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각성 전야

by 줄리엣 호텔

2024년 3월, 서울

"축하한다, 강현석 군."

인사팀장이 악수를 청했다. 현석은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맞잡았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회사 역사상 최연소 수석 입사야. 기대가 크네. 경영학과 수석 졸업에, 토익 990점, 각종 공모전 수상 경력까지... 완벽한 스펙이야."

"과찬이십니다."

현석은 겸손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뿌듯했다.

드디어 해냈다.

4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왔다. 학점 관리, 영어 공부, 인턴십, 공모전, 봉사활동... 스펙이라 불리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채웠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국내 5대 그룹 중 하나인 한빛그룹. 그곳의 경영전략팀에 수석으로 입사.

'이제 시작이야.'

현석은 생각했다.

'여기서부터 진짜 인생이 시작되는 거야. 성공하고, 올라가고, 인정받는 거. 그게 내가 원하던 거야.'

같은 시각, 서울 은평구.

진우는 낡은 건물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3층까지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걸어 올라가야 했다. 계단 벽면은 곳곳이 금이 가 있었고,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복지관이었다.

'희망복지센터'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지만,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예산 부족으로 몇 년째 리모델링을 못 하고 있었다.

"진우 씨, 오셨어요?"

문을 열자 김미선 선생님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40대 중반의 사회복지사. 이곳에서 15년째 일하고 있었다.

"네, 선생님. 오늘 어르신들 식사 보조 맞죠?"

"맞아요. 고마워요. 요즘 자원봉사자가 너무 없어서..."

"괜찮아요. 제가 배우는 입장인걸요."

진우는 웃으며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는 대학교 4학년이었다. 사회복지학과. 성적은... 중상위권이었다. 현석처럼 수석은 아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진우에게 중요한 건 성적이 아니었다.

현장이었다.

1학년 때부터 그는 매주 복지관에 나왔다. 처음에는 자원봉사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거의 직원처럼 일했다. 어르신들 식사 도우미, 청소, 말벗, 간단한 행정 업무까지.

돈은 한 푼도 못 받았지만, 진우는 행복했다.

"할머니, 오늘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어이구, 진우야. 왔구나. 이 녀석이..."

80대 할머니가 진우의 손을 잡았다. 주름진 손이었지만, 따뜻했다.

"우리 진우가 제일 착해. 다른 젊은 것들은 한 번 오고 안 오는데, 이 녀석은 매주 와."

"제가 좋아서 오는 걸요."

"효자야, 효자. 나중에 우리 손녀딸 소개해줄까?"

"하하, 감사합니다."

진우는 웃으며 할머니의 식판을 치웠다. 그리고 주방으로 가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물에 손을 담그며, 그는 문득 현석을 떠올렸다.

'현석이는 오늘 입사하는 날이지.'

한 달 전에 들었다. 현석이 한빛그룹에 수석 입사했다고. 대단한 일이었다. 자랑스러웠다.

'나랑은... 정말 다른 길을 가는구나.'

진우는 설거지를 하며 생각했다.

현석은 높이 올라갈 것이다. 빌딩 꼭대기 사무실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돈도 많이 벌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진우는... 아마 여기 같은 곳에서 일할 것이다. 낡은 복지관, 부족한 예산, 지친 사람들. 돈은 적게 벌고, 세상은 알아주지 않겠지만.

'그래도 괜찮아.'

진우는 웃었다.

'이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니까.'

저녁 7시.

진우와 현석은 대학가 술집에서 만났다.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대학 들어와서는 각자 바빠서 자주 보지 못했다.

"야, 진짜 축하한다."

진우가 소주잔을 들어 올렸다.

"한빛그룹이면... 진짜 대단한 거잖아. 우리 현석이가 해냈네."

"고마워."

현석도 잔을 들었다. 두 잔이 부딪쳤다.

"너는 어때? 취업 준비는?"

진우가 물었다.

"나? 나는 아직이야. 사실 공채보다는..."

"응?"

"지역 복지관 쪽을 알아보고 있어. 작은 데라도 괜찮으니까, 정말 필요한 곳에서 일하고 싶어서."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답다."

"너답다는 게 뭐야?"

"착하다는 거지. 돈 생각 안 하고, 그냥 사람들 돕고 싶어 하는 거."

진우는 웃었지만, 현석의 말투에서 뭔가 미묘한 뉘앙스를 느꼈다.

비난은 아니었다. 하지만... 존중도 아니었다. 그냥... 사실 확인? 아니면 약간의 동정?

"현석아."

"응?"

"너는... 내가 하는 일을 어떻게 생각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현석은 당황했다.

"무슨 말이야? 좋은 일이지. 사회복지사는 꼭 필요한 직업이고..."

"그게 아니라."

진우가 말을 끊었다.

"솔직하게 말해줘. 너는 내가 복지 일 하는 거...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해?"

침묵이 흘렀다.

현석은 소주잔을 빙빙 돌리며 생각했다. 솔직하게 말해야 할까? 아니면 진우가 듣고 싶은 말을 해야 할까?

"...솔직히?"

"응."

"나는 네가 아까운 것 같아."

진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계속해봐."

"너는 머리도 좋고, 능력도 있고, 사람들을 이끄는 힘도 있어. 그런 너라면 큰 회사 가서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텐데... 복지관에서 설거지하고 어르신들 말벗 되는 게... 너무 작은 일 같아."

"작은 일..."

"아, 잘못 말한 거 아니야. 그 일이 하찮다는 게 아니라..."

"알아."

진우가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조금 슬퍼 보였다.

"네 말도 이해해. 사실 우리 부모님도 비슷한 말씀 하셨어. '네 능력이면 더 좋은 데 갈 수 있는데 왜 복지 쪽을 가려고 하느냐'고."

"그럼?"

"그래도 갈 거야. 왜냐하면..."

진우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이어갔다.

"세상에는 두 가지 일이 있는 것 같아. 크게 보이는 일과, 작지만 꼭 필요한 일.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게 보이는 일을 하고 싶어 해. 당연하지. 인정받고, 성공하고, 돈도 벌고."

"응."

"근데 작지만 꼭 필요한 일은 누가 해? 아무도 안 하면?"

현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그 일을 하고 싶어.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조용히, 꼭 필요한 일을. 그게 내가 태어난 이유인 것 같아."

진우의 눈빛은 확고했다.

현석은 그 눈빛을 보며 깨달았다. 진우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자신을 구해주던 그 소년. 고등학교 때 1학년 학생을 보호하던 그 청년. 그 모습 그대로, 평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변했어.'

현석은 생각했다.

'나는 더 이상 구해지는 사람이 아니야. 나도 강해. 나도 성공할 거야. 진우 없이도.'

"진우야."

"응?"

"우리... 계속 친구 맞지?"

이상한 질문이었다. 진우는 어리둥절했다.

"당연하지. 무슨 소리야?"

"아냐, 그냥... 우리가 너무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아서. 혹시 멀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진우는 현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바보야. 길이 달라도 친구는 친구지. 우린 20년 넘게 친구였잖아.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야."

현석은 웃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며칠 후.

현석은 회사 첫 출근을 했다. 새 정장, 새 구두, 새 가방. 모든 것이 새로웠다.

경영전략팀.

그곳은 회사의 두뇌였다. 중요한 의사결정이 내려지는 곳. 신입사원이 가기에는 파격적인 부서였지만, 현석의 스펙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강현석 씨, 이쪽으로 오세요."

팀장이 그를 불렀다. 40대 중반의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남자. 이름은 박재훈.

"네, 팀장님."

"첫 업무 줄게요. 이번 분기 실적 분석 보고서. 데이터는 여기 있고, 다음 주 월요일까지 요약본 만들어서 제출."

"알겠습니다."

현석은 서류를 받아들었다. 두껍고 복잡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설렜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그는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일을 시작했다.

같은 시각, 은평구 복지관.

진우는 한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할아버지, 요즘 어떠세요? 다리는 좀 나아지셨어요?"

"에이, 그게 나아지겠나. 늙으면 다 아픈 거지."

"그래도 물리치료 받으시면 좋아지실 거예요. 제가 신청 도와드릴게요."

"돈이 어딨어... 치료비가..."

"걱정 마세요. 정부 지원 받을 수 있어요. 서류만 잘 준비하면."

진우는 노트북을 꺼내 신청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그런 진우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고맙다, 진우야. 네가 아니었으면..."

"아니에요. 제가 해야 할 일이에요."

진우는 웃으며 서류를 작성했다.

그에게는 이것이 전부였다. 화려하지 않지만, 의미 있는 일.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절실히 필요한 일.

'이게 내 길이야.'

그날 밤.

현석은 야근을 했다. 첫 주부터 밤 11시까지 일했다. 하지만 불평은 없었다.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이 정도는 해야 인정받지.'

보고서를 완성하고, 이메일을 보내고, 정리를 마쳤다. 그리고 사무실을 나섰다.

서울의 밤거리는 화려했다. 빌딩들의 불빛, 자동차들의 행렬, 사람들의 발걸음. 모든 것이 역동적이었다.

현석은 그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여기 속해 있어. 이 세계에. 성공하고, 올라가고, 인정받는 세계에.'

같은 시각, 진우는 복지관 근처 원룸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작은 방이었다. 월세 30만 원짜리 반지하. 햇빛도 잘 안 들고, 습했지만, 진우에게는 충분했다.

라면을 먹으며, 그는 오늘 만난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물리치료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좋을 텐데.'

그리고 문득 현석을 생각했다.

'현석이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회사 일 재미있을까?'

둘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도시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세계에 있었다.

현석은 빌딩 숲에서 숫자와 씨름하고 있었고. 진우는 골목길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둘 다 열심히 살았다. 둘 다 자신의 길을 믿었다.

하지만 그 길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2024년 6월.

세상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징조였다. 뉴스에서 이상 기후 현상이 보도되었다. 6월인데 폭설이 내린 지역도 있었고, 반대로 영하의 날씨가 이어지던 곳에서 갑자기 폭염이 찾아오기도 했다.

"이상하네..."

현석은 회사 창문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이상한 모양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같은 시각, 복지관에서.

"진우 씨, 이거 봐요."

김미선 선생님이 뉴스를 틀었다.

<전 세계적으로 감정 폭발 사건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뉴욕에서는 한 증권 거래소 직원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무슨 일이지?"

진우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날 밤.

진우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거대한 빛의 소용돌이. 그 중심에 갈라진 원.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


진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뭐지... 이 느낌은...'

불안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며칠 후, 현석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회사에서 회의를 하던 중, 갑자기 현기증이 찾아왔다. 그리고 머릿속에 울려퍼지는 목소리.


선택의 시간이 다가온다.


현석은 책상을 붙잡으며 버텼다.

"강 대리,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뭔가 큰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2024년 7월 15일.

뉴스는 전 세계적인 혼란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대규모 폭동. 원인 불명의 감정 폭발. 통제 불가능한 군중 심리.

과학자들은 설명할 수 없었다. 종교인들은 종말의 징조라고 했다. 정부는 질서 유지에 실패했다.

그리고 7월 20일.

서울 광화문에서 평화 집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임.

진우는 참석하기로 했다. 사회복지사로서, 시민으로서, 그곳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석은...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회사 일로 광화문 근처에 갔다가.

둘은 그곳에서 다시 만날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세상이 바뀔 것이었다.

금요일 연재
이전 03화3화: 갈림길