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 일어나서 3번 문제 풀어봐."
수학 선생님의 목소리에 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칠판에는 복잡한 미적분 문제가 적혀 있었다. 진우는 잠시 문제를 보더니, 분필을 집어 들고 술술 풀어나갔다.
교실 뒷자리에서 현석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전했다. 진우는 공부도 잘했고, 운동도 잘했고, 성격도 좋았다. 완벽한 모범생.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학생.
'부럽지 않아.'
현석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나대로 잘하고 있어. 전교 5등이면 충분해. 진우만큼 될 필요는 없어.'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점심시간.
진우와 현석은 늘 그렇듯 함께 식사를 했다. 12년 동안 이어진 우정. 초등학교부터 같은 중학교를 거쳐, 운 좋게도 같은 고등학교까지 진학했다. 반은 달랐지만, 점심은 항상 함께였다.
"야, 현석아."
"응?"
"너 요즘 태권도장 안 나오지?"
진우가 물었다. 현석은 국을 떠먹으며 대답했다.
"응... 바빠서. 학원도 다녀야 하고."
"그래도 가끔은 나와. 관장님이 네 안부 물으시더라."
"알았어."
짧은 대답이었다.
사실 현석은 1년 전부터 태권도장에 거의 나가지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대학 입시 준비도 있었고, 학원 스케줄도 빡빡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진우와 함께 있으면, 자꾸 비교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도장에서도, 학교에서도, 어디서나 진우는 중심이었다. 현석은 항상 '진우의 친구'였다.
'이진우의 친구 강현석.'
그 호칭이 싫었다.
"참, 다음 주에 봉사활동 가는데 같이 갈래?"
진우가 물었다.
"봉사활동?"
"응. 우리 반에서 양로원 방문하기로 했어. 할머니, 할아버지들 말벗도 되어드리고, 청소도 좀 하고."
현석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바빠서 안 될 것 같아. 토요일에 모의고사 학원 가야 돼."
"그래? 아쉽다. 재밌을 텐데."
진우는 실망한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진우의 방식이었다. 절대 자신의 가치관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현석은 그런 진우가 더 답답했다.
'왜 화를 안 내? 왜 실망했다고 말하지 않아? 그냥... 웃고 넘기잖아.'
방과 후.
현석은 학생회실로 향했다. 그는 올해 학생회 부회장이었다. 회장은 3학년 선배였고, 실질적인 일은 대부분 현석이 처리했다.
"현석아, 체육대회 예산안 확인 좀 해줄래?"
총무부장이 서류를 건넸다. 현석은 꼼꼼히 검토했다. 숫자에 오류가 있었다.
"여기 계산 틀렸어. 다시 해와."
"아, 미안. 바로 고칠게."
현석은 일을 잘했다. 정확했고, 빨랐고, 효율적이었다. 선생님들은 그를 신뢰했고, 학생들은 그를 따랐다.
하지만 사랑받지는 못했다.
진우처럼.
진우는 학생회에 속하지 않았다. 특별한 직책도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나 나타났다. 무거운 짐을 옮겨야 할 때, 싸움을 말려야 할 때, 울고 있는 친구를 위로해야 할 때.
사람들은 진우를 좋아했다.
그리고 현석은... 존중받았다. 하지만 사랑받지는 못했다.
'그게 뭐 어때.'
현석은 생각했다.
'사랑받는 것보다 중요한 게 많아. 인정받고, 성공하고, 힘을 가지는 것. 그게 더 중요해.'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
현석은 편의점 앞을 지나가다 멈춰 섰다.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진우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소희.
박소희. 2학년 4반. 조용하고 착한 여학생. 성적은 중위권이었지만,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특히 동물을 좋아해서, 학교에 떠돌이 고양이가 나타나면 항상 먹이를 챙겨주곤 했다.
진우와 소희는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현석은 다가가지 않았다. 그냥... 지켜보았다.
진우가 편의점 봉지에서 삼각김밥을 꺼내 소희에게 건넸다. 소희는 손을 저으며 사양했지만, 진우는 웃으며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저 둘... 사귀나?'
현석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진우의 연애는 진우의 일이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하지만 이상했다.
가슴 한구석이 답답했다. 질투? 아니, 그건 아니었다. 현석은 소희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 그럼 뭐지?
'외로움인가?'
현석은 고개를 저었다. 외로울 이유가 없었다. 학생회에 친구들도 많았고, 학원에도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진우 같은 친구는 없었다.
진우만이...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릴 적 약했던 자신을, 괴롭힘 당하던 자신을, 그 모든 것을 알고도 친구로 남아준 사람.
'그런데 왜...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 드는 걸까?'
며칠 후, 사건이 터졌다.
학교 뒤편 골목에서 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3학년 일진 그룹이 1학년 학생을 괴롭혔고, 그 과정에서 진우가 개입했다.
현석은 소문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다.
"야, 들었어? 이진우가 3학년 놈들이랑 싸웠대."
"진짜? 이진우가? 그 착한 애가?"
"응. 근데 이긴 거야. 혼자서 세 명을."
"헐... 진우 진짜 강하긴 하구나."
현석은 교실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우를 찾아야 했다.
옥상.
진우는 혼자 난간에 기대서 있었다. 교복 셔츠 소매가 찢어져 있었고, 입술이 약간 부어 있었다.
"진우야."
현석이 다가갔다. 진우는 고개를 돌렸다. 웃으려 했지만, 입술이 아파서 인상을 찌푸렸다.
"아, 현석아. 들었구나."
"괜찮아?"
"응. 별일 아니야."
현석은 진우 옆에 섰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불어왔다. 11월의 찬바람.
"왜 그랬어?"
현석이 물었다.
"왜 개입했냐고? 당연하잖아. 1학년 애가 맞고 있는데, 그냥 지나칠 순 없지."
"혼자 감당할 수 있었어?"
"글쎄... 솔직히 좀 위험했어. 세 명이었으니까. 근데 다행히 그 중 한 명이 예전에 우리 도장 다녔던 애라서, 날 알아봤어. 그래서 싸움이 커지진 않았어."
진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관장님한테 혼날 거야. 싸웠다고."
"그래도 한 거야?"
"응."
"왜?"
진우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조용히 대답했다.
"예전에 관장님이 그러셨어. 태권도를 배우는 이유는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싸움을 막기 위해서라고. 그리고... 정말 필요한 순간에는 망설이지 말라고."
"필요한 순간?"
"응. 약한 사람이 다칠 수 있는 순간. 그때는 내 몸이 다치더라도, 막아야 한다고."
현석은 그 말을 들으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부러움과 존경. 그리고... 거리감.
"넌 참... 착하다."
현석이 중얼거렸다.
"착한 게 아니야."
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옳은 일이잖아. 누군가 다치고 있는데, 힘이 있는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야."
"그래. 알아. 근데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현석아, 너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믿어."
진우가 현석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의심이 없었다. 순수한 믿음.
현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할까?'
확신이 없었다.
만약 그 상황이었다면? 만약 자신이 1학년 학생이 맞는 것을 봤다면?
도와줬을까? 아니면... 선생님을 불렀을까? 아니면 그냥 모른 척했을까?
'모르겠어.'
현석은 솔직히 몰랐다.
그날 밤, 현석은 일기를 썼다.
초등학교 때부터 쓰던 습관이었다. 하루를 정리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
<오늘 진우가 또 싸웠다. 아니, 싸웠다기보다는... 누군가를 구했다고 해야 맞겠지.
진우는 변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나를 구해줬던 그 모습 그대로다. 강하지만 부드럽고, 용감하지만 겸손하다.
나는 변했다. 예전의 약했던 나는 없다. 이제는 강하다. 태권도도 흑띠까지 땄고, 공부도 잘하고, 학생회 일도 잘한다.
그런데 왜... 진우와 함께 있으면 여전히 약한 기분이 드는 걸까?
진우는 힘을 보호하기 위해 쓴다. 나는 힘을 증명하기 위해 쓴다.
뭐가 맞는 걸까?>
현석은 펜을 내려놓았다.
대답은 알고 있었다. 진우가 맞다. 관장님의 가르침이 맞다. 힘은 약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 있다.
하지만 마음이 따라가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약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보호받는 사람이 아니라, 보호하는 사람... 아니, 보호가 필요 없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것이 현석의 진심이었다.
주말.
현석은 드물게 태권도장에 갔다. 진우의 권유도 있었고, 관장님께 인사도 드릴 겸 해서.
도장은 여전했다. 아이들의 기합 소리, 발차기 소리, 관장님의 구령 소리. 모든 것이 익숙했다.
"현석아, 오랜만이구나."
최무진 관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안녕하세요, 관장님."
"공부 때문에 바쁘다며? 건강은 괜찮고?"
"네, 괜찮습니다."
"그래. 공부도 중요하지만, 몸도 챙겨야 한다. 몸과 마음은 하나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관장은 현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진우 이야기 들었지? 학교에서 있었던 일."
"네..."
"어떻게 생각하니?"
현석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위험했다고도 생각합니다."
"호오?"
관장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마치 현석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계속해봐."
"진우가 다칠 수도 있었잖아요. 상대가 더 많았고, 더 컸고. 만약 일이 잘못됐다면..."
"그래서?"
"선생님을 부르거나, 다른 방법을 찾는 게 나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다. 현명한 생각이야."
현석은 안도했다.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인을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관장의 다음 말이 그를 멈춰 세웠다.
"하지만 현석아, 세상에는 기다릴 시간이 없을 때가 있단다."
"...네?"
"선생님을 부르러 가는 동안, 그 아이가 다칠 수도 있어. 도움을 구하는 동안,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지."
관장이 도장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아이들이 겨루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태권도를 가르치는 이유가 뭔지 아니? 싸움을 잘하라고? 아니야.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이지 않기 위해서야."
"결정적인 순간..."
"그래. 누군가를 구해야 하는 순간. 옳은 일을 해야 하는 순간. 그때 머리로 생각하면 늦어. 몸이 먼저 움직여야 해."
관장이 현석의 가슴을 가볍게 쳤다.
"여기서 나와야 해.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네가 진짜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그걸 배워야 한다."
현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관장의 말은 옳았다. 이론적으로는 완벽했다. 하지만 현석의 가슴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살 수 없어.'
현석은 깨달았다.
'나는 진우가 될 수 없어. 진우처럼 생각할 수도, 행동할 수도 없어. 우리는... 다른 사람이야.'
그날 저녁, 진우와 현석은 도장 근처 치킨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관장님이 뭐라고 하시던?"
진우가 물었다.
"별로... 그냥 건강 챙기라고."
"그래? 나는 엄청 혼났는데. 싸움은 최후의 수단이라고, 다음부터는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진우가 웃었다. 하지만 후회하는 기색은 없었다.
"현석아."
"응?"
"너는 나중에 뭐가 되고 싶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현석은 잠시 생각했다.
"글쎄... 아직 확실하진 않은데, 경영 쪽으로 가고 싶어. 회사 만들거나, 크게 성공하거나."
"오, 멋있다. 너 잘 어울려. 리더십도 있고, 똑똑하고."
"너는?"
"나? 나는..."
진우가 치킨을 씹으며 생각했다.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어.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는 일."
현석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한 대답이었다.
"잘 어울려."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근데 엄마 아빠는 좀 걱정하시더라. 돈을 많이 못 벌잖아, 그 일은."
"그래도 할 거야?"
"응. 돈보다 중요한 게 있잖아."
진우가 환하게 웃었다.
현석은 그 웃음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정말... 다른 길을 가는구나.'
진우는 사람을 돕는 길을 택했다. 현석은 성공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
진우는 사랑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현석은 존경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둘 다 옳았다. 둘 다 가치 있었다.
하지만 함께 갈 수는 없는 길이었다.
'언젠가는... 우리도 멀어지겠지.'
현석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친구였다. 아직은 함께 치킨을 먹으며 웃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지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