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거사현장 하얼빈을 지나면서
1911년 5월이 되자, 미주에서 기별이 왔다. 여비가 도착한 것이다. 안창호는 정영도를 시켜 이강에게 기별을 넣었다.
이강이 황망하게 나타났다. “도산, 떠나려 하오? 여비가 도착한 게로군.”
안창호가 헤어지기 아쉬운 얼굴로 이강에게 결심을 말했다.
“나는 일단 여기를 떠나 하얼빈, 치타를 거쳐 페테르부르크에서 이갑을 만나보고 미주로 돌아가겠소. 이곳 정황은 대체로 파악됐소. 러시아는 힘이 없고, 국경 너머 만주도 한인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척박하고 험난하오. 연해주 한인들은 분열되어 있고, 조선인 밀정들이 판을 치고....”
이강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데라우치는 국내 애국인사들을 모조리 잡아들일 계획을 세운 듯하오. 안명근 체포를 신호탄으로 전국에 흩어진 신민회와 청년학우회 씨를 말릴 것 같소. 끝이 보이질 않고 있으니...! 무슨 대책이 있소?”
안창호가 말했다. “대책은 우선 한 길, 젊은이들을 독립의 일꾼으로 훈련하는 일이오. 지성과 덕성은 자아 혁신에서 쌓는 것이니...! 역시 청년학우회를 다시 시작해야겠소. 10년 계획을 세워야 한단 말이지.”
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기초훈련 단체를 조직하기 어렵소. 국가상실이 엊그제라 마음들이 제각각이오. 장기계획 수립은 어렵소. 미주에서 국민훈련의 청사진을 짜고 시작하는 것, 미래 부강한 나라로 가기 위한 준비는 누가 생각해도 도산이 직접 챙길 수 있는 미주가 그나마 최적지요.”
안창호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청년단체 이름도 생각해 놓았다오.”
“설마, 대한청년학우회? 하하.”
“아니오. 흥사단!”
“아니, 그 이름은 유길준 선생의 단체 이름 아니오?”
“맞소. 유길준 선생의 흥사단은 국가상실로 자동 소멸되지 않았겠소?”
“그렇겠지.”
이강은 안창호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1907년 미주에서 밤을 지새우며 공화국 건설의 비전을 세울 때도 그랬다. 임기반 선생의 꿈이 담긴 호놀룰루 신민회의 이름을 따서 대한신민회를 조직하고 귀국했었다.
안창호가 이강의 눈을 응시하며, “무슨 생각을 그리하오? 내 생각에는 흥사단이라는 단체명을 되살리되, 내용은 청년학우회로. 미국에서 단체를 등록 할 때는 단체명을 Young Korean Academy로 할 것이오. 하하.”
이강도 유쾌하게 따라 웃었다.
“그렇다면 개인의 인격훈련과 단체의 단결을 위한 국민훈련, 그것이 독립운동의 기초훈련이 되겠고. 다음 단계는 인문학과 실업을 구분해서 각자 전문 역량을 발휘하는 공익적 준비단계, 그리고 실행 단계에서는 국가 구성...! 재정이 가장 중요하겠고.” 이강이 요점을 정리하듯 말했다.
안창호가 말을 이었다. “준비는 자유 민주를 앞세운 공화국의 완전체를 수립해서 독립전쟁을 치르는 것이오.”
이강은 도산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시간이 오래 걸릴 테지. 그동안 조국은 왜놈들에게 민족혼까지 짓밟힐 테고. 그럼에도 국민 기초훈련은 시작해야겠지. 혼을 상실하면 독립은 불가능할 터. 구체적인 훈련 계획이 나오면 이곳으로도 보내주오. 여기 무장세력들에게도 독립정신 고취와 사상교육은 필수이니.”
안창호도 이강과 헤어지는 일이 쉽지 않았다. “정래, 『정교보』 발행을 서두릅시다. 언론의 힘은 연통제나 다름없소. 서로 힘을 모으고 단결할 수 있는 기능!”
이강은 걱정거리를 털어놓았다.
“그나저나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는 도산이 떠나주길 바라고 있는데 잘 되었소. 아니, 그들은 어차피 도산이 미주로 갈 거로 예상들 하고 있어요. 연해주 한인사회는 자기네들이 알아서 잘할 수 있는데 도산이 앞장서 있다는 사실이 불편한 거요. 도산이 여길 떠나면 그들은 권업회를 조직한다 했소.”
권업회는 ‘연해주 한인들에게 실업을 장려한다’는 뜻이 담겨있는 비밀 항일운동 단체로 계획되었다. 안창호를 따르던 이종호는 밀산 기지개척 자금투자 의지를 철회한 후 권업회에 투자했다. 1911년 5월, 안창호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아예 떠나자 이종호와 엄인섭은 최재형을 권업회 초대 회장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홍범도 의병대장을 부회장으로 끌어들였다. 권업회는 1911년 12월 총회에서 회의조직을 의사부, 집행부로 나누고 집행부는 신문부 등 13개 부서로 업무를 나누었다. 의사부 의장은 이상설, 부의장은 이종호로 회의를 대표하였다. 1912년 4월에 『권업신문』이 창간 발표되었다. 1914년에는 회원이 8,579명에 달했으나, 그해 6월에 일본 압력에 굴복한 러시아 당국에 의해 단체와 신문 모두 강제해산 및 폐간되었다. 이때 러시아와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연합국으로 참전하고 있었다. 권업회 조직의 근간은 정재관의 노력으로 1917년 고려국민회(전로한족중앙회)로 계승된다.
권업회 조직에 대한 이강의 말을 듣고 안창호는 껄껄 웃었다.
“거 참 잘되었소. 모두 힘을 합하기만 한다면야 내가 있든 떠나든 상관없을 테지. 믿고 맡길 수 있는 지사들이 있으니 내 마음은 편하오. 다만 정래, 자네가 걱정이오. 정재관 동지는 하바롭스크에 가 있어 만나기 쉽지 않은가 보오.”
이강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다오. 아무르강 근처도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소. 정신없이 청년들을 만나고 있을 거요. 도산, 떠나는 사람과 이런 의논을 하긴 좀 그렇지만, 아무래도 우리 거점을 옮겨야 할 듯하오.”
안창호도 짐작되는 부분이 있었다. 이곳 한인사회는 여호인(무국적)과 원호인(러시아 국적)으로 계급이 양분되어 있었다. 그나마 토호 권력을 가지고 있는 원호인은 여호인을 소작농으로 부리며 권리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안창호가 만났던 많은 청년이 여호인 층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원호인은 미국에서 온 인사들을 배척했다. 이유는, 그들이 평양 출신인 데다 기독교인들이고 자유 사상과 평등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러시아 당국도 미국을 경계하니 그들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강과 정재관은 조직 활동을 전개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
안창호가 말했다. “권업회 단체가 결성되면 좋겠구려. 권업회가 평등한 한인사회 권리획득에 앞장서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새로운 구심력을 발휘하면 좋겠소.”
이강은 도산과 함께 민주 ‧ 자유 공화국의 꿈을 이루기 위해 통일연합기관을 설치하고자 했었다. 그리고 그 첫 발자국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인지라 만감이 깊어졌다. ‘꿈은 진행형인가? 도산이 떠나고 나면 내가 그 꿈을 위해 무엇을 얼마만큼 해낼 수 있을까?’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오?” 안창호가 물었다.
“아니, 뭐....”
“어렵고 복잡할수록 기초로 가야 하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답이요. 내가 미주로 가면서 우리의 꿈을 아니, 생각을 정리해 보겠소. 잘 있으시오. 제수씨에게도 안부 전해주오.”
며칠 뒤, 안창호는 정영도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떠나면서 정영도를 시켜 여비에서 5백 원을 떼어 이강 모르게 부인 안혜빈을 주고 떠났다. 이강의 살림살이가 어려운 것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창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청철도를 탔다. 이 철도는 1911년 중화민국이 설립된 후 중동철도라고 개칭한다. 만주로 가는 동청철도는 일본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열차였다. 안창호는 안중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하얼빈 역사 내에 있는 거사 현장에 꼭 들러볼 생각이었다. 열차가 우수리스크를 지나자 안창호는 목릉을 생각했다. 안정근은 지난달 가족을 모두 이주시켰고, 지금은 때가 봄이라 농경지 경작에 열중하고 있을 터였다.
안창호가 안중근 생각으로 감상에 젖어 있을 때 기차는 채가구 역에 멈췄다. 채가구 역은 우덕순과 유동하, 조도선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고 대기했던 하얼빈 바로 전 역이다.
정영도가 귓속말을 했다. “선생님, 뒤에 평양에서부터 낯익은 왜놈 형사가 올라탔는데요. 장대제 김성택 목사 댁 대문 밖에 늘 앉아 있던 놈입니다.”
김성택은 안창호의 매제이다. 안창호는 신민회 일로 바쁠 때 서울에서는 제중원에서 지냈고, 평양에서는 여동생 신호의 집에서 먹고 자고 했었다.
안창호도 그 왜놈 밀정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안창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놈이 뒤에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
“3번째입니다.”
“알았다. 우리는 일단 하얼빈에서 하차한다.”
“괜찮을까요?”
“하얼빈에 내리면 틀림없이 다른 놈들이 대기하고 있을 터, 너는 열차 안에서 뒤에 놈이 내리는 것을 최대한 막아서면서 시간을 끌어라.”
“그동안 나는 인력거를 갈아타면서 주변을 맴돌 것이다. 다행히 사람이 많이 붐비고 있구나. 열차는 30분간 머문다고 했지?”
“네, 그럼 저는 놈이 내리고 30분 후에 다른 칸 좌석을 잡아 놓고 창밖으로 손을 흔들고 있겠습니다.” 정영도가 속삭였다.
“옳지, 그렇게 하자. 거사 현장을 꼭 보고 싶구나.”
열차가 하얼빈에서 멈추자 안창호는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재빠르게 내렸다. 사람들 틈새로 키를 낮추며 상시 대기하고 있던 중국인 인력거를 탔다. 그리고 인력거꾼 도움을 받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쏜 현장을 안내받았다. ‘음, 저기란 말이지! 바로 저곳에서 우리 역사가 바뀐 거야. 우리는 민족혼을 지켜냈어. 중국도 놀라지 않았던가? 오, 중근이...!’ 안창호는 태연하게 인력거를 세 번이나 갈아타면서 역사 주변을 둘러보았다.
30분 후, 열차가 기적 소리를 울리고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천천히 움직였다. 안창호는 밀정을 따돌리고 정영도 옆 좌석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놈들은 하얼빈에서 안창호를 찾아내려 혈안이 됐을 터였다.
열차는 초록빛으로 물든 벌판과 험준한 산맥을 달리면서 북만주 치치하얼과 만주리를 지나 자바이칼 지역인 치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안창호는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고구려 땅. 저기 무한한 가능성과 역사를 품고 있는 아름다운 초원이 한때는 우리 민족의 영향권에 있던 곳이 아니던가. 안창호는 문득 신채호가 그리웠다. 챙겨주지 못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올 때 신채호는 그곳에 없었다. 신채호는 옛 발해의 땅, 연해주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하바롭스크까지 갔던 모양이다. 연해주와 북만주 일대에는 그의 실증철학을 받쳐 줄 유물과 사료가 그 의미를 상실한 채 나뒹굴고 있을 터였다. 그의 망명 이유 중 하나는 고구려와 발해의 유물과 사료를 발굴하여 역사서를 집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성균관 학자들 대부분이 주장하듯 신채호도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보았다. 신채호는 한국사의 전개 무대를 한반도 내로 축소 시킨 식민주의사관에 반기를 들었다. 신채호에 의하면 민족은 혈연적 동질성과 역사적 연속성에 의해 정체성을 갖는다. 신채호는 특히 고구려를 우리 민족을 외세로부터 지키고 대외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상적인 국가로 보았다.
발해는 고구려 문화와 전통으로 한반도 북부와 만주 ‧ 연해주 ‧ 요동을 지배했으나, 제10대 선왕에 이르러 지배층의 부패와 사치, 분열로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지배층의 부패와 무능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근본 원인이다.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지금도 우리가 겪고 있지 않은가? 연해주 일대는 발해 유민들의 삶의 흔적을 아직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단재는 발해 유민 마을을 찾아냈을까? 926년 발해는 한순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발해는 거란에 의해 망했다.
사실 안창호는 신채호의 개혁적인 역사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신채호는 역사를 변증법적 발전 과정으로 인식하며, 역사서는 ‘我와 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라고 했다. 특히 조선 상고사에 대한 그의 성찰은 안창호의 역사 인식 지평을 넓혀주었다.
‘단재는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영웅 중심의 민족사관을 갖고 있다. 그에게 영웅은 군주다. 양계초가 전한 사상이다. 영웅을 민족의 힘의 상징으로 바라본다.’ 이는 안창호 자신과는 분명 다른 입장이었다. 안창호는 민권 강화가 근대적 힘이라고 생각했다. ‘도리어 민중이 영웅의 잠을 깨울 것이다.’ 그러나 안창호와 단재는 민족이 힘을 길러야 한다는 자강 철학에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신채호는 신민회 활동 시기인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수군 제일위인 이순신전’ 소설을 연재하였고, 고구려의 영웅, 『을지문덕전』을 집필한 바 있다. 안창호는 단재의 소설들을 꼼꼼히 읽었다. 1908년 7월 『을지문덕전』이 출간될 때는 이 책을 추천하는 서문을 직접 쓰기도 했다. 안창호는 신채호가 미주로 와서 혁명의 역사를 체험한다면, 민중이 힘의 주체가 되는 새로운 역사를 그릴 수 있으리라 믿었다. 신채호는 지금도 의로움에 굶주린 지사처럼 민족혼을 찾아 방황하고 있을 것이다. 마침 정재관이 하바롭스크에서 국민회 지방회 조직사업을 위해 사람들을 만나고 있을 터였다. 안창호는 신채호와 정재관이 만났기를 바랐다.
신채호는 나중에 안창호를 만나 이때 이야기를 해주었다. 개척리에서 의병의 성지인 두만강 일대를 샅샅이 답사했다고 했다. 명장 홍범도와 안중근의 활동무대에 감격하면서 안중근을 그리워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신채호는 연해주 한인 청년들이 분열하여 서로 갈등하고 모함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고 전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