, 유럽을 경유할 여행권은 있소? 베를린에 내 친구가 있는데 메르크바흐라는 의사요. 그의 도움을 받으세요. 아주 좋은 친구라오. 그의 집에 거처하면서 베를린대학 유학생들도 만나 보시오. 이름이 김중세라고 했던가?”
안창호는 감동했다. “형님, 이곳에서 많은 일을 하셨군요. 형님 말씀대로 독일에 들러 소개해 주신 청년들을 만나보겠습니다. 하지만 형님이 걱정이오.”
“나야 뭐, 영도가 당분간 곁을 지켜 줄 것이고, 또 내 운명은 하늘에 맡기겠소이다. 하하.” 이갑은 안심된다는 듯 정영도와 안창호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안창호는 ‘운명은 하늘에 맡긴다’는 이갑의 말에 말을 잇지 못했다.
“.......”
“내가 베를린 의사 친구한테 소개장을 써 주겠소. 아직 오른손은 멀쩡하다오. 하하. 혹시 독일 의사 친구가 내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술이 있을지는 모르겠소만.”
이갑은 누운 채로 침대 머리맡 베개 밑을 뒤적거리더니 회중시계를 꺼내 안창호에게 건넸다. 금딱지. 값이 나가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이 물건은 비상금이오.”
안창호는 회중시계를 받아 쥐며 말했다. “형님, 이 아우가 꼭 형님을 미주로 모셔 지켜드릴 것입니다.”
안창호는 여행권을 구할 때까지 정영도에게 이갑의 간호를 맡겼다. 그리고 미주국민회로 이 소식을 전하게 했다. 치료비 모금에 대한 부탁도 잊지 않았다. 안창호의 마음은 바빠졌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