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나의 사랑 한반도야 #2/10

2화. 유인석과 13도 의군

by 은명

2화. 유인석과 13도 의군


며칠 후 안창호는 김지간, 정영도와 함께 행장을 꾸려 길을 나섰다. 개척리 마을 일대를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이갑 일행은 유인석 선생의 거처가 있는 멍고가이 한인 마을 차피거우(바라바쉬)로 가보겠다고 먼저 나섰다. 안창호 일행은 블라디보스토크 군항 왼쪽 언덕으로 펼쳐진 ‘웅덩마퇴, 둔덕마퇴’라 불리는 움막촌 개척리 마을을 둘러보았다. 9월이었다. 일대 벌판은 누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방을 지배하다’라는 뜻이다. 1873년 전후 러시아는 극동 진출의 교두보로 블라디보스토크 군항 건설과 시베리아 철도부설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항만은 군항 겸 무역항으로 1890년대부터 크게 발전했다. 시베리아철도는 러일전쟁 시기에 바이칼호 남쪽으로 우회하는 횡단노선이 1차로 개통되었고, 아무르강 유역의 구간이 완공되어 완전히 개통된 것은 1916년이다. 한인들이 군항 건설과 시베리아 철도부설 그리고 인근 농촌개발 노동력으로 투입되어 많은 피땀을 흘렸다. 많을 때는 700여 가구 7,500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 체결 후 두만강을 건너온 조선인은 더 많이 증가하였다. 함경도 양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김지간이 흙을 한 줌 집어 들며 말했다.

“땅은 정직하지요. 이곳 토지는 아주 비옥해 보입니다. 쌀농사, 밭농사 뭐든 잘 자라게 생겼어요. 군항 건설에 노동력이 필요했다면 먹거리도 필요했을 텐데.”

안창호는 이 넓은 땅들이 방치 상태로 보이는 것은 농업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탓이 아닐까 생각했다.

“농작물보다 빈 밭이 더 많이 눈에 띄는군요. 곡식이 익어갈 때인데도 인적이 없으니. 이 땅의 소유주들을 원호인이라 칭한다는데, 소유주들의 횡포가 심해서 농사를 지어야 할 사람들이 도시에 몰려 있는가 보오.”

김지간은 이곳에 정착한 한인사회의 이중구조적인 모순과 그 해법에 대해 생각한 바가 있었다.

“청년들이 러시아로 귀화하는 데에 문제가 있답니다. 그런데 일단 귀화하면 농토 구매는 수월한가 봅니다. 이 일에 나서줄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겠지요.”

안창호가 김지간을 돌아보며 말했다. “음, 지도자라... 누적된 문제의 실마리는 신뢰의 문제요. 민족적 각성과 계몽에서 풀어야 하겠지. 그나저나 지간 동지는 밀산 기지 개척이 좌절되니 실망이 크겠소. 장차 어떻게 할 생각이오? 나는 일단 조만간 밀산으로 가볼 생각이오.”

김지간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일본에서 공부한 내용이 농업경영이죠. 마침 고향 진남포에 선친이 물려준 땅이 있어서 그곳에 포도 과원을 가꾸는 것이 제 소박한 계획이었습니다. 이제 나라를 빼앗긴 마당에 꿈은 사라졌지만, 사실은 매일 밤 꿈에 고향 땅이 나타납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가족들....”

안창호는 문득 근당 선생이 생각났다. “포도 과원이라.... 지간 동지는 재림교지요? 근당 선생만큼 고향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분도 안 계실 겁니다. 선생이 재림교단을 떠났다면 어디로 잠적하신 건지....”

김지간은 옛날이야기를 하듯 먼 하늘을 응시했다.

“동경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니, 선생은 이미 독립운동하러 만주로 갔다고 합니다. 평양에서 재림교단 사업이 한창 잘 될 때 선교본부를 서울로 이동하는 것에 반대하셨답니다.”

안창호도 고향이 그리웠다. “내가 신민회 일로 바쁠 때 장인어른 이석관이 재림교회 병원에서 새 일을 맡으셨다고 했는데.”

김지간은 고백했다. “고향 포도밭 과원 경영은 근당 선생께서 추천했습니다.”

안창호가 웃으며 말했다. “포도즙. 재림교 사업이군요! 예수님이 생각나는.... 하하. 아무튼 만주로 가셨다면 어디에 계신지 알아봐야겠구려.”

“예.” 김지간도 돌아가면 선생의 근황을 알아보기로 다짐했다.

안창호가 김지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고향 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오? 지금은 모든 것이 막막하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연해주 땅 일부를 당장 구매하여 기지를 개척할 수도 없고, 이곳 청년에게 농업경영 기술을 가르칠 여건도 안 되고. 그러니 지간 동지는 내가 미주로 떠나면 고향으로 가세요.”

김지간이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승훈 선생을 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때 망명 때 형님과 교동에서 헤어져 의주행 열차를 탔지요. 단재 형님과 나는 정주에 들러 이승훈 선생을 뵈었습니다. 선생께서 여비를 내어 주며 말씀하시길, 고향은 당신과 같은 늙은이들이 꼭 지켜낼 것이라 하셨습니다. 만주나 연해주도 예전에는 우리나라 땅이었다고 하시면서요. 우리가 옛 고구려 땅을 지키지 못한 죄를 원죄로 타고 난 거라고.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고향으로 가서 그곳을 지키라 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나랏일이라고...!”

안창호가 탄식했다. “아, 선생님, 선생님이 그립소. 이왕에 망명을 나왔으니 옛 땅을 되찾을 수는 없어도 한민족이 대한인으로 하나 되는 그 일은 꼭 해야겠소.”

김지간도 탄식하며 말했다. “그때 단재 형님과 압록강을 건너 북간도로 가 백두산을 올랐습니다. 그리고 환인, 집안, 통화 일대를 다니며 고구려 흔적을 찾아다녔습니다. 우리 둘 다 광개토태왕비 앞에서 결국 눈물이 터졌지요.”

이 말을 듣자 안창호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오, 단재가 요새는 어딜 다니는지 아시오? 통 볼 수가 없구려.”

“아마 이상설 선생이 꼭 붙들고 있나 봅니다. 크라스키노에 발해 유적지 솔빈부(발해 5경 15부 62주 중의 하나)와 성터를 샅샅이 살핀다고 했습니다.”


안창호 일행은 남쪽으로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하산스키 지역 최초의 한인 마을, 지신허를 찾아갔다. 지신허는 멍고가이 강을 끼고 있는 차피거우(바라바쉬)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또 의병 활동의 중심지인 크라스키노와도 가까운 곳이었다. 그 너머 남쪽을 바라보면 고국 땅, 두만강 하류가 보였다. 이제 저 땅을 일본이 지배한다고 생각하니 안창호는 억장이 무너졌다.

‘늑장을 부리다가 망국이 되고, 이제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가난하고 선량한 백성들이 사력을 다해야만 한다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국권을 되찾는단 말인가? 권력의 부패 그리고 무능. 강한 나라들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언제 힘을 길러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단 말인가?’ 안창호는 온몸에서 모든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참배 나무에서는 참배가 열린다. 그리고 돌배나무에서는 돌배가 열린다. 내가 참배 씨앗이 되리라.’


지신허는 한인(고려인) 50만이 정착한 러시아 한인 역사의 발원지이다. 1863년 함경도 무산 출신 최운보와 경흥 출신 양응범이 함경도 농민 13가구를 이끌고 와 마을을 처음 형성했다. 양성춘이 양응범의 후손이었다.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양성춘은 소작농을 거느리고 있는 원호인이었다. 국권 피탈 이후 정객들의 망명이 더욱 늘어나 한인사회의 수는 더욱 증가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일본 눈치 보기로 인해 한인사회는 어려움에 빠졌다. 러시아는 한일강제병합을 묵인하고 있었고, 미국의 만주 진출을 경계하여 오히려 일본과 공조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다. 안창호는 13가구 이주로 시작된 한인 최초의 마을 지신허에서 13도 의군이 결성된 것은, 우연이라기보다 상징성이 있는 유인석 선생의 지혜로 생각되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군에 쫓긴 국내 의병들은 두만강 국경을 넘었다. 발해 때 염주성이 있었던 크라스키노에는 최재형과 안중근 의병 동의부대가 활동하고 있었고, 우수리스크(소왕령)에는 유인석, 이범윤 등 유림 출신 의병이 궐기하여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의암 유인석(1842~1915)이 양손에 칼과 두루마리 책을 들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때는 1908년 봄이었다. 연해주에 집결한 의병들은 1908년 7월에 대대적인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으나 결과적으로는 일본군에 밀렸다. 유인석은 크라스키노에 머물면서 『의병규칙』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국내외 각지에 흩어진 무장세력들의 통합에 나섰다. 1910년 4월, 13도 의군이 탄생한 것이다.

유인석은 13도를 총괄하는 도총재로 지휘계통을 통합하였다. 유인석은 포수 출신 의병 홍범도와 이진룡도 도총 소참모 직위로 끌어들였다. 또 국내 신민회 간부인 안창호와 이갑을 도총 소위원으로 선임하여 의병운동과 근대 계몽운동과의 공동전선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러나 ‘13도 의군’은 경술국치로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심기일전하여 무력 부대 양성과 이를 지원하는 단체 조직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1910년 8월 23일, 성명회가 결성되고 유인석은 병탄 반대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유인석은 이상설을 앞세워 조선과 외교 관계를 맺었던 구미 각국 정부에 『성명회 선언문』을 공식문서로 발송했다. 성명회 활동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유인석은 유림의 의병 봉기에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다. 유인석은 1915년 3월, 74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유인석이 앞장섰던 항일 무장투쟁은 1920년대 참의부(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의 성립을 촉진하는 발판이 된다.


묵묵히 앞장 서 걷고 있던 김지간이 안창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쪽으로 가면 유인석 선생이 계시는 마을이 나옵니다. 이곳까지 와서 의병들의 질서와 체계를 세우시려는 유인석 선생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마침 유인석 선생을 생각하던 안창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유인석 선생은 민족의 통합, 통일전선을 구축한 최초의 분이시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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