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참된 관계 참된 행복 #10/10

10화. 마지막 가족 사진

by 은명

10화. 마지막 가족 사진


약속한 대로 서재필은 7월 1일부터 시작되는 하와이 범태평양회의에 참석했다. 140여 명이 참석한 이 회의의 목적은 민족자결의 원칙을 촉구하고 주권문제를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서재필은 이 회의에서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알렸다. 서재필은 하와이에서 체류하는 동안 한인 동포들에게 일본의 방해 책동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독립을 위하여 대동단결하자고 호소했다.

7월 27일, 안창호와 장리욱은 하와이에서 돌아오는 서재필을 샌프란시스코항에서 영접했다. 서재필은 두 사람에게 회의장 분위기와 회의 내용을 설명했다. 세 사람 일행은 스탁톤, 다뉴버, 새크라멘토, 보스톤, 풀리버 등지를 순회하며 흥사단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벼 농장을 살폈다.

서재필은 감동했다. “한인들은 농사에 천재들이오. 허허. 서부에 와 보니 노동과 생산의 주인들이 여기들 계셨소. 도산이 일군 동네였지요. 참으로 아름답소. 사람들이 겸손하고 친절하고 참되게 느껴지오.”

안창호가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이들의 애국정신은 또 남다른 데가 있습니다. 농사는 언제든 자연재해로 인해 시험을 당하기도 하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이 있습니다. 텅 빈 농토들이 다시 뭐든 심어달라고 애원하듯 정직하고 부지런한 사람을 기다리지요.”

서재필이 안창호를 바라보았다. “도산은 시인이셨구려, 허허. 말씀마다 철학이 있어요. 흥사단의 정신이 무실역행이라고 했지요?”

안창호는 겸연쩍었다. “5년 전에 윌로스시 비행학교가 바로 홍수재해로 인해 지속적인 투자가 어려웠답니다.”

“아, 캘리포니아 쌀농사로 거부가 된 백미대왕 말씀이오? 김종림이라고 했나요?” 서재필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임정 초기, 농사에 성공한 그들이 임정으로 애국금을 많이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시영 영감께서 그들에게 표창을 내린 적도 있었지요.” 안창호는 으쓱했다.

“재해를 입어 곤란에 빠져도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 나는 그들이 참 위대하다고 생각하오. 그래서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 했던가? 우리나라도 갑오년 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농민을 살폈어야 했어. 조정이 무심하니 나라가 엉망이 되었지.” 서재필은 뼈아픈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농장에는 언제든 일감이 있지요. 그래서 일을 도우면 일당이 생깁니다. 제가 농장을 방문하는 이유는 여비를 마련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몸은 언제든 노동을 할 수 있으니 체력을 단련해야 합니다. 흥사단 이념의 실천덕목은 바로 ‘덕, 체, 지를 기르자!’ 입니다.” 안창호는 신이 난 소년처럼 굴었다. 서재필은 웃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장리욱도 같이 웃었다.


안창호와 장리욱은 서재필과 함께 기차로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하여 흥사단 본부(단소)에 들렀다. 8월 6일은 마침 대한여자애국단 창립 6주년 기념행사가 열리는 날이었다. 서재필 박사가 등장한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퍼져 로스앤젤레스 임마뉴엘 교회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안창호는 인사말에서 서재필을 “우리나라 유신의 조상”으로 추켜세우고 “낡고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고자 목숨과 가족을 나라에 바쳤고, 구미 문명을 받아들여 의학박사의 명예를 가진 첫 어른이며,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대중을 깨우친 어른이다. 나는 이분의 연설회에 밥 먹는 일도 제치고 따라 다녔으며, 토론을 통한 공론형성의 위대함을 배웠다. 그것이 민주주의 신사상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서재필은 이에 화답하여 말했다. “도산 선생은 아브라함 링컨과 같은 지도자요. 우리가 그렇게 만듭시다. 이승만도 알고 보면 상처가 많은 사람이오. 박용만파, 이승만파, 안창호파 이런 말에 흔들리지 말고, 이들 지도자가 같이 손잡고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합시다.”


이 행사에는 이혜련을 비롯하여 김마리아, 차경신, 강혜원 등이 참석했다. 김마리아는 상해 국민대표회의 때 안창호의 권유에 따라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참가했으며, 1923년 7월 로스앤젤레스로 도미하여 이혜련과 백일규의 도움을 받아 건강을 회복했다. 그리고 1924년 9월에 메릴랜드 주립대학 컬리지파크 사회학과에 입학하였다. 김마리아의 단짝 차경신은 김마리아의 뒤를 따라 1924년 1월에 샌프란시스코로 와서 교회 주일학교와 국어학교에서 교사로 자리를 잡았다.

대한여자애국단은 1919년 8월 5일에 다뉴바에서 결성된 흥사단 여성단체로, 회원 대부분이 국민회와 흥사단에 가입한 여성이거나 단우 부인들이었다. 안창호가 이 단체의 산파 역할을 했고, 강혜원의 남편 김성권과 송종익, 홍언, 백일규 등이 도왔다.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도 다뉴바와 만테카 포도농장에서 일하면서 부인들과 교류를 넓혔다. 도산 안창호가 기약 없이 상해로 떠나서 임시정부 최고 수반의 자리를 겸하면서 독립운동에 매진하게 되자, 5월부터 새크라멘토와 다뉴바 지방에서 이혜련 여사를 응원하는 친목 모임이 시작되었다. 강혜원(1885~1982)은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와 다뉴바 신한부인회 등을 통합하여 대한애국부인회를 설립하고, 초대 총단장이 되었다. 강혜원은 흥사단 지도급 단우 김성권과 1913년 12월 9일 이대위 목사의 주례로 결혼한 흥사단 여성 단우였다. 대한애국부인회는 “대한 여자를 단결하고 문명준칙과 도덕원리에 기인해 개인으로부터 가정에, 가정으로부터 사회로의 개량을 힘쓰며 대한독립의 기초적 역량을 준비함(1924.8 수정)”에 목적을 두었다.

대한여자애국단의 주요사업은 독립운동 후원이며, 외교선전, 군사운동, 임시정부 재정지원, 자녀의 국어교육, 구제사업 등이었다. 임시정부에는 1920년 2월 500달러를 모금하여 송금했다. 대한여자애국단 본부는 다뉴바와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다가, 현재는 로스앤젤레스에 있으며 그 외 11곳에 지부를 두고 있었다.


1926년 2월, 안창호는 드디어 떠날 채비를 차렸다. 안창호는 떠나기 일주일 전쯤 장리욱과 함께 산타모니카 해변을 찾았다. 안창호의 딸 수산도 따라나섰다. 수산은 11살이었다. 노을이 아름다운 곳. 안창호는 멀리 수평선 너머로 조국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제 가면 또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 그러나 저 꼬맹이 수산과 이별하고 가야 한다. 이제 상해로 돌아가면 유일혁명당 건설에 매진하게 되겠지.’

안창호는 장리욱에게 물었다. “같이 다닌 소감을 묻고 싶소. 어땠소?”

장리욱이 잠시 뜸을 들이다 거꾸로 물었다. “선생님이 바쁜 틈을 타서 미주에 오신 이유가 따로 있으시지요?”

“아니, 그것을 눈치채셨단 말이오? 하하.”

“이승만 박사와 정한경을 만나고 또 서재필 박사와 회동하셨지요. 사태파악과 국정 의논. 상해의 나쁜 여론이 미주 동지들에게 끼쳤을 영향도 생각하신 거지요?”

안창호가 감탄했다. “그대는 참으로 명석한 사람이오. 맞소. 그대의 추측대로요. 성경 말씀처럼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하듯, 여론 확인이 필요했소. 상해에서는 이승만을 세웠다고 안창호를 나무라고, 미주에서는 안창호가 건건이 이승만을 반대했다고 하고.... 사실 비자가 거부될 때부터 조금씩 불안했었소. 와보니 내가 공산주의자로 찍힌 것이 사실이었고. 누가 그런 모함을 했을까?”

“이승만 편에서 뭔가 이익을 얻어보려는 아첨꾼들의 소행일 겁니다. 하와이에서 철부지들 간에 퍼져나간 소문들이 아닌가 합니다.” 장리욱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이번에 이승만을 독대한 것은 참 잘한 일이었소. 그 속을 알게 되었지. 내가 그 양반을 지도자로 세운 명분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되더이다. 나름대로 생각이 깊고 아랫사람을 감싸는 신의가 있는 지도자. 미국의 힘을 너무 믿어 치우쳐 있다는 생각도 들고 반공 노선이 분명하고. 그분은 실력양성과 계몽을 나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소. 반면에 무력준비에 대해서는 선을 급디다.”

“그랬군요. 처음부터 독립전쟁은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을까요?” 장리욱이 말했다.

“글쎄... 그러니 만주 무장세력과 척을 질 수밖에. 무력준비의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도 모르지. 만주를 한 번쯤 순방했다면 어땠을까? 유일독립당에 대해서는 좌우통합이 불가할 거라고 합디다.” 안창호가 말했다.

“시카고 일대 청년들은 어땠습니까?” 장리욱은 궁금했다.

안창호는 시카고에서 만난 청년들과 미국 자본주의 모순과 한계에 대해 난상토론을 벌였었다. 이들은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도 레닌 사후 권력의 변화를 두고 봐야 할 거라고 말했다. 한국 독립투쟁은 안창호의 주장대로 이념을 떠나서 우선은 민족혁명 노선으로 통일할 필요가 있다면서 이에 수긍했다.

“시카고는 생동감이 넘쳐 좋았소. 내가 청년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역사의 진보를 믿는다는 점이지. 또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고. 그들은 공산주의가 국제화되는 것은 반대지만, 미국의 자본주의 또한 미구에 닥칠 경제공황을 어떻게 벗어날지를 두고 판단해야 한다고 합디다.”

장리욱이 다소 시무룩하게 말했다. “한국의 독립운동이 미국이나 소련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국제정세가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지는 모르지만, 균형감을 유지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민족통일노선이 중요하게 생각됩니다.”

“맞소. 자기가 처한 환경에 따라 판단은 조금씩 차이가 있소. 그러니까 통일전선이 꼭 필요하오. 유일 정당 안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는 것은 상생이지. 공론과 복종. 그 길이 민주주의일 테니까. 서재필 박사를 만나 독립 전략을 의논할 수 있어서 보람되더이다. 감히 어려운 선생님으로만 알고 있다가 만나보니 역시 훌륭한 선각자셨소.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소.” 안창호는 신뢰감에 차서 말했다.

“워낙 명성이 있는 분이라 이번 서북미 방문은 한인사회에 신선한 바람이 되었을 겁니다. 이승만에 대한 오해도 많이 풀리고. 관계는 역시 직접 만나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야 비로소 사랑이 되는 것 같습니다.” 장리욱은 그동안 안창호를 곁에서 수행하며 가졌던 느낌 그대로를 말했다.

“그게 정의돈수요. 내가 이번 순방길에 혜련이 뭐라 탓하든 여러 지역 동포들을 찾아다닌 것도 정의돈수 실천이라오.” 안창호는 으쓱했다.

장리욱도 맞장구치듯 동의했다. “그러신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제가 수행원으로 뽑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선생님의 꿈과 이상, 그리고 무실역행과 정의돈수. 많이 배웠습니다. 저는 앞으로 흥사단 공동체에 전념하겠습니다. 물론 하던 공부는 하면서요.”

“장합니다. 나도 그대를 믿습니다. 이번 방문길에서 가장 값진 선물을 안고 가오. 우리는 또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장리욱은 컬럼비아대학으로 돌아갔다. 안창호는 추후 단우 이병호를 통해 장리욱에게 말없이 장학금 300달러를 송금했다.

안창호는 1926년 2월, 샌프란시스코 항을 떠나는 ‘S.S 소노마’ 배편을 마련했다. 흥사단 동지들은 로스앤젤레스 YMCA식당에 작별 만찬 자리를 만들었다. 70여 명이 참석했다. 안창호의 가족이 모두 초대되었다. 필립은 시무룩해 있었고, 필선, 수산, 수라는 아무것도 모른 채 마냥 좋아했다. 혜련은 몸이 무거워 보였으나 안창호는 아내가 임신 중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만찬 석상에서 안창호가 혜련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치 고백성사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여태껏 당신에게 치마 한 감, 저고리 한 벌도 사 주지 못한 남편이오. 저기 필립과 그 애 동생들이 앉아 있습니다만, 나는 애들이 소학교를 다니고 학교를 졸업하는 동안에도 연필 한 자루, 공책 한 권도 사 줘 본 일이 없습니다. 부족한 아비입니다.” 이 말을 들은 지인들은 눈물을 훔쳤다.


만찬이 끝나고 안창호 가족은 사진관에 들러 가족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막내 필영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마지막 가족사진이었다.

떠나기 하루 전날, 안창호는 공원 숲을 이루고 있는 산 정상에 올라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곳에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다시 기약 없이 떠납니다. 제가 없어도 주님께서 여기 동지들을 지켜주시리라 굳게 믿습니다. 동지들은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처음처럼 주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들을 떠나 상해로 돌아갑니다. 조국의 독립은 하늘의 뜻이니 저는 제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어떤 시련이 닥쳐도 저는 주님을 믿고 사랑합니다.”

다음 날, 혜련이 기차로 샌프란시스코까지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안창호는 로스앤젤레스 단소 마당에서 아이들과 작별했다. 그리고 홍언, 송종익, 한승곤, 김성권, 임준기, 황사선 동지들과도 작별했다. 아쉬웠다. 그러나 어쩌랴. 헤어짐은 우리의 운명인 것을.

“동지들을 믿고 나는 가오. 이번에 동지들을 만나고 나서 나는 큰 힘을 새로 얻었소. 내가 조금 더 열심히 하리다. 언제쯤 미국에 다시 올 수 있을까? 광복되었을 때...?” 안창호는 눈물이 핑 돌았다. 동지들도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홍언이 생각했다. ‘이별이 이렇게 아픈 것인가? 희망을 가늠하기 어려워 그런 것인가? 도산을 다시 볼 수 있기는 한 것일까?’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혜련과 작별하고 하와이를 거쳐 상해로 가는 S.S.소노마호에 승선했다. 남편과 작별하는 혜련은 덤덤했다. “안녕히 가세요. 부디 몸 건강하시고 여기는 아무 걱정 마세요.” 혜련은 막내 아이를 잉태하고 있다는 말을 끝내 하지 않았다.

안창호는 3월 1일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민찬호가 마중 나왔다. 호놀룰루 한인 예배당에서 지인들과 잠시 인사를 나누고, 민찬호와 함께 이 섬, 저 섬으로 동지들을 찾아 나섰다. 박용만이 떠나 버린 하와이 민심은 분열로 말이 아니었다. 안창호는 하와이 체류를 허가받기 위해 이민국장과 애원하듯 면담했다. 그러나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안창호는 끝내 섬에서 쫓겨났다. 안창호는 3월 13일 자로 남태평양 섬 수바에서 혜련에게 편지를 썼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나를 보내고 혼자 돌아갈 때 얼마나 괴로웠소. 나는 하와이 이민국에서 체류를 허락하지 않아 시간을 낭비했소. 다시 소노마호를 타고 호주 시드니로 가려 하오.”


안창호는 3월 23일 호주 시드니 항에 도착했다. 여객선 사정으로 20여 일간 시드니에 머물게 되어, 이곳 부활절 축제를 보고 문화답사를 하며 ‘이상촌’ 자료 수집에 몰두했다. 안창호는 여유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타고난 여행가이자 도시 탐험가로서, 언제나 이상촌을 꿈꾸며 자료를 수집했다. 홍콩으로 가는 소노마호는 4월 14일 시드니를 출항했다. 안창호는 항해 끝에 4월 22일 홍콩에 도착했다.


(제8장 마침. 다음 장에 계속)

이전 11화제8장 참된 관계 참된 행복 #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