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두 친구의 시작

by 줄리엣 호텔

1998년, 서울 은평구

"야, 안경 쓴 애! 거기 서!"

초등학교 3학년 강현석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김태수. 같은 반에서 가장 덩치가 큰 아이. 공부는 못했지만 주먹만큼은 빨랐다.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아이는 유독 현석을 괴롭히는 것을 즐겼다.

"못 들었어?"

현석은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걸었다. 집까지는 아직 한 블록이나 남았다. 운동장을 지나, 정문을 빠져나가, 골목길만 건너면 되는데...

"야! 이 새끼가 지금 무시해?"

발소리가 빨라졌다. 세 명이었다. 김태수와 그의 똘마니 둘.

현석은 달렸다.

안경이 콧등에서 미끄러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가방이 등을 두드렸고, 가슴은 터질 듯 뛰었다. 하지만 몸이 약한 현석은 얼마 못 가 숨이 찼다.

"잡았다!"

누군가의 손이 현석의 가방끈을 잡아챘다. 현석은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아스팔트 바닥에 엉덩이를 세게 부딪혔고, 손바닥이 까졌다.

"하하하! 봐봐, 이 새끼 넘어지는 거!"

김태수가 웃으며 다가왔다. 현석은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담벼락이었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오늘은 뭐 가져왔나? 어디 보자."

김태수가 현석의 가방을 낚아챘다. 지퍼를 열고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교과서, 공책, 필통... 그리고 게임보이.

"오, 이거 신상이잖아? 나 이거 갖고 싶었는데."

"그, 그거... 돌려줘..."

현석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게임보이는 생일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한 달 동안 야근해서 모은 돈으로 사준 거였다.

"뭐? 돌려달라고?"

김태수가 비웃으며 게임보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바닥에 내던질 것처럼 손을 휘둘렀다.

"안 돼!"

현석이 소리쳤다. 하지만 김태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야, 거기 뭐 하는 거야?"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현석이 고개를 돌렸다. 골목 입구에 한 아이가 서 있었다. 같은 학년으로 보이는 남자아이. 키는 현석과 비슷했지만, 체격이 훨씬 탄탄해 보였다. 땀에 젖은 도복을 입고 있었다.

"너 누군데?"

김태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진우. 너희 학교 학생은 아니고... 저기 태권도장 다녀."

진우가 길 건너편 2층 건물을 가리켰다. '백호 태권도장'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태권도? 크크, 그래서? 네가 우리한테 대들 거야?"

김태수의 똘마니 중 하나가 비웃었다. 하지만 진우는 웃지 않았다. 그는 차분한 눈빛으로 김태수를 바라보았다.

"대들려는 게 아니야. 그냥... 그 친구 물건 돌려주고 가면 안 될까? 셋이서 한 명을 괴롭히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뭐야 이 새끼? 진짜 한 대 맞고 싶어?"

김태수가 게임보이를 가방에 던져 넣고 진우에게 다가갔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서 있는 자세가 묘했다. 양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무게중심을 낮추고, 두 손을 자연스럽게 내렸다. 긴장한 것 같지도, 겁먹은 것 같지도 않았다.

김태수가 주먹을 휘둘렀다.

빠르지 않았다. 아니, 초등학생의 주먹이 빠를 리 없었다. 하지만 현석 같은 아이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인 속도였다.

하지만 진우에게는 아니었다.

진우는 몸을 살짝 옆으로 틀었다. 김태수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진우의 손이 김태수의 팔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밀지도, 당기지도 않았다. 그냥 잡았을 뿐인데, 김태수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뭐, 뭐야..."

김태수가 당황했다. 다시 주먹을 날렸다. 이번에는 왼손으로.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진우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했고, 김태수는 스스로 중심을 잃었다.

"그만하자."

진우가 조용히 말했다. 화나거나 흥분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걱정하는 듯한, 타이르는 듯한 톤이었다.

"넌 지금 화가 나 있어서 힘 조절이 안 되고 있어. 계속 싸우면 다칠 수도 있어. 너도, 나도."

김태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보다 작고 약해 보이는 아이가 두려웠다.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두 번이나 주먹을 날렸는데, 한 대도 맞히지 못했다. 게다가 상대는 반격조차 하지 않았다.

"...치, 재수 없어."

결국 김태수가 물러섰다. 현석의 가방을 바닥에 내던지고, 똘마니들과 함께 황급히 자리를 떴다.

"괜찮아?"

진우가 현석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현석은 그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까진 손바닥에서 피가 조금 배어나왔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다른 감정이 너무 강해서 통증 따위는 잊혀졌다.

부끄러움. 수치심. 그리고... 동경.

"응... 괜찮아."

현석이 진우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진우는 웃으며 현석의 가방을 주워 건넸다.

"게임보이 무사하네. 다행이다."

"...고마워."

"천만에. 나는 이진우라고 해. 너는?"

"강현석."

"현석이구나. 우리 같은 학년이야?"

"응... 3학년."

"나도! 어느 학교야?"

"은빛초등학교."

"오, 나는 금빛초등학교. 가깝네!"

진우는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어떤 꾸밈도, 우월감도 없었다. 순수하게 기쁜, 새 친구를 만난 아이의 미소였다.

현석은 그 미소를 보며 생각했다.

'이 아이는... 나와 다르다.'

강하지만 공격적이지 않고. 자신감 있지만 오만하지 않고. 도와줬지만 은혜를 베푼 것처럼 굴지 않는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그날 이후, 두 아이는 친구가 되었다.

진우는 현석을 백호 태권도장으로 데려갔다. 관장님은 마흔대 중반의 건장한 남자였다. 이름은 최무진. 한때 국가대표 선수였다가 은퇴 후 도장을 연 사람이었다.

"호오, 새 제자를 데려왔나?"

최무진 관장이 현석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현석은 긴장한 채 고개를 숙였다.

"네, 관장님. 제 친구인데요, 몸이 좀 약해서... 저처럼 태권도를 배우면 건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음..."

관장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현석에게 물었다.

"현석아, 너는 왜 태권도를 배우고 싶니?"

현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왜?

강해지고 싶어서? 다시는 괴롭힘 당하지 않으려고? 진우처럼 되고 싶어서?

모든 이유가 맞았지만, 어느 것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진우가 대신 말했다.

"관장님, 현석이는 착한 친구예요. 오늘 다른 애들한테 괴롭힘 당하는데도 싸우지 않았어요. 도망치려고만 했고요."

"그래?"

관장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현석아, 태권도는 싸우기 위한 무술이 아니란다. 태권도를 하는 진짜 이유는... 싸우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해지기 위해서야."

현석이 고개를 들었다.

"싸우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해지는 거요?"

"그래. 네가 정말로 강하면, 상대는 널 건드리지 않아. 그리고 네가 정말로 강하면, 굳이 네 힘을 증명할 필요도 없어. 진짜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을 보호하는 사람이란다."

관장이 진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우가 그래. 얜 우리 도장에서 가장 실력이 좋지만, 한 번도 친구들과 싸운 적이 없어. 왜냐하면 얜 자기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그 힘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것도 알거든."

현석은 진우를 바라보았다. 진우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배우겠니?"

관장이 다시 물었다.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배우고 싶어요."

"좋아. 그럼 내일부터 나와. 도복은 내가 하나 빌려줄게."

그날부터 현석의 삶이 바뀌었다.

매일 방과 후, 그는 도장으로 달려갔다. 처음에는 기본기도 제대로 못 했다. 준비운동만 해도 숨이 찼고, 발차기 연습을 하면 종아리가 쥐가 났다.

하지만 현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진우가 옆에서 도와줬다. 스트레칭 자세를 교정해주고, 발차기 폼을 알려주고, 힘들어할 때마다 응원했다.

"현석아, 잘하고 있어! 처음보다 훨씬 나아졌어!"

"진짜?"

"응! 저번 주만 해도 앞차기 할 때 중심이 흔들렸는데, 지금은 거의 안 흔들려."

진우의 칭찬은 현석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현석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6개월 후.

"좋아, 현석아! 이번엔 진짜 제대로 됐어!"

최무진 관장이 박수를 쳤다.

현석은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방금 띠 심사를 마친 참이었다. 노란띠에서 초록띠로 올라가는 심사. 품새, 발차기, 겨루기 모두 통과했다.

"고생했어."

진우가 수건을 건넸다. 현석은 웃으며 받았다.

"너 덕분이야, 진우야."

"무슨 소리야. 네가 열심히 한 거지."

"그래도... 네가 없었으면 진작 그만뒀을 거야."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난 그냥 옆에 있었을 뿐이야. 이건 네 힘이야, 현석아."

현석은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6개월 전만 해도 이 손은 약하고 떨렸다. 지금은 굳은살이 박혔고, 힘이 있었다. 몸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계단만 올라도 숨이 찼는데, 이제는 한 시간 넘게 훈련해도 버틸 수 있었다.

'나도 강해졌어.'

현석은 생각했다.

'이제는 김태수 같은 애들이 와도 두렵지 않아. 아니, 그들이 날 건드리지도 못할 거야.'

그리고 그는 옆에 앉아 있는 진우를 바라보았다.

진우는 여전히 똑같았다. 온화하고, 친절하고, 강하지만 자랑하지 않았다.

'진우는... 힘을 얻어도 변하지 않았어.'

현석은 알고 있었다. 진우는 도장에서 가장 강했다. 관장님조차 "진우는 천재"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진우는 그 힘을 내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약한 아이들을 도왔고, 새로 들어온 아이들을 챙겼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어.'

현석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는.

하지만 1년 후, 사건이 일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어느 날, 현석은 혼자 하교하고 있었다. 진우는 그날 가족 행사로 먼저 집에 갔고, 현석은 도서관에서 책을 보다가 늦어졌다.

해가 지고 있었다.

골목길은 어두웠다. 가로등이 몇 개 고장 나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야."

현석의 발걸음이 멈췄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김태수. 2년 전 그 아이였다. 하지만 이제는 5학년이었고, 덩치도 훨씬 커져 있었다.

"오랜만이네, 안경."

김태수가 웃으며 다가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역시 2년 전처럼 두 명의 똘마니를 데리고 있었다.

현석은 긴장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떨리지는 않았다. 2년 동안 태권도를 배웠다. 이제는 녹색띠였고, 곧 파란띠 심사를 앞두고 있었다. 몸도 많이 좋아졌다.

"뭐 하냐?"

현석이 차분하게 물었다. 진우에게 배운 대로, 목소리를 낮고 침착하게 유지했다.

"뭐긴 뭐야. 2년 전 기억나지? 네가 그 태권도 새끼 불러서 나 개망신 당했잖아."

"그건..."

"닥쳐. 오늘은 그 새끼도 없고, 널 도와줄 놈도 없어."

김태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현석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도망칠까? 아니면 맞서 싸울까?

2년 전의 현석이라면 무조건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강해졌다. 자신감이 있었다.

'한 대 정도는... 맞을 수도 있어. 하지만 내가 이길 수 있어.'

현석은 태권도 준비자세를 취했다.

"그만하자. 굳이 싸울 필요 없잖아."

"하, 봐라. 2년 배웠다고 완전 달라졌네?"

김태수가 비웃었다. 그리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현석은 더 이상 2년 전의 약한 아이가 아니었다.

김태수의 주먹이 날아왔다. 현석은 진우에게 배운 대로 옆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돌려차기. 발이 김태수의 옆구리를 정확히 타격했다.

"으윽!"

김태수가 비틀거렸다. 현석은 놀랐다.

'내가... 했어?'

처음으로 누군가를 쳤다. 훈련 때 샌드백을 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실제 사람의 몸에 닿는 감촉. 상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그런데 이상했다.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짜릿했다.

"이 새끼가...!"

김태수가 화가 나서 다시 덤벼들었다. 이번에는 두 명의 똘마니도 함께. 하지만 현석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침착하게 움직였다.

옆차기로 한 명을 밀어냈다. 주먹 막기로 다른 한 명의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김태수의 팔을 잡아 넘겼다.

3대 1.

하지만 현석이 이겼다.

세 아이는 바닥에 나뒹굴었고, 현석은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손이 떨렸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흥분이었다.

"다시는... 건드리지 마."

현석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김태수는 대답하지 못하고 절뚝거리며 도망쳤다.

현석은 혼자 남았다.

그리고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나... 강해.'

기쁨이 밀려왔다. 2년 동안 노력한 보상이었다. 드디어 약한 자신과 작별할 수 있었다. 이제는 아무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한 감정도 느껴졌다.

'이게... 맞는 걸까?'

진우라면 어땠을까? 진우라면 싸우지 않고 해결했을까?

현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는 나야. 진우는 진우고.'

그는 가방을 집어들고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 도장에서.

"현석아, 어제 괜찮았어?"

진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현석의 손등에 멍이 있었다.

"응... 괜찮아."

"무슨 일 있었어?"

"아냐, 그냥... 넘어져서."

현석은 거짓말을 했다.

왜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스스로도 확실하지 않았다. 부끄러워서? 아니면... 진우가 실망할까 봐?

진우는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훈련이 시작되었다.

평소처럼 둘은 함께 연습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현석은 예전보다 공격적이었다. 발차기에 힘이 더 들어갔고, 겨루기 연습에서도 거칠었다.

"잠깐."

진우가 손을 들어 멈췄다.

"현석아, 너 오늘 좀 이상해."

"뭐가?"

"너무 세게 하고 있어. 이건 겨루기 연습이야. 진짜 싸움이 아니고."

"...미안."

현석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불편했다.

'내가 강해진 게 문제야?'

그날 밤, 현석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진우는 강하지만 싸우지 않아. 나는 강해졌고, 싸워서 이겼어. 뭐가 맞는 걸까?'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현석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작은 씨앗 하나가 싹트고 있었다.

'힘이 있으면...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어. 힘이 있으면... 아무도 날 무시하지 못해.'

그 씨앗은 시간이 지나며 자라날 것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큰 나무가 되어 두 친구 사이를 가로막을 것이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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