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밀산 답사, 안정근과 김성무
안창호와 이갑은 바라던 대로 미주에서 마련한 봉밀산 개척지를 둘러보고 농장경영과 사관학교 설립이 어느 정도로 진척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다.
봉밀산은 북만주 흑룡강성 소속으로, 항카호(興凱湖)를 사이에 둔 러시아와의 접경지역이다. 토지가 비옥하고 땅이 넓어서 농사짓기에 안성맞춤이고, 수자원도 풍부해서 물산이 집중되어 있다. 이곳에는 십리와, 백포자, 봉밀산, 당벽진, 서대림자 등 여러 마을에 나라와 등지고 쫓긴 한인들이 촌락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었다.
공립협회에서 파견된 김성무는 밀산 십리와를 개척지로 결정하고, 1908년 10월 21일 아세아실업주식회사 설립 투자금이 도착하자 45만 평 토지를 사들여 기지개척을 시도했다. 그러나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1909년 2월 공립협회가 국민회로 확대되면서 아세아실업주식회사는 태동실업주식회사로 회사명을 바꾸었다. 국민회 1대 총회장 정재관은 이상설을 모시고 1909년 봄 밀산에 도착하여 정황을 살폈다. 이상설은 밀산 일대에서 농사짓고 있는 한인들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보고, 망명 중인 이승희 선생(1847~1916)을 설득했다. 이상설은 백포자에 ‘한흥동’ 마을을 개척하도록 선생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이승희 선생은 경상북도와 대구를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이상설은 공화파 국민회와 거리를 두었다. 때문에 기지 개척 자금을 놓고 정재관의 고민이 깊어졌다. 정재관은 밀산 탐사 보고를 마치고 1909년 여름, 연해주 이강과 결합했다. 김성무는 1910년 1월 태동실업주식회사 자금 총 3,500루블을 송금받고 개척사업에 착수했다. 이어서 추가로 5월에 2,095달러를 지원받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한 정재관은 이강이 주필로 있는 『대동공보』의 기자가 되었다. 이상설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유인석과 결합했다.
1911년 2월 7일, 안창호와 이갑은 안정근을 불렀다. 안정근을 수행하여 밀산 개척지로 가볼 생각이었다. 게다가 안창호는 김성무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공립협회 시절, 김성무는 잔업을 도맡아 하면서 안창호에게 ‘도산 선생 가족은 내가 돌볼 테니 지도자 역할에 집중해 달라’고 당부한 바 있었다. 김성무는 차리석의 동생인 차정석의 처남이다.
안창호, 이갑, 안정근, 정영도 일행은 우수리스크(소왕령) 기차역에서 만났다. 밀산으로 국경을 넘으려면 기차로 우수리스크에서 목릉까지 가야 했다. 주변이 온통 눈으로 덮여 설국이 따로 없었다. 외딴 초가들이 드문드문 자리 잡고 있어 마치 눈 속에 숨은 요새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정영도가 세 사람 뒤를 말없이 따라왔다.
네 사람은 마침내 목릉에 도착했다. 이갑이 잠시 숨을 돌리자고 했다. 봉밀산으로 가는 기차를 바꿔 타려면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살을 엘 듯한 겨울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갑이 운을 뗐다. “정근이, 어머니와 어린아이들이 이쪽으로 피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 지금 계신 곳은 밀정 놈들 때문에 언제 어떤 보복을 당할지 걱정일세.”
안중근의 가족은 최재형이 돌봐주고 있었다. 안창호는 이들 가족이 밀정의 눈을 벗어나려면 만주로 가는 게 나을 거라 판단하고 이 일을 이갑과 의논했었다. 이갑도 흔쾌히 동의하고 조만간 이주할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안창호가 이갑의 말에 동감을 표시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최재형 선생이 뒤를 봐주고는 있지만 여간 위험하지 않아. 게다가 이곳은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하니 은거하기에는 더 낫지 않겠는가?”
안정근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여기라면 연해주 밀정들을 따돌리기 괜찮을 것 같긴 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안창호가 안정근의 속뜻을 알아채고 말을 받았다.
“정착 비용은 추정 형님이 마련해 주실 것이네. 어머니와 중근의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자네 부인과 아이가 힘을 합해서 농토를 일구어 갈 수 있지 않겠나? 정착되는 대로 자네와 공근은 독립해서 집을 나서게나.”
이갑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자네와 공근은 아주 위험하네. 헤어져서 각자 자기 갈 길을 찾아야 하네. 어머니와 가족이 머물 곳은 내가 마련해 줄 걸세. 내가 이래 봬도 평남 숙천의 부농출신이라네, 허허.”
안창호도 거들었다. “자네랑 공근은 내가 돌봄세. 추정 형님과 나는 중근 의거로 헌병대에서 죽었다가 환생한 불사신들 아닌가? 하하.”
안정근의 표정이 환해졌다. “두 분께서 정말 고생이 많으셨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가 안전하다면 저와 공근이는 출가해서 따로 살길을 찾겠습니다. 두 분 형님, 정말 고맙습니다.”
이갑이 안정근을 안심시켰다.
“도산은 미주로 보내고 나는 목릉에 남겠네. 그 전에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이범진 공사를 만나 사관학교 설립 투자금을 상의해 보고 올 걸세.”
밀산에 도착한 네 사람은 십리와라는 동네부터 찾았다. 온통 눈밭이었다. 발이 푹푹 빠졌다. 그래도 가로수 길이 있고 사람 발자국이 나 있어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동네로 들어가니 조국 산하에 온 느낌이 들었다. 안창호는 김성무를 찾았다.
김성무는 1907년 8월, 이강과 함께 공립협회의 극동 파견으로 국내에 잠입했다. 신민회에 가입하고 김구, 옥관빈, 최광옥 등이 활동하고 있던 안악으로 가서 사범강습소를 둘러보았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감동적으로 보았던 김성무는 『대한문전』에 큰 기대를 걸고, 망명 2세 청년들이 한글을 깨우칠 수 있게 할 필수교재로 여겼다. 김성무는 서울에 잠입해 있는 이강과 이재명 등 동지들과 함께 숙청단에 서명하고 12월 13일 이강보다 먼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김성무는 이강과 함께 공립협회 지방회 조직사업에 가세했다. 이들은 신민회 사업 비전에 따라 신영학교와 계동학교를 설립하여 동포들을 가르치면서 『공립신보』 지국 설립에도 박차를 가했다. 또 이강의 『해조신문』 편집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해조신문』이 탄압을 받아 폐간되자, 곧 『대동공보』를 발행할 때 구국 계몽지 주필로 활동했다. 1910년 봄, 김성무는 예정되었던 대로 하얼빈을 거쳐 목릉, 봉밀산으로 이동했다. 이후 십리와에 일부 한인들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였고, 백포자 마을에 있는 청년들을 규합하여 대한인국민회지방회를 조직, 조직의 기반으로 숭무학교를 세워 군사훈련을 시작했다.
마침내 김성무가 기별을 받고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타났다. “오, 도산 형님, 이 엄동설한에 여기까지 오시다니요. 아니, 이분들은 추정 형님과 또....”
안창호는 러시아식 털모자를 푹 눌러 쓴 김성무를 보자 눈시울이 붉어지며 그를 끌어안았다. “잘 있었소? 건재했구려.”
김성무도 따라서 금방 눈시울이 붉어졌다. “형님 소식은 정재관 총회장에게 들었습니다. 이렇게 먼 곳에서 다시 뵈니 천하를 얻은 것만 같습니다.”
곁에 멋쩍게 서 있던 이갑이 손을 내밀며 말을 건넸다.
“김성무 동지가 이런 외딴곳에서 홀로 지킴이 노릇을 하고 있다고 도산의 걱정이 많았소.”
안창호는 그제야 손님들을 소개했다. “이분은 추정 형님, 그리고 이분은 중근의 큰동생 정근이오.”
김성무는 그들의 손을 잡고 인사했다. “아, 추정 형님은 남대문 상동교회에서 멀찍이 뵌 일이 있지요. 도산 형님이 추정 형님 자랑을 하면서 엄청 좋은 분이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정근, 오...! 우리 안중근 형님의 아우님을 이렇게 보다니요...!” 김성무는 목이 메었다. 낯선 땅에서 고군분투하느라 외로웠으리라.
안정근도 설움이 복받쳐 올라 마른 침을 삼키며 입을 뗐다. “네, 제가 큰동생 정근입니다. 형님들이 계시니 행복합니다.”
이렇게 다섯 사람은 눈밭에서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햇볕은 따스했다. 머지않아 봄이 올 것이다. 농경지를 품은 밀산의 밭과 들도 녹색 자태를 드러낼 것이다.
안창호는 목릉과 밀산이 그렇게 멀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두 지역은 홍개호를 경계로 러시아와 만주를 넘나드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곳에 교통국을 설치하여 연통제를 두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밀산은 농경지 개척에 최적화된 땅이다. 여기에 자금을 조금만 더 투자해 땅을 확보한다면, 홍범도 부대를 이주시켜 둔전제로 경작하면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농업 기술학교를 세우고, 군사학교를 운영하면서 독립전쟁에 대비한 모범촌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안창호 일행은 공립협회가 사들인 십리와 토지를 꼼꼼하게 살폈다. 지금은 960㏊에 불과하지만. 조금 떨어진 곳인 한흥동에 이상설 영감이 확보한 384㏊의 토지가 있다. 이를 기반으로 한인촌 기지개척을 시작하면 될 것이다. 눈이 녹아 땅과 호수로 스미면 농사꾼들에게는 희망의 봄이 찾아온다. 우리는 반드시 옛 고구려의 기상으로 독립을 쟁취할 것이며, 이곳에서 그 희망의 씨앗을 키워낼 것이다. 안창호는 말로만 듣던 밀산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동안 생각해 두었던 의견을 꺼냈다.
“성무 동지, 여기 밀산은 홍범도 부대가 들어오면 좋겠소. 내 그분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났는데 의병부대의 생활 근거지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소. 그분의 생각은 진보적이었소. 독립이 쟁취된 이후 백성이 주인이 되는 그런 나라를 꿈꾸고 있더이다. ‘나라의 주인은 임금이나 양반은 아니다.’라고 분명히 합디다. 그러면서 의병들은 언제나 직무에 충실하고 신의에 죽고 산다고. 이는 곧 무실역행 충의용감의 정신이요, 의병 정신을 상징하지요. 독립전쟁을 준비하려면 의병 정신을 교육하는 일도 급선무요.”
“홍범도 대장이라면 여기서도 다 인정합니다. 그분의 부대와 딸린 가족들이 이곳으로 와서 촌락을 이루고 둔전제를 일으킨다면, 왜놈들한테 그보다 더 좋은 방어는 없겠지요.” 김성무는 시선을 이갑에게 돌렸다.
이갑도 시선을 받아 의견을 냈다. “홍범도 대장도 장기계획을 세워야만 하겠지요. 지금처럼 부분 전투는 희생이 너무 커요. ‘조선의 기는 꺾이지 않았다. 너희는 괴롭힘을 당해봐라’라는 식이지요. 도산의 말대로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그도 수긍하는 것 같았습니다.”
안정근이 끼어들었다. “중근 형님과 홍범도 대장은 의기투합해서 함께 의병 전투를 치른 바 있죠. 나라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이 일치해서 서로 믿고 도왔습니다. 홍범도 대장은 인정미가 넘치는 분이라 의병부대 대가족을 잘 통솔하실 겁니다. 아마 때가 오면 도산의 지략에 감탄하며 이리로 들어오실 것입니다.”
김성무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며 말을 받았다. “때라... 지금은 개척 초기라서 어려움이 많습니다. 미주 투자금으로 18칸 사무실 건물과 35채의 민가에 대한 토지등기를 신청 중입니다. 7월이면 끝이 납니다.”
안창호는 다시금 청도회담에서 기대했던 이종호의 투자금이 떠오르며 못내 아쉬웠다. 이갑이 안창호의 얼굴을 보다가 그 아쉬움을 눈치채고 말했다.
“개척자금 마련은 나도 어떻게든 해 보겠소. 홍범도 부대도 당장은 못 들어올 거요. 준비가 필요하겠지.”
안창호도 표정을 바꾸고 김성무를 격려했다. “희망이 살길이오. 낙심하지 맙시다.”
이갑이 다짐을 두듯 말했다. “그럼, 정근네 식구들은 목릉에 자리 잡고, 정근 자네는 밀산으로 들어와 당분간 농사에 도전해 보게. 어떤가? 나도 결단코 개척자금 확보에 나서보겠네.”
안창호가 결심을 말했다. “나는 조만간 미주에서 여비가 마련되는 대로 영도를 데리고 일단 돌아가겠네. 여긴 이강과 정재관, 그리고 자네가 있으니 정근 가족도 맡기려 하네. 추정 형님은 페테르부르크에 다녀오셔야 하니 먼저 떠나실 테고. 정근 자네는 가족이 목릉에 자리 잡는 대로 소식을 알려 주게. 조만간 홍범도 대장께서 성무 자네를 만나러 소왕령을 떠나 이곳을 방문할지도 모르겠네. 자네 형편에 맡기겠네.”
안창호 일행은 밀산을 떠나 목릉으로 나왔다. 이갑은 시베리아 열차로 페테르부르크로 가기로 했다. 이갑은 따로 헤어지면서 안창호에게 팔면통에 농경지를 사서 정근네 가족이 농사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안창호는 이 약속을 지켰다. 안정근네 가족은 1911년 4월에 목릉으로 이주했다.
안창호는 목릉과 밀산을 방문한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그동안 해안가 개척리 마을은 당국에 의해 콜레라 예방을 이유로 강제로 폐쇄되었고, 언덕 위로 신 개척리 마을인 ‘신한촌’이 형성되고 있었다. 1911년 3월 6일, 블라디보스토크 일대 청년단체들은 연합 모임을 열고 안창호를 초청했다. 청년들은 러시아 귀화를 원했다. 그 이유는 러시아 당국이 귀화한 한인들에게만 무상으로 토지와 각종 편의를 제공해 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화 조건도 까다롭고 언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기본 권리는커녕 당국과 교섭조차 어렵다고 했다. 안창호는 한인들의 권리획득을 위해 교섭에 앞장섰다. 청년들에게 ‘청년근업회’ 단체를 조직하여 단체가 힘을 발휘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서로 돕고 단결하라고 가르쳤다. 폐간된 신문도 재발행하고 자선공제회도 잘 운영해서 생존의 터전을 가꾸어 독립 정신을 이어가라고 조언했다. 안창호는 청년 간부들을 데리고 러시아 당국으로 찾아가서 한국인의 귀화 절차를 간단하고 쉽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또 러시아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청년들의 집회를 허용해 줄 것을 교섭했다.
안창호의 이러한 행보를 놓고 일본 밀정들은 ‘안창호가 재러 한인들의 수뇌’라고 보고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