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을 채우는 감각이 브랜드가 되는 곳
Written by 김세훈
불과 15년 전의 성수를 기억하는 이들은 이곳을 철물점과 인쇄소, 자동차 공업사가 즐비한 회색 동네로 떠올립니다. 어떤 어르신은 "해가 지면 걷기 무서울 정도로 외지고 어두웠다"고 회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 옛날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지금의 성수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트렌드가 낡은 풍경을 덧칠하고 있습니다. 성수는 최근 상륙한 이들이 자신만의 개성과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거대한 무한경쟁 캔버스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에는 늘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중 하나는 물리적 공간의 여유입니다. 성수동을 걷다 보면 다른 동네와 달리 길이 시원하게 뚫리고 건물이 들어선 땅이 큼직하다고 느낍니다. 인파가 많을 때도 마찬가지죠. 단지 동네가 커서가 아닙니다. 땅이 크다는 점은 성수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단서입니다. 현재 성수동의 도시 골격은 1960년대, 정부가 급격한 산업화를 뒷받침할 경공업 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뚝섬 일대에 시행한 토지구획정리사업의 결과입니다.
이때 적용된 도시계획의 기본 단위인 '블록'은 공장 운영의 효율을 극대화하고 큰 차량이 왕래하기 문제가 없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토지구획정리사업에서 설정한 성수동의 블록의 크기는 가로 120m, 세로 80m로, 면적 10,000㎡(약 3,000평)입니다. 현재 아모레 성수나 성수초등학교, 에스팩토리 등이 차지하고 있는 블록이 바로 이 규격에 해당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 정도 블록이 정말 큰 것인지 물을 수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고밀도 상업 활동을 위해 조성된 종각역 일대의 블록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종각역과 삼일대로, 청계천으로 구획된 블록은 90m x 40m로 성수 블록의 삼분의 일 밖에 안 되는 크기입니다.
이렇게 계획된 대형 블록은 다시 10개에서 15개 내외의 필지로 분할되었고, 그 결과 개별 필지 면적은 평균 700~1,000㎡(약 210~300평)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 면적은 중소규모 공장 하나가 들어서기에 충분했기에, 자연스럽게 ‘1필지=1공장=1소유주(법인)’라는 구조가 자리 잡았습니다.
이 단순한 소유 구조와 단일 대형필지는 훗날 성수동 변화의 큰 동력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토지이용 방식이 바뀔 때 가장 큰 장애물은 복잡한 소유와 이해관계의 상충입니다. 성수에서는 이런 문제가 비교적 적었습니다. 탈산업화 과정에서 공장 부지를 매물로 내놓거나, 여러 필지를 합병해 대규모 지식산업센터를 짓는 것이 다른 도심 지역에 비해 훨씬 수월했죠. 게다가 용적률 400% 이상으로 신축이 가능한 200~300평 규모의 단일 소유 부지는 서울에서도 흔치 않았습니다.
여기에 더해 1980~90년대 서울 전역을 강타한 대규모 재개발 혹은 정비사업을 비껴간 덕분에 성수에서는 낡은 공장과 붉은 벽돌 건물이라는 거친 물성이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이들 건물의 특징 중 하나는 천장고가 높다는 점입니다. 실내 공간의 높이와 너비가 충분하다는 점은 다양한 공간 실험을 위한 여건이 됩니다. 한 예로 대림창고 갤러리의 천장고는 7m가 넘습니다. 코사이어티 전시장 중 가장 높은 곳은 천장고가 4.8m이고, 제일 낮은 나무 보까지도 3.1m입니다. 더욱이 성수동에 있는 촬영 스튜디오들은 유난히 '자연광'이 들어오는 높은 층고의 실내 환경을 자랑합니다.
이렇게 여유로운 필지 크기, 충분한 건물의 높이, 거친 물성이 주는 ‘여백’과 미완성의 ‘날것’ 그대로의 분위기는 홍대와 가로수길의 젠트리피케이션을 피해 새로운 기회를 찾던 창작자들에게 복제 불가능한 캔버스를 제공했습니다. 그들은 낡은 공장의 거친 질감을 그대로 살려 갤러리로 만들고, 녹슨 철문을 감각적인 디자인 요소로 재해석하며 자신들의 감각을 공간에 새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오래된 공장을 새로운 도심 제조업이나 양조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창업가들에게도 큰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다고 공간을 만드는 일이 결코 여유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더 빠른 호흡으로 남보다 돋보이기 위한 디자인의 전쟁터를 방불케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성수동은 단순히 지리적 위치를 넘어 그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마치 스타트업 기업들이 실제 활동은 다른 곳에서 하더라도 본사 주소는 '강남'을 선호하듯, 오늘날의 크리에이티브 기업과 패션 브랜드에게 성수동에 있다는 사실은 '트렌디함', '진정성', '창의성'을 떠올리게 하는 비언어적 선언과도 같습니다. 입지가 곧 간판이 되는 현상입니다.
소비자들은 '성수에 있으니 뭔가 다르겠지'라는 기대를 품고 방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대와 입장감은 오프라인 경험을 증폭시키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성수에 상륙한 브랜드 입장에서는 막대한 마케팅 비용 없이 입지의 후광 효과를 누리게 됩니다. 물론 이런 효과는 진짜 좋은 컨텐츠로 뒷받침하지 못하면 빠르게 실망감으로 변합니다. 간판을 함부로 세우면 안되는 이유입니다.
후광 효과는 심지어 기업의 인재 채용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IT 업계 한 인사 담당자는 "성수동에 있는 오피스는 그 자체로 젊은 인재들에게 매력적인 복지 혜택이자, 회사의 입지 선택 감각을 말없이 보여주는 지표"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효과의 정점에 팝업 스토어가 있습니다. '곧 사라지는', '한정된 기회'라는 팝업의 속성은 소비자의 직접 방문을 유도하며 성수동의 트렌디한 이미지를 재생산합니다. 물론 최근에는 팝업 과잉으로 인한 피로감이 누적되고 있다는 비판도 존재합니다. 성수의 이미지는 여기저기서 빠르게 소모되고 있고 이러다간 새로움이 곧 고갈될 것이라는 우려도 큽니다. 그럼에도 성수동이 각종 브랜드의 중요한 ‘실험의 장’이라는 점은 당분간 변치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성수의 여백은 그것을 알아본 개척자들의 감각으로 채워졌습니다.
2016년 문을 연 수제 맥주 브랜드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ABC)도 그런 사례입니다. 김태경 대표는 100평이 넘는 양조 공간과 창고, 펍을 수용할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서울에서는 문래, 을지로, 성수 정도가 후보였는데, 마침 성수동의 낡은 목공소 자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곳은 단순히 맥주를 만드는 공장을 넘어, 차(茶)를 넣은 맥주 같은 새로운 실험을 하고 소비자와 직접 소통하는 비즈니스 최전선이었습니다. 비록 최근 경영난으로 회생 절차를 밟고 있지만,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의 도전은 타 F&B와 제조사의 창업가들에게 성수의 가능성을 알린 이정표였습니다.
소셜벤처 생태계 역시 성수동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축입니다. 임팩트 투자사 HGI가 만든 카우앤독이나 현대가 3세 정경선 의장이 설립한 루트임팩트가 헤이그라운드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코리빙 스타트업 엠지알브이(MGRV)는 헤이그라운드의 작은 사무실에서 시작해, 사업이 확장될 때마다 옆 사무실 벽을 허물며 네 번이나 공간을 넓혔습니다. 한 직원의 “헤이그라운드와 함께 성장했다”는 말은 성수동의 공간이 어떻게 기업의 성장을 품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건축물 역시 성수라는 맥락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2023년 11월 문을 연 탬버린즈 플래그십 스토어는 지상에 건물의 뼈대만 남기고 주된 매장과 전시 공간은 지하에 배치했습니다. 짓다 만 건물, 공사판 흔적 같은 모습에 대해 백영선 대표는 "만약 이 건물이 다른 지역에 있었다면 흉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수라는 맥락 안에서 전위적이고 힙한 건축으로 인정받는다"고 말합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탬버린즈는 날 것 같은 구조체를 남겨 여백의 감각을 살리고 진짜 공간은 지하에 품었습니다. 아득바득 지상에 한 평이라도 더 많이 지으려는 세속적 접근과는 다릅니다. 궁극의 튜닝은 순정, 최고의 럭셔리는 군더더기 없이 비운 공간이라는 의지를 3차원으로 묵묵히 드러냅니나.
성수동의 요즘 변화는 어느 한 요소의 결과가 아닙니다. 공공이 계획한 거대한 물리적 기반 위에, 창조적 인재들이 모여 독특한 문화자본을 쌓았습니다. 이것이 사회혁신 생태계와 결합하며 건강한 가치를 더했고, 마침내 그 모든 자산의 총합이 거대 자본과 국제적 관심을 끌어들이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성수동은 과거의 유산 위에 새로운 감각을 끊임없이 쌓아 올리는, 여전히 ‘진행형’인 실험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