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성수동을 관측하는 키워드 (1)

표류가 아닌 상륙의 공간

by 도시관측소

Written by 김세훈



저는 이번 7~8월 서울대 USDL 연구원 및 두 명의 기업인과 <성수 스터디>를 진행했습니다. 성수동은 누구나 가봤고 여러 번 들어봐 익숙한 동네입니다. 그렇다고 가볍게 이해할만한 지역은 아닙니다. 지금의 성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내공과 탐구의 노력이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번 스터디를 통해 처음으로 성수 관련 글, 논문, 기사 대부분을 훑어보았습니다. 관련 소설도 찾아보고 연구 보고서도 읽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연구진과 만나 소통하고 성수의 골목골목을 찾아다녔습니다. 덕분에 성수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러분들의 소중한 생각도 경청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은 이번 스터디의 마무리 겸 앞으로 이어질 심층 연구를 위한 성수동 스케치 노트에 해당합니다. 아직 완성된 글은 아닙니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나 인과관계의 착오가 있을 수 있습니다. 너그러운 이해 부탁드리고, 혹시 바로잡아 주실 분들은 답글이나 개인 메시지로 연락 바랍니다.


첫 번째 성수를 읽는 키워드는 "표류가 아닌 상륙"입니다.



성수는 '표류'가 아닌 '상륙'의 공간


성수에서 만난 많은 분들은 특정 시점에 분명한 계기로 이곳에 '상륙'했다고 말합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비슷한 표현이 꽤 자주 반복됩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 흐름을 따라 들어왔다가 별 계기 없이 떠나는 게 표류입니다. 그에 반해 치밀한 계산이나 목표가 동반된 선택을 내린 후 찾아오는 것이 상륙입니다. 성수의 사람들은 성수다운 매력에 이끌렸고 성수에서 뭔가를 이뤄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성수는 표류보다는 상륙의 공간에 가깝습니다.


성수동은 강남 및 강북 도심과 매우 가깝지만, 지리적으로 고립된 섬이기도 합니다. 남쪽으로는 한강, 북서쪽으로 중랑천이라는 커다란 물줄기가 외부 경계를 만듭니다. 내부적으로도 뚝섬역~성수역 2호선 지상구간과 천을 따라 간선도로가 있고 동일로 등 큰 인프라가 내부를 가로지릅니다. 남쪽에서 성수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성수대교와 영동대교를 건너야 합니다. 서울의 다른 지역처럼 길을 따라 걷다가 스며들듯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경계를 넘어서 들어가야 지역을 만나는 곳이죠.


용도 측면의 고립도 있습니다. 과거 수십 년간 성수동은 준공업지역이라는 특수한 정체성을 가졌고, 붉은 벽돌 공장, 영세 경공업, 창고와 기계 소음, 기름 냄새 등의 풍경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공장지대에 볼일이 있거나 성수에 집이 있지 않다면 찾아갈 이유가 없는 곳, 혹은 목적 없는 방문이 무심결에 차단된 곳이었습니다. 낙후된 물리적 환경에 비해 오랜 기간 개발의 흐름에서 비껴나 있었던 점도 특별합니다. 덕분에 과거의 풍경과 시간이 박제된 것 같은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죠. 물론 최근에는 새로운 오피스와 호텔 등 개발이 활발해졌습니다. 어쨌든 이와 같은 다차원적 고립으로 인해 성수 상륙은 더욱 의도성을 동반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2019년 문을 연 창작자들의 라운지 코사이어티는 한 사장님이 소유한 용접 공장을 10년 동안 임차하며 "좋은 공간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가설을 실험해 보자"는 포부로 시작했습니다. 언맷피플 이민수 대표는 저희와의 인터뷰에서 2019년 성수에 "상륙"했다고 정확하게 표현했죠. SM 타운플래너 한지수 대표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2021년 SM 엔터테인먼트는 방배, 압구정 등을 떠돌던 '강남 시대'를 마감하고 계열사 집적을 통한 시너지 창출을 목표로 서울숲 아크로 서울포레스트 D타워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습니다. 도만사(도시를 만드는 사람들) 조영하 대표는 북성수의 한 공간을 보며 매력에 빠졌습니다. 당시만 해도 북성수는 힙함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죠. 2020년 2월 도만사가 문을 열면서 여러 제조업 대표와 지역 주민을 만났고, 성수에 대한 진짜 애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영하 대표는 요즘 '위메이크성수'와 같이 제조업 공동체를 성수답게 이어나가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역시나 의도적인 상륙입니다.


"...낙담에 짓눌려 있을 즈음 우연히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선우재 대표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진짜 자기 자신을 획득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획득한 자신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고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 채 평생을 살아가거든요.」 그의 글들이 어떤 열망의 형태로 내 안에 자리 잡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선 대표가 운영하는 회사에 경력직으로 입사 지원을 했다...생각해 보면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둔 후 시험을 준비해 공무원이 되었다가 다시 성수동의 스타트업 회사에 입사하기까지 과정은 고달팠다." - 채기성, <성수동>


소설 <성수동>의 주인공은 개인적 선망과 직업적 목표를 동시에 품고 성수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대기업과 시청이라는 직장을 뒤로하고 "진짜 자기 자신을 획득하는" 여정을 쫓은 것이죠. 물론 가상의 인물이지만, 실제 성수동에서 한 번쯤 마주쳤을 것 같은 경력직 기획자의 모습입니다.


루트임팩트(허재형 대표)와 임팩트스퀘어(도현명 대표)처럼 2014년을 전후하여 성수를 대한민국 최고의 '소셜벤처 밸리'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이곳에 터를 잡은 사회 혁신가들도 있습니다. 허재형 대표의 경우 2017년 '헤이그라운드 성수시작점'으로 상륙의 목표를 구체적인 공간으로 실현해 냈고, 도현명 대표는 2014년 서울숲 근처에 '임팩트스퀘어'를 조성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직원들이 밥 먹을 데가 없어 양식, 한식집을 사옥에 같이 입주시켰다고 합니다.



'상륙'을 가능하게 한 조건


그렇다면 왜 하필 성수동에 상륙했을까요? 물론 정착의 시기나 기업의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수많은 잠재적 후보지 가운데 성수는 공통적으로 세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는 (1) 감당 가능한 수준의 가격, (2) 충분한 규모의 땅과 공간, 그리고 (3) 어디에도 없는 '날것(raw)'의 감각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조건은 성수동의 도시형성 과정과 산업구조 변화와 맞물려 있습니다. 해방 이전의 성수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활용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동교(東郊), 즉 한양 동쪽의 교외지역으로 불렸습니다. 중랑천과 청계천이 합류하는 평야지대이자 저지대로 여러 채소를 재배하는 곳이자 군대가 무예를 수련하던 곳이었죠. 임금의 사냥터이자 관마를 기르던 국영 목장 역할도 했습니다. 1908년 우리나라 최초의 상수도 수원지가 놓였고, 1930~40년대 왕십리와 뚝섬 간 기동차가 다니면서 전기산업과 제지회사가 성수에 들어왔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농업 이민 정착지로 쓰이다가, 1934년 뚝섬 유원지가 개장되면서 서울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해방 후 1950년대에는 경마장이 준공되기도 했죠.


1960년대는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성수의 분기점입니다. 정부에 의한 토지구획정리사업(1961-69)이 전면 시행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서울에 진행된 19개 사업지구 중 유일하게 지구 전체가 준공업지역으로 지정되었고 실행까지 이루어진 곳이 바로 성수였습니다. 동시에 주거와 공장지구가 뒤섞인 혼재지구, 요즘 말로 '용도혼합지구(mixed-use district)'에 해당했죠. 이미 시작부터 파격적입니다.


이후 국가산업단지로 지정된 구로공단과는 달리, 성수에서 공공의 역할은 작아졌습니다. 대신 민간 중심의 공장 이전과 건설이 이루어집니다. 이때 성수와 인근 금호동으로 이전한 기업들이 모나미(처음에는 광신화학 공업사)와 금강제화였고, 이와 함께 인쇄, 시계, 섬유, 약품, 자동차 정비업 등이 성수의 땅을 채웠습니다.


비록 성수의 제조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지만, 이들 산업의 활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80년대 이후 대기업 공장들은 서울 외곽으로 이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성수의 산업 공동화로 이어졌죠. 그런데 이는 역설적으로 변화의 기회를 남겼습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성수동은 쇠락했지만 동시에 저렴한 임대료의 낡고 넓은 공장과 붉은 벽돌 창고라는 풍부한 '공간자본'을 품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저평가된 물리적 자산이었지만, 이는 훗날 독특한 문화자본으로 전환될 잠재력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2006년을 전후하여 서울 전역을 휩쓴 재개발과 뉴타운 열풍은 초기 개척자들의 성수로의 상륙을 가속화했습니다. '도시재정비 촉진을 위한 특별법' 발표 이후 홍대, 가로수길 등 기존 상권의 임대료가 폭등하자, 이를 감당하기 어려워진 예술가, 디자이너, 소규모 공장과 장인들이 대거 밀려 나왔습니다. 이들에게 저렴한 임대료, 넓은 공간, 그리고 준공업지역 특유의 거친 물성을 갖춘 성수동은 매력적인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특히 성수동은 문래동이나 을지로 등 비슷한 시기에 주목받던 다른 산업 지역이 갖지 못한 강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첫째, 단층의 대규모 공장과 창고가 많아 단순 작업실을 넘어 쇼룸, 복합문화공간, 기업 사옥까지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의 확장성'이 뛰어났습니다. 둘째, 2012년 분당선 서울숲역 개통은 강남/분당과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획기적으로 좁히며 구매력 있는 소비자와 인재, 그리고 자본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죠. 마지막으로, 2005년 개장한 서울숲의 존재는 다른 산업 지역이 흉내 낼 수 없는 강력한 '어메니티'로 작용했습니다. 서울숲은 단순한 휴식 공간을 넘어 기업인들의 네트워킹 장소나 입사 면접 공간으로 활용될 만큼 비즈니스의 연장선에 있는 녹지입니다. 최근에는 다양한 문화 콘텐츠가 생성되는 창작의 무대로 거듭나고 있죠.



진화하는 상륙, 그리고 새로운 과제


초기 상륙자들이 발견한 기회는 '날것'의 가능성이었습니다. 이들은 기존 공간이 가진 멋을 최대한 존중하며 스스로 인테리어를 하고 공간을 채워나갔습니다. 2012년 낡은 인쇄공장을 개조한 카페 '자그마치'와 2013년 정미소 건물을 탈바꿈시킨 '대림창고'는 이러한 초기 상륙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이들은 은밀하게, 그러나 성공적으로 자신들의 깃발을 꽂으며 성수동의 초기 바이브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상륙의 양상은 변화했습니다. 소셜벤처와 스타트업의 유입을 거쳐, 2019년 이후 대기업과 글로벌 브랜드들이 본격적으로 상륙하기 시작하면서 '깃발'을 꽂는 방식은 더욱 노골적이고 거대해졌습니다. '디올 성수'와 같은 플래그십 스토어는 단순히 인테리어를 넘어 건물 외관 전체를 통해 브랜드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크리스챤 디올은 1946년 파리 몽테뉴가 30번지에 디올 하우스를 오픈했습니다. 디올 성수는 그 외관을 흉내낸 건물입니다. 그만큼 디올에서 공을 들여 만든 장소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건물의 일부 벽면, 혹은 건물 전체에 대한 래핑 실험도 한창입니다. 입지와 공간 자체가 한 브랜드의 익스테리어 광고판이 되는 것이죠. 백영선 대표에 따르면 성수동은 오늘날 세계 최고의 '아날로그 파사드의 전쟁터'입니다. 초기 성수에 상륙한 사람들이 브랜드 가치나 철학을 드러내는 방식과는 약간 다른 모습입니다.


이렇게 성수동의 최근 역사는 다양한 주체들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벌여온 '상륙기'입니다.


하지만 상륙의 움직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상륙을 위한 분명한 이유와 낮은 문턱이 사라질 때, 이들은 또 다른 기회의 땅을 찾아 떠나게 될 것입니다. 폭발적인 기업 자본의 유입으로 임대료가 급등하고 '성수다움'이라 불리던 날것의 감각이 희미해지는 지금, 성수동은 '상륙지'를 넘어 지속가능한 '정착지'로 전환될 수 있는 조건을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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