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치타와 대한인국민회
기차가 동청철도(중동철도)의 종착역 치타에 도착했다. 치타를 떠날 때는 시베리아 열차를 이용할 계획이었다. 치타에는 1910년 12월 18일 김성무, 정재관, 이강에 의해서 대한인국민회 지방회가 처음 조직되었다.
치타는 동서 교역의 중심지로 교통의 요충지다. 1900년 시베리아철도 부설과 1901년 동청철도 부설로 많은 노동자가 살고 있었다. 게다가 치타는 노동자들의 새로운 활동 거점이 되었는데, 러일전쟁 직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들의 봉기가 일어나 그것을 유혈 진압한 사건(피의 일요일 1905.1) 이후 노동조합이 괴멸되었다.
치타는 또한 혁명의 도시이기도 했다.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후 러시아 황제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개혁파 귀족 장교 데카브리스트들의 유형지였다. 1905년 치타공화국이 수립되었다가 1906년 러시아제국에 의해 해체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1918년 9월, 일본군이 시베리아 출병을 위해 파견되어 치타를 점령했다. 그러나 1920년 10월 22일 소비에트 혁명군이 일본군을 제압하고 치타를 극동공화국에 편입시켰다. 극동공화국은 1922년 11월 15일 러시아에 병합되었다.
치타에서 바이칼 호수가 멀지 않았다. 시베리아 열차는 바이칼 호수 남쪽으로 울란우데(부랴트 공화국 수도)와 이르쿠츠크로 향한다. 이들 지역을 자바이칼이라 부른다. 안창호는 자바이칼 지역에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이곳 치타에서 얼마간 머물기로 하였다.
안창호는 역에서 멀지 않은 데카브리스트 가옥처럼 생긴 목조건물 2층 지방회 사무실에 들렀다. 몇몇 청년들이 안창호를 알아보고는 환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청년들은 그날 저녁 환영회를 열었다. 사오십 명이 모였다. 정영도는 이 자리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어떤 한인이 ‘안창호가 치타에 도착하면 암살하라’라는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안창호는 이강과 정재관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포끼리 옥신각신하는 것보다 치타로 아예 거점을 이동하면 좋겠다고 판단했다.
안창호는 이강의 연해주 정착 이야기가 떠올랐다. 공립협회 시절인 1907년 새해를 맞으며, ‘세계 통일연합기관 설치’라는 원대한 결의를 했던 그때, 연해주에 ‘신고려회’를 만들고 국내에 ‘대한신민회’를 발기했던 때가 생각났다. 동지들이 하나둘씩 조국 땅이 가까운 원동지역으로 모였다. 이들은 연해주와 어떤 인연의 고리도 없는 상태였다.
이강은 1908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서 한인사회 거류민 대표 양성춘을 찾아갔다. 양성춘은 호인이었다. 양성춘은 공립협회 핵심들인 이강, 김성무, 정재관의 연해주 활동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강은 양성춘을 앞장세워 공립협회 블라디보스토크지방회를 수월하게 조직할 수 있었다. 양성춘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양성춘은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조직에도 앞장섰다. 그리고 이들에 힘입어 1909년 개척리 마을에 있던 계동학교에서 한인 대회를 열고 ‘한인거류민회’를 조직하여 러시아 당국에 공식 허가를 받았다. 계동학교는 1912년 3월 신한촌으로 강제 이동하면서 2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양옥 교사를 증축하고 한민학교로 발전한다. 페테르부르크 이범진 공사가 유언으로 남긴 자금과 이종호의 투자금으로, 학생 전원을 기숙사에 수용할 수 있는 4년제 고등소학교와 중학 과정으로 발전한다.
이강은 하얼빈 의거 직후 체포된 안중근이 포승줄에 묶여 여순 감옥으로 이송될 때, 남만주 열차에 동승했다. 이강이 안중근의 재판절차를 위해 북경으로 와서 변호사를 구하느라 정신없었을 때, 양성춘 피살 소식(1.23)을 듣고는 충격에 빠졌다고 했다. 양성춘을 총으로 쏜 사람은 정순만(왕창동)이었다. 안창호는 이 이야기를 작년 7월 청도회담 이후에 간신히 러시아 여행권을 구해 상해를 빠져나올 때 들었다. 이강은 안창호와 이갑에게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 분위기를 전달하면서 양성춘 이야기를 들려준 바 있었다.
양성춘(1875~1910)은 일찍이 연해주로 망명하여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고, 사업에 성공하여 개척리 한인 거류민회를 이끌었다. 양성춘은 안창호를 따르고 신뢰하는 안창호의 팬과도 같았다. 그는 미주에서 날아오는 『공립신보』를 구독하면서 안창호의 리더십과 민족계몽 사상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는 안창호의 구국 운동방략으로 애국심을 키웠다. 양성춘은 『공립신보』 블라디보스토크 지국을 설치하고 발간후원금을 모아 미주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이강의 조언으로 1908년 2월, 상선 ‘준창호’를 운영하는 재력가 최봉준을 설득하여 그의 투자금으로 『해조신문』(1908.2.26.)을 창간하는 일에 앞장섰다. 신문사는 망명 애국지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해조신문』은 장지연, 정순만(왕창동), 이강 등이 활약하여 3개월간 한인사회 계몽지 역할을 잘하다가, 일본의 압력에 굴하여 ‘제71호’를 끝으로 5월 26일 강제 폐간되었다.
민단 대표 양성춘은 6월에 『해조신문』의 이름을 바꿔 『대동공보』를 창간하고 민족 정론지의 맥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곧 재정난에 빠졌다. 양성춘은 이강에게 최재형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도록 권했다. 최봉준(1862~1917)과 최재형(1858~1920)은 의형제였다. 이강은 안중근과 함께 최재형을 찾아가 『대동공보』 후원을 요청했다.
최재형은 한인사회의 지도자였고 안중근과 엄인섭이 중심 활동을 하는 의병부대를 후원하고 있었다. 마침 최재형은 의병부대의 투쟁이 소강상태에 직면하자 교육과 계몽운동으로 방향 전환을 모색하고 있었다. 최재형은 이범윤 등 관리 출신 망명 정객들과는 선을 긋고 있었다. 지역 계파 갈등의 조짐이 이때부터 가시화된 것이다. 『대동공보』는 1909년부터 최재형이 매월 거금을 후원했다. 이때부터 이강이 『대동공보』의 주필로 활동했고 정재관은 객원기자로 활약했다.
이강이 전한 바에 의하면, 양성춘은 정순만을 ‘한인거류민회’ 총무 겸 서기로 임명했다. 정순만(1873~1911)은 1902년 이승만, 박용만과 함께 의형제를 맺은 ‘독립운동계의 3만’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1905년경에는 간도 용정에서 이상설, 이동녕 등과 서전서숙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최재형과 안중근 중심의 동의회 활동이 신민회의 종지와 같은 맥락으로 전개될 때, 이상설 · 정순만 등은 왕정복고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정순만은 하얼빈 거사를 놓고 양성춘이 기호파를 따돌리고 관서 인사 이강, 정재관, 김성무 등과 국사를 진행했다고 반기를 들었다. 여기에 재정 문제가 갈등을 증폭시켰다. 1910년 1월 23일, 정순만은 양성춘 집을 찾아갔다. 권총을 휴대하고 있던 정순만은 양성춘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자살해 버린다면서 총을 빼 들었고, 이를 말리던 양성춘을 잘못 쏘고 말았다. 양성춘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정순만은 1910년 11월 초 최종 판결을 받았는데, 정상이 참작되어 3개월 금고형을 받고 러시아정교회 사원에서 참회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1911년 출옥한 정순만은 6월 21일 양성춘 집을 찾아가 사죄하려고 했다가, 오히려 그의 아내와 형에 의해서 도끼로 보복 피살되었다.
이 사건으로 엉뚱하게 이강, 정재관이 정순만 죽음의 배후로 주목받기도 했다. 분열과 갈등이 깊어지는 지금 상황에서는 이강과 정재관이 치타로 거점을 옮기는 것이 좋을 듯했다. 안창호는 양성춘을 만나보지 못한 아쉬움과 그에 대한 연민이 짙게 밀려와 마음이 아팠다. 안창호는 치타에서 얼마간 머물기로 하고 이강과 정재관을 치타로 불렀다.
안창호의 권유로 1911년 이강과 정재관이 치타 지역으로 아예 이동해 오면서 지방회가 22개로 늘어났다. 이들은 자바이칼 지역에 국민회 지방회 조직이 순식간에 늘어나자 지방회를 묶어 시베리아지방총회를 결성하고 독립 정신의 정론지로 『대한인정교보』 발행을 서둘렀다. 러시아 사정으로 부득이 종교잡지로 위장한 『대한인정교보』는 1912년 1월에 창간 월보를 냈다. 또 자선공제회를 창립하여 서로 단결해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선공제회 장정 초고를 작성했다. 러시아 당국의 경계를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하고 이를 가르쳤다. 그리고 한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러시아 당국과 교섭에 나서서 러시아 귀화를 도왔다.
시베리아지방총회는 대한인공제회, 대한기독교청년회, 대한기독동흥학교, 대한민회 등 부속 기관을 설립하여 실업 증진과 민족교육을 사업 내용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건전인격과 신성단결을 독립운동의 근본 원리로 제시하였다.
대한인국민회 조직이 시베리아 지역에서 급물살을 타고 확대되자, 러시아 당국의 경계와 일본 밀정들의 노골적인 눈총을 받게 된다. 그들은 미국 사상을 싫어했고 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 이념을 경계했다. 게다가 독립운동 진영 내 함북파와 기호파 인사들의 따가운 시선과 따돌림으로 인해, 대한인국민회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안창호는 이 모든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한편, 김성무가 북만주 밀산에 거점을 두고 기지 개척에 나서면서 하얼빈 · 석두하자 · 횡도하자 · 목림 · 해랍이(海拉爾) · 삼성 등 만주 지역 9개 지방회가 조직되었고, 1911년 11월에는 ‘대한인국민회 만주리지방총회’가 결성되었다. 안창호가 미주에 도착한 후의 일이다.
1912년에는 상해지방회와 페테르부르크지방회도 결성된다. 북미지방회 22개가 총회로 묶어지고, 하와이 · 멕시코 9개 지방회, 쿠바 3개 지방회, 필리핀에도 대한인국민회 지방회들이 결성된다. 이들 조직을 모두 합하면 전 세계 지방회는 75개에 달하며, 6개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가 중앙총회로 통합되어 세계 통일연합기관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