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중소도시 스토크온트렌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생각들
Written by 김세훈
영국 웨스트 미들랜즈에 자리 잡은 스토크온트렌트(Stoke-on-Trent)는 인구 26만 명의 중소도시입니다. 이 도시의 독특한 점은 1910년 버슬렘, 툰스톨, 스토크, 핸리, 펜톤, 롱톤이라는 여섯 마을이 합쳐져 탄생한 다핵도시라는 사실이죠. 각기 다른 산업 기반을 가진 마을들이 하나로 통합된 모습은 한국의 창원·마산·진해 통합이나 청주-청원군 통합과 유사합니다.
지리적으로는 런던과 맨체스터를 잇는 교통 요충지에 위치했으며, 18세기부터 영국 도자기 산업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치며 'The Potteries'라는 애칭을 얻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세라믹 밸리'라는 이름으로 첨단 세라믹 연구개발이 이어지며 전통과 혁신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한때 스토크온트렌트는 세계 도자기 시장을 호령했습니다. 웨지우드(Wedgwood) 같은 브랜드가 이곳에서 탄생했으며, 도시 경제의 심장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세계화와 자동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도시의 핵심이던 도자기 산업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공장이 문을 닫고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도시는 '탈산업화'라는 만성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이는 GM 공장과 조선소가 문을 닫으며 도시 전체가 위기에 빠졌던 군산의 아픔이나, 석탄 산업 합리화 조치 후 수십 년간 쇠퇴의 길을 걸었던 태백의 역사와 겹쳐 보입니다. 학계와 언론에서는 이 도시를 경제적, 정치적으로 실패한 '바구니 케이스(complete basket case)'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구제 불능의 총체적 난국을 뜻하는 영어 관용어입니다. 원래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팔다리를 모두 잃어 문자 그대로 바구니(basket)에 실려 다녀야 했던 병사를 가리키는 끔찍한 말에서 유래했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스토크온트렌트는 2000년대에 들어서며 스스로 일어서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외부의 대규모 지원에만 의존하기보다, 도시가 가진 자산을 활용한 '자체적인(home-grown)' 재생 전략을 추진했습니다.
한 예로 도시의 역사적 중심지인 핸리(Hanley)에는 과거 병 공장이 있던 부지에 2억 파운드 규모의 복합 업무지구 '스미스필드(Smithfield)'가 들어섰습니다. 낡은 공장터에 현대적인 건물이 올라가는 모습은 시민들에게 쇠락을 딛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시적인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동시에 도시는 고질적인 고립감을 벗어던지기 위해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습니다. 도시의 대동맥인 A50/A500 도로망을 대대적으로 개선하여 런던과 맨체스터 같은 거대 경제권과 직접 연결되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 투자는 스토크온트렌트를 잊혀진 도시가 아닌 전략적 물류 허브로 탈바꿈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스태퍼드셔 대학교 캠퍼스와 중앙역을 중심으로 '유니버시티 쿼터(University Quarter)'를 조성하여 젊고 활기찬 인구를 유치하고 도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동시에 1776년부터 도시의 역사와 함께해 온 '스포드(Spode) 도자기 공장'은 철거되는 대신, 시민들의 자부심을 담아 창조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재탄생했습니다. 오늘날 이곳에서는 권위 있는 '브리티시 세라믹스 비엔날레'가 열리고, 지역의 역사를 소재로 연극을 만드는 '클레이바디(Claybody)' 극단이 활동합니다. 오래된 가마에 문화의 불을 다시 지핀 것이죠. 세라믹 밸리 기업지구는 오염된 부지를 정화 후 개발하여 지금까지 2,000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했습니다.
하지만 도시가 긍정적인 변화의 흐름을 타려 할 때마다 예기치 못한 '충격(sudden shocks)'이 덮쳤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그리고 전 세계를 멈추게 한 코로나19 팬데믹이 연이어 도시를 흔들었습니다.
이 성장의 동력은 완전히 새로운 산업들이었습니다.
1998년부터 2022년까지 통신 및 IT 분야는 무려 98배나 성장했고, 팬데믹 기간 동안 온라인 쇼핑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도시의 운송 및 보관업 분야는 단 3년 만에 44%의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2019-2022년 동안 스토크온트렌트 경제는 8.8% 성장하여 영국 평균(1.6%)을 크게 상회했습니다. 2022년 말 기준 영국에서 일자리가 가장 빠르게 늘어나는 도시 중 하나로 꼽혔습니다.
미래를 향한 야심찬 계획도 이어졌습니다. 잉글랜드 중부에서 가장 큰 도심 유휴부지를 2,600석 규모의 아레나, 주택, 호텔 등이 들어서는 '에트루스칸 스퀘어(Etruscan Square)'로 탈바꿈시키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추진되었습니다. 이곳 개발을 위해 영국 정부의 레벨링 업 펀딩으로 약 2천만 파운드를 확보했죠.
스마트 시티로서의 면모도 있습니다. 스토크온트렌트 시의회에서는 기가비트 이상의 속도를 제공하는 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민간이 직접 땅을 파고 관로를 매설하는게 아닌, 시가 소유한 기존 지하 관로와 공공 자산을 활용할 수 있도록 결정했습니다. 이는 민간 기업이 초기 투자비와 조성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여건이 되었죠.
특히 이렇게 설치된 네트워크에 대해 영국 최초로 '개방형 엑세스'를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즉, 광케이블 인프라를 민간 기업이 투자하고 운영하되, 이들 기업이 네트워크 관련 사업이나 사용료 징수를 독점하는게 아닙니다. 여러 서비스 제공업체들이 공동으로 망을 사용하면서 각자의 브랜드를 걸고 소비자에게 인터넷, 전화, TV, IoT 등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다양한 디지털 기업을 유치하고 스태터드셔 대학 등과 협력해 '게이밍 허브'를 조성한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습니다.
2023년 5월, 스토크온트렌트는 정치적으로도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노동당이 시의회 다수당이 되면서 제인 애시워스가 새로운 시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애시워스의 리더십 아래 2024년 12월에는 도시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경제개발 전략을 발표했는데, 이는 단순한 경제 성장을 넘어 "시민과 기업 모두를 위한 더 나은, 더 공정한 경제"를 만들겠다는 비전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성장의 혜택이 도시 전체에 고르게 분배되지 않는 문제는 여전하며, 영국 평균과의 생산성 격차는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스토크온트렌트의 여정은 '지방 소멸'이라는 거대한 위기 앞에 선 우리에게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도시의 유산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지속가능한 변화는 어디에서 오는가, 위기에 강한 도시란 무엇인가 등이죠. 스토크온트렌트의 이야기는 성공 매뉴얼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역사를 바탕으로 스스로 다음 장을 써 내려가기 위해 분투하는 한 도시의 복잡하고 현재진행형인 서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