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힐 창업자 Jacob의 한국 방문기
키 194cm의 거구. 인도 출신, 40대 초반, 세 아이의 아빠. 적극적인 성격에 음식 안 가림. 창업 8년만에 상장(IPO) 추진 중인 역동적인 사업가. 싱가포르에서 글로벌 PR에이전시 레드힐(Redhill)을 창업한 Jacob Puthenparambil(제이콥 푸텐파람빌)에 대한 묘사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한동안 한국을 못 찾다가 지난 6~10일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20개국에 퍼져 있는 레드힐 지사들을 방문하는 일정입니다. 미국계 에이전시들이 글로벌 PR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가운데, 동남아 기반으로 급성장하고 있는 PR에이전시라는 점, 그리고 최근 주목받고 있는 동남아와, 인도 등 서남아 시장에 대한 관심 때문에 몇몇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이 있었고 아시아 시장에 투자하고 있는 벤처캐피탈(VC) 관계자들과 미팅도 잡혔습니다. 인터뷰와 미팅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몇가지 느낀 점들을 요약합니다.
인구 30억의 아시아, 4억의 북미
우리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스타트업들은 실리콘밸리로 대표되는 북미 시장을 꿈꿉니다.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탈(VC)의 투자를 받거나 실리콘밸리에 진출한 스타트업들은 언론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북미 시장에서 성공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엄청난 경쟁자들이 있는데다, 북미 시장의 여론을 주도하는 미국 언론의 관심은 외국에서 온 기업이 아니라 미국(적어도 영어권)의 스타트업들에게 쏠려 있습니다.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가지고 있어도 한국 스타트업이 받을 수 있는 주목도는 상대적으로 낮다는 뜻입니다.
제이콥은 이런 점을 들면서 "이제는 북미 말고 아시아 시장에 주목하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북미의 인구는 4억 명 정도인데 아시아는 30억 명이 넘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 앱을 1억 명이 다운로드 받게 하고 싶다고? 그렇다면 인도에서 하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제이콥의 모국인 인도의 인구는 14억 명, 인터넷 사용자 6억 명, 스마트폰 이용자 5억 명, 소셜미디어 이용자는 4억6천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됩니다.
한국인이 만든 인도의 '대표 메신저'와 '인도 국민 앱'
한국인이 만든 '토종 동영상 채팅 앱'인 <아자르>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한국의 스타트업 하이퍼커넥트가 한국에서 만든 이 앱은 사용자의 99%를 인도와 중동, 유럽 등 해외에서 확보했습니다. 통신 환경이 좋지 않은 곳에서도, 또 단말기 종류에 관계없이 최적화된 동영상 채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 회사의 기술력은 한국에서보다 인도 같은 나라에서 더 빛을 발했습니다. <아자르>는 200개 이상 국가에서 5억 회 이상의 다운로드를 기록했고, 인도와 유럽의 '대표 메신저'로 등극했습니다. <아자르>를 만든 하이퍼커넥트는 2021년 미국 기업에 2조원이라는 거액에 팔렸습니다.
인도에서 사업을 하던 한국인 사업가 이철원 씨(밸런스히어로 대표)의 사례도 있습니다. 이 대표는 세계적으로 스타트업 붐이 일자,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자신의 사업을 접고 '트루밸런스(TrueBalance)'라는 앱을 만들었습니다. 인도 현지 사정을 반영해 처음 통신료 잔액 확인에서부터 시작한 이 서비스는 이용자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통신료 충전-대출-e커머스-보험으로 사업 영역을 급속히 확산했습니다. 작년 가을 기준 다운로드 수가 7천5백만 회를 넘어서면서 한국 미디어로부터 '인도 국민 앱'이라는 별칭까지 얻었습니다.
인도는 스타트앱의 새로운 성장 시장으로 떠오르는 곳입니다. 인도에서만 벌써 100개가 넘는 유니콘(기업공개 전 가치가 10억 달러, 약 1조원으로 평가받은 스타트업)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의 유니콘이 이제 10개 겨우 넘은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입니다. 자체 시장도 크고, 대도시 중심으로 스타트업 생태계도 잘 갖춰져 있습니다. 제이콥이 이번에 만난 한국의 VC 중 한 곳은 투자금의 70%를 인도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V.I.P. 시장은 또다른 기회
인도, 그리고 테마섹(TEMASEK, 싱가포르국부펀드)으로 유명한 싱가포르 외에 관심을 가져야 할 시장은 VIP입니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앞 글자를 딴 것입니다. 이 세 나라는 각각 인구가 약 1억, 2.7억, 1억에 이르며 스타트업 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젊은층 비율이 높은 나라입니다. 또 해외로 파견나가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도 이 세 나라의 공통점입니다. 해외 파견 근로자가 많다는 건 전파력이 크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필리핀에서 성공한 서비스라면 필리핀 근로자가 많은 싱가포르에서도 사용자가 많다는 뜻이고, 이 명제는 거꾸로도 적용됩니다. 싱가포르에서 성공한 서비스라면 현지 필리핀인 사용자들을 통해 필리핀 본토로도 확산될 수 있다는 거죠. 교류가 활발한 동남아 시장은 이런 점에서도 매력적입니다.
한국은 이미 훌륭...자신감을 가져라
해외 진출을 원하는 한국 기업들에 어떤 조언을 해 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제이콥의 첫 마디는 "자신감을 가져라"였습니다. 한국의 제품과 서비스는 이미 훌륭하고, 전 세계에 한국을 좋아하는 소비자는 차고 넘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감이 없으니 자꾸 미국을 따라 하려고 하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했던 매력적인 발표를 많은 사람들이 흉내 내는데, '효과는? 글쎄요'라는 겁니다. 제품과 서비스가 자신 있다면 그냥 한국말로 발표해도 된다고 제이콥은 말했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은 이제 더 이상 미국의 승인(validation)을 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성장했는데, 자신감 부족으로 과거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게 그의 지적입니다. 자기가 볼 때 한국은 경제 뿐 아니라 많은 점에서 세계의 표준이 될 만하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면서 예로 든 게 '카카오톡'입니다. UI와 UX를 비롯해 모든 면에서 전 세계 다른 메신저 앱을 압도하는데, 동남아 시장 진출에 실패했다며 안타까워 했습니다.(제이콥은 카카오톡 애용자입니다. "카카오가 다시 한 번 동남아 시장을 시도한다면..." 제이콥은 카카오가 레드힐의 고객사가 될 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K팝과 영화, 드라마 등 외에 제이콥이 한국을 칭찬한 것 중 하나는 계약서입니다. 미국의 계약서는 거의 책 한 권 분량일 때가 많은데, 한국 계약서는 '딱 두 장'인데 있을 거 다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제이콥이 한국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싶으면서도, 돌이켜보면 나도 미국 계약서 보고 질린 적이 많은데 왜 우리나라 계약서가 더 좋다는 생각은 안 해봤을까 반성했습니다.
제이콥이 지적한 한국의 단점도 있습니다. 한국은 제도적으로 개방적이고 규제도 덜 한 편인데, 타 인종에 대한 경계가 심하다는 것입니다. (지난 글에서 설명한, 폴란드인 Marta의 '아무리 한국말을 유창하게 해도 자신은 한국 사람들에게 여전히 외국인'이란 말과 같은 맥락입니다.) 한국의 오랜 전통 때문이고 단기간에 해결될 일은 아니지만,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인도의 스승 마하트마 간디가 이런 말을 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문을 열어 모든 바람이 들어오게 하라. 두 발만 이 땅에 붙이고 있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