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연해주 활동
안창호는 이강의 안내로 꼬르지포 마을로 찾아가 안중근의 가족을 만났다. 안중근의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두 아들이 있었다. 안중근의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도 같이 있었다. 이들이 꼬르지포에서 숨을 죽이며 살 수 있게 된 것은 유동하의 아버지 유승렬 선생의 도움이 컸다. 유동하도 우덕순, 조도선과 나란히 하얼빈 의거 주동자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유승렬 선생은 꼬르지포에서 이름있는 의사였다. 멋모르고 이제 막 하얼빈으로 망명 온 안중근 가족은 거사가 일어나자마자 위험에 처하게 되었지만, 유승렬 선생은 안중근 가족을 즉시 연해주 꼬르지포로 이주시켰다.
가족을 보자마자 안창호의 마음은 무너졌다. 안창호는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의 손을 잡고 눈물을 쏟았다. 조마리아는 감옥에 있는 아들에게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으라’ 했던 추상같은 대한의 어머니시다. ‘아, 어머니! 대한의 어머니! 저희가 중근을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안중근의 어머니도 울었다. 그러다 안중근의 아내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아이들을 발견하고 안창호가 침묵을 깼다. 둘째 아들 준생이는 엄마 등에 업혀있었다.
“오, 이 아이가 분도 문생이 그리고 네가 준생이로구나.”
분도는 안중근이 신부로 키우고 싶어 했다는 장남이다. 분도라는 이름은 천주교 성 베네딕토에서 가져왔다. 분도는 이제 막 7살이었다. 안창호는 문득 아들 필립이 떠올랐다. 안창호는 분도를 안아 올렸다. 아이들은 수줍어했다. 안창호는 안정근과 안공근 형제와도 인사를 나누고 그 자리에서 친형제로 결의했다. 이들은 안창호를 신뢰했다.
“여순 감옥에서 중근과 면회했다고 들었소. 아우님들에게 유언을 남겼다지요?” 안창호가 물었다.
“네. ‘내가 나라의 국권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안정근이 한 자 한 자 곱씹듯 안중근의 마지막 말을 전했다.
이 말을 듣자 안창호는 오열했다. “오, 중근이...!”
안창호가 한인사회 청년들 모임 초청으로 한창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을 즈음 이강이 비보를 들고 왔다.
“도산, 이재명이 결국 처형을 당했다는 소식일세.”
“아니, 이 무슨 소린가. 결국, 왜놈들이 재명 군을 처형했단 말인가?”
“9월 30일에 사형 집행된 모양일세. 『대한매일신보』에 소식이 실렸네.”
이강이 꼬깃꼬깃 네모로 접은 신문 한 면을 펼쳐 보였다. 아끼던 이재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에 안창호의 상심은 말이 아니었다. 숨이 막혔다.
“이제 겨우 24살인데... 나라를 위해 할 일이 태산인데 결국...!”
“공립협회 김병록을 비롯하여 김정익, 이동수, 조창호가 15년 형을, 오복원, 전태선이 10년, 김용문이 7년, 김병현, 이응삼, 이학필, 김이걸 5년....” 기사를 읽던 이강이 말끝을 흐렸다.
안창호가 크게 한숨을 쉬고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완용 한 사람 암살하자고 도대체 몇 명이 희생된 거요. 이럴 수는 없어. 대한 청년들이 이렇게 희생되면 장차 독립전쟁은 누가 치른단 말인가.”
이강이 신문을 다시 접으며 말했다. “데라우치가 작정한 거요. 본보기요. 병탄하면서 ‘복종하던지, 죽든지 하나를 선택하라’면서 겁박을 하더니....”
지난 1909년 1월, 이토 히로부미의 평양 순시 때 거사 계획을 세웠다가 순종의 안위를 지켜야 한다는 안창호의 결단에 설득된 이재명은 10월 26일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 소식을 접하고 이에 고무되어 다시 귀국했다. 숙청단 동지 이동수와 김병록 등을 만나 매국의 적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를 처단하기로 결의를 다지고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12월 22일, 이완용이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벨기에 국왕(레오폴드 2세)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재명은 명동성당에 나타난 이완용을 칼로 폐부와 어깨를 찔러 중상을 입히고 곧바로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애꿎게 인력거꾼이 숨졌다. 칼에 맞은 이완용은 용케 살아나 후유증을 앓다가 1926년에 죽었다. 이재명은 자신의 변호를 위해 의연하게 법정투쟁을 하다가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1910년 9월 30일에 사형 집행되었다. 안태국이 이 일의 배후로 지목되어 2개월간 모진 고문과 학대를 당했다.
이재명의 사형 소식을 들은 안창호는 비탄에 잠겼다. 안창호는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 한인촌 교회로 사용하던 계동학교(후일 한민학교로 개칭)에서 이재명 추도회를 개최하고 추모하였다.
안창호는 정영도를 데리고 이강이 활동하고 있는 파르티잔스크(수청) 지방으로 갔다. 연해주로 망명한 이강은 최봉준, 정순만 등과 『해조신문』을 발행(1908.2.26.)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1908년 9월 29일 공립협회 수청 지방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1909년 1월 7일 블라디보스토크지방회를 설치했다. 안창호는 미주에서 여비가 도착할 때까지 수청국민회지방회 사무실이 있는 이강의 거처 근처에 숙소를 정하고 본격적인 행보에 나서기로 했다.
수청은 연해주 남북으로 길게 뻗은 시호테알린 산맥지대로 역청탄(유연탄)이 많이 나는 곳이다, 중국인들이 처음 이곳 탄광촌을 개척했다고 한다. 한인들도 1868년부터 개척자 김공심(니콜라예프)을 따라 이곳에 집단촌을 형성했다. 마을 이름은 신영동, 러시아말로는 니콜라예프카로 불린다. 개척자 김공심의 러시아 이름을 그대로 땄다. 신영동은 ‘백마 탄 김 장군’으로 알려진 김경천이 러시아 혁명기 적위파를 도와 항일 빨치산 활동으로 이름을 떨친 지역이기도 하다. 김경천은 1911년대 서간도 신흥무관학교 개척에서부터 1920년까지 독립군을 가르친 교관 출신이다. 신영동 마을은 1920년 레닌과 만나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자금 200만 루블을 획득한 공을 세우는 박진순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안창호는 이강과 함께 크라스키노, 스라우야니카(춘남리), 수이푼(추풍), 니콜리스크(소왕령) 등 여러 곳을 다니면서 한인사회 지도자들과 만났다. 그들과 함께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조직과 학교설립 등을 협의했다. 가는 곳마다 한인사회 청년들이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자 했다. 안창호는 민족 대동단결이 곧 힘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애국심을 호소했다. 나아가 근대적 시민으로 거듭나려면 무실, 역행의 정신과 덕, 체, 지를 수련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이는 청년학우회의 정신을 널리 알려 국민훈련의 지표로 삼고자 함이었다. 한인사회 청년들은 안창호의 가르침에 목말라 했다. 안창호는 이에 호응하여 주 3회 야학에 나가 세계정세 흐름과 우리 역사를 설명했다. 또 안창호의 주특기인 노래도 가르쳤다. ‘한반도가’, ‘보국가’, ‘대한혼’, ‘국기가’ 등. 민족의식과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가사들이 담긴 노래였다.
안창호의 이러한 거침없는 행보에 일본은 긴장했다. 러시아 사회도 여지없이 지역 파벌주의가 횡횡하고 있었다. 기회를 엿보던 일부 청년들은 일본의 밀정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안창호를 뒤쫓아 다니면서 거동을 살폈다. 현상금도 걸었다. 그런 가운데 안창호와 함께 청도회담을 이끌었던 이종호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함북파 청년들의 회유에 이끌려 마침내 안창호와 등을 졌다. 김립과 윤해. 이들은 안창호를 관서를 대표하는 인물로 보고 경계했으며,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안창호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들은 이종호가 자금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창호는 이종호가 약속했던 자금이 결렬되자 깊은 상처를 입었다. 밀산 개척에 대한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이종호는 안창호가 미주로 떠난 후 권업회 조직에 자금을 기부했다.
신한촌으로 모여든 애국인사들은 동포 진영 내부의 이해관계와 지역 파벌에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보다 못한 이상설, 신채호, 차석보, 유진률, 김치보, 고상준, 김규섭, 김지간 등 애국지사들이 1911년 1월 16일 한자리에 모여 동포끼리 분파적 행동을 하지 말자고 결의할 정도였다.
1911년. 정월부터 북만주와 러시아에 혹한이 몰아쳤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개척리 마을에도 눈보라가 몰아쳤다. 해안은 눈으로 덮였다. 해안 너머 두만강 저쪽 함경도 산악지대도 온통 하얬다. 밀산 개척지를 둘러보자고 합의했던 청도회담 동지들은 결국 흩어졌다. 안창호는 망명길에 따라나섰던 김지간을 고향 진남포로 보냈다.
안창호와 이갑은 신년 인사차 하산 멍고가이로 유인석 선생을 방문했다. 이범윤과 홍범도 등이 먼저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안창호와 이갑을 반겨주었다.
유인석이 꼿꼿한 자세로 안창호와 이갑을 향해 말했다.
“내가 그대들과 조금만 더 일찍 교제했더라면 나라를 왜놈들에게 내어 주는 일 따윈 없었을 터인데.... 그대, 안창호라 했지요? 그대의 지략과 언변이 뛰어나다고 들었소.”
“말씀만 듣고 이제야 이렇게 뵙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13도 의군에 신민회를 안아주시니 있는 힘을 다하겠습니다. 신민회는 독립전쟁 준비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해외에 무관 양성을 위한 기지 개척에 나섰습니다.” 안창호가 공손한 자세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래요. 내가 늙어 이제라도 사력을 다하려고 했으나 나라가 넘어갔으니 젊은 동지들이 되찾아 주세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온 힘을 다 바치겠소.”
안창호는 유인석 선생의 추상같던 기운이 한풀 꺾인 듯해서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홍범도가 안창호를 따로 반겼다. 그의 목소리가 청량하게 울렸다.
“오, 그대가 안창호로군. 우리의 자랑! 하하하.”
안창호는 함경북도 접경지역과 연해주 일대 의병대를 통솔하고 있는 홍범도 대장이 있어 든든했다. 안창호는 홍범도를 꼭 만나보고 싶었다. 만나서 그의 품에서 목놓아 울고 싶었다. ‘어쩌면 우리가 찾고 있는 진정한 힘은 원칙을 지키는 인격과 조건 없이 부하를 품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홍범도, 그는 그런 사람이다.’
홍범도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도와 함경북도 산악지대를 넘나들면서 항일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홍범도는 휘하의 박영신을 선봉장으로 해서 두만강 얼음길을 건너 추위에 떨고 있을 일본 경원 수비대를 급습할 것이라고 귓속말로 전해주었다.
홍범도는 안창호를 최고의 애국자라고 칭송했다. 안창호는 다소 무안했다. 그러나 관서 지방에서는 안창호의 명성이 그만큼 높았다. 안창호의 말이라면 10살이나 많은 홍범도도 신뢰하고 따랐다. 반면에 안창호는 홍범도를 몰락한 홍경래 가문의 후손으로 여겼다. 안창호는 그의 신중함과 원칙에 따른 빠른 결단력, 그리고 너그러운 카리스마를 존경했다. 안창호는 내심 홍범도 의병부대와 그들의 가족 무리가 밀산으로 이주하여 삶의 터전을 가꾸고, 장기적인 독립전쟁에 대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창호가 홍범도에게 친근하게 물었다.
“무기 확보가 가장 힘들지요? 안정적인 군자금 확보는 골칫거리지요. 그래서 기지를 개척해 둔전병을 일으키고자 합니다만. 국권을 상실했으니 장기전에 대비해야 할 듯합니다.”
홍범도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군자금 확보도 전투요. 나라가 망했는데도 구석구석 돈을 감추고 있는 유지들이 있다오. 그들은 대부분 일본군에 아첨을 떨면서 부를 축적하고 있소. 그들을 색출해서 군자금을 확보하는 것도 지략이고 용기요. 때로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사생결단이 필요합디다. 군인은 그런 것 아니겠소?”
안창호가 공손하게 말했다. “대공을 위한 결단은 지휘관의 사명이지요. 허나, 자칫하면 무모하게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릅니다. 그 빈자리 또한 큰 손실이고요. 아무쪼록 국권을 되찾을 방법을 마련해서 전쟁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전쟁은 아무래도 장기전이 되지 않을까요?”
홍범도가 유쾌하게 말했다. “나는 농사 지을 땅을 가져 본 일이 없소. 그래서 이리저리 살길을 찾다가 사냥해 먹고 살게 되었지. 글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소. 그래도 나라 걱정은 한마음이오. 결국, 포수 경험이 그나마 나를 독립군으로 만든 셈이라오. 하하. 그렇지만 내가 정의가 무엇인지는 안다오.”
안창호는 홍범도의 유쾌한 응수가 좋았다.
“밀산으로 가시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곳 십리와에 김성무라는 동지가 있는데, 제가 있던 미국 공립협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피땀 흘리며 노동하고 있는 동포들이 애국금을 거둬 밀산에 투자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홍범도는 ‘도산 선생’이라는 호칭을 써서 화답했다.
“오, 역시 도산 선생은 지략이 뛰어나오. 장기전에 대비하라는 말씀으로 알겠소. 내 이번 경원 수비대와 전투가 끝나면 밀산으로 김성무 동지를 한번 만나러 가겠소.”
홍범도는 1924년, 약속대로 부대를 이끌고 봉밀산으로 들어와 김성무와 결합했다. 홍범도 일행은 군인을 배치하여 주민을 돕게 하고 새 땅을 개간했다. 조합 학교를 열어 조합원 계몽사업에 앞장서기도 했다. 안창호는 이 소식을 상해로 온 이강을 통해서 들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