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구경하
전문 전체보기는 https://brunch.co.kr/@isegoria 이곳에 있습니다.
하필이면 겨울이다. 건물들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강바람은 그사이를 지르며 매서워진다. 겨울, 여의도는 바깥 활동을 하기에 좋은 곳이 아니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물러야 하는 집회는 더더욱 그렇다. 국회 앞 집회에 처음 참석했다 날카로운 추위에 놀랐다는 이들의 반응을 소셜 미디어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게다가 국회 앞에는 시민들이 모일 공공 공간이 없다. 산업은행 앞 인도가 넓은 편이라 집회 장소로 쓰이지만 그곳은 광장이 아니다. 경찰은 대규모 집회가 열리면 대신 10차로, 너비 100미터인 의사당대로의 차량 통행을 통제해 집회 장소로 관리한다. 그런데 의사당대로의 중앙에는 교통섬이 있고, 키 큰 소나무들이 자리잡고 있다. 대로의 절반은 여의도 공원 방향으로 가면서 지하차도로 연결된다. 집회 때 통신사의 이동기지국 역할을 하는 대형 버스까지 도로 곳곳에 놓이면 아스팔트 도로 위에선 주최 측의 무대가 잘 보이지 않는다.
‘민의의 전당’인 국회의사당 앞은 주권자인 시민들이 정치적 의사 표현을 하기엔 옹색한 공간이다. 그렇다고 시민들은 여의도 공원에 모이지 않는다. 지난해 12월 14일 한국일보가 360도 카메라로 촬영한 집회 사진을 보면 시민들은 공원보다는 차라리 국회 쪽 건물 사이, 아스팔트 도로 위를 택했다. 건립 당시 동양 최대 규모였던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마찬가지로 아시아에서 가장 컸던 여의도 광장의 공간 구조는 어쩌다 이렇게 어긋난 것일까. 여의도 도시계획에 국회의사당과 연결된 광장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일까.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언은 ‘여의도’의 연관어를 모두 바꿔놓았다. 12월 한 달간 ‘여의도’와 가장 연관성이 큰 단어는 ‘윤석열 대통령’으로 나타났다. 이어진 단어들은 모두 윤 대통령과 대립하는 단어들이다. ‘시민들’은 ‘국회의사당역’과 ‘광화문’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어 ‘비상계엄’에 반대하고 ‘탄핵 소추’를 요구했다. ‘무정차통과’는 인파의 규모를, ‘민주노총’은 집회 주최 측을, ‘선결제’는 집회 참여자들을 후원하는 새로운 집회 문화를 뜻한다. 모두 여의도가 계엄 시국의 진원지임을 보여준다.
‘여의도’의 상위 연관어로 ‘국회의사당역’이 등장한 것도 눈에 띈다. 계엄 이전 여의도가 제도 정치가 벌어지고 재건축을 계획하는 추상적 공간인 반면, 계엄 이후 여의도는 구체적인 현실 공간이 됐다.
그런데, 이때 등장한 단어는 ‘국회의사당’이 아니라 ‘국회의사당역’이다. 전자는 국회의원들의 활동 공간이고 후자는 시민들이 모인 공간이다. 혹시 ‘국회의사당’에서 벌어진 많은 일들이 음절이 중복되는 ‘국회의사당역’의 등장에도 영향을 준 게 아닐까? 내친김에 ‘국회의사당’은 어떤 맥락에 놓여있는지 살펴보자.
계엄 시국 ‘국회의사당’과 가장 연관된 단어는 놀랍게도 ‘시민들’이 나왔다. ‘사람들’, ‘국민들’도 비슷한 맥락의 연관어로 보인다. 국회 기능을 마비시키려 한 ‘계엄군’, ‘윤석열 대통령’, ‘비상계엄’보다 ‘국회의사당’과 연관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계엄을 해제하고 탄핵 소추안을 의결한 ‘국회의원들’은 다섯 번째였다.
계엄 해제 직후부터 국회는 각 상임위가 정부 부처에 대한 현안보고를 통해 진상 파악에 나섰다. 나흘 만에 본회의에 윤 대통령에 대한 첫 탄핵소추안을 상정하기도 했다. 국회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국회의원들이 활발한 활동을 했지만, ‘국회의사당’을 언급한 기사들은 ‘시민들’을 더욱 주요 행위자로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을 뜻하는 대명사로 불리는 ‘여의도’와 ‘국회의사당’이 ‘시민들’의 장소로 여겨진 적이 있었던가. 국회를 ‘민의의 전당’, ‘대의민주주의의 상징’이라 말은 하지만, 주권자로서 시민이 여의도 전면에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도시 맥락은 공간과 사람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그곳의 독특한 지형이나 랜드마크가 되는 건물, 최첨단의 인프라와 교통망 같은 물리적 환경이 기준이 될 수 있고, 그곳에서 펼쳐지는 정치, 경제, 산업, 문화 등 두드러진 활동이 그 장소의 성격을 규정할 수도 있다. 이와 함께 공동체가 폭넓게 공유하고 기억하는 장소 경험 또한 도시 맥락을 구성한다.
그런데 도시 맥락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여의도(汝矣島)라는 이름은 우리말 ‘너섬’에서 왔다. 개발되기 전 여의도는 양이나 염소를 키우는 가치 없는 섬이었다. ‘너나 가져라’라는 얘기에서 ‘너의 섬’, ‘너섬’이란 이름이 유래했다. 불과 79년 전 사진에서 여의도의 지금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변화하는 여러 구성 요소 중 무엇이 도시의 맥락을 결정할까. 공동체에 의미 있는 장소 경험은 도시의 정체성이 되고, 시간을 견디면 공동체의 상징 공간이 된다. 공동체가 중시하는 가치, 그것을 물리적 공간으로 확정하는 역학관계에 따라 그 도시의 맥락이 정해진다. 여의도의 도시 맥락은 지난해 12월 이곳에서 벌어진 일련의 일들에 대한 사법 판단과 역사적 평가를 거치면서 달라질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당신이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여의도는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